10년만에 외출한 거장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영화 <희생> <노스탤지아>
▣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생활부 dmsgud@hani.co.kr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1995년 봄 개봉한 <희생>을 보러갔는지 의아하다. 당시 나는 영화 담당기자도 아니었고, 타르코프스키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영화광도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낯설고 새로운 말이었던 ‘예술영화’라는 말에 혹했던 것 같다. 교양인이라면 ‘예술영화’ 정도는 챙겨 봐줘야 한다는 허영심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나는 2시간20분이 넘는 상영시간이 무척 고통스러웠고, 끝까지 졸지 않은 자신이 기특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 같은 관객들 ‘덕분’에 <희생>은 3만명이라는 기적 같은 관객동원 기록을 세웠다. 이건 전세계 최고 기록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도 예술영화 시대가 열린다는 호들갑스러운 기사도 신문에 몇번 등장했던 것 같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희생>을 시작으로 일반 개봉관에서 보기 힘든 해외의 ‘예술영화’들을 배급해온 백두대간이 창사 10주년을 맞았다. 백두대간의 개봉작들을 통해 나처럼 평범한 ‘교양인’들은 변방이라고 생각해왔던 이란에서도 좋은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됐고 앙겔로풀로스, 베리만 등 귀로만 주워담았던 명감독의 작품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개봉한 69편의 영화 가운데는 10만명의 관객을 모은 프랑스 애니메이션 <프린스 & 프린세스>도 있었고, 단관 개봉으로 5만명이라는 최다 관객을 동원한 <타인의 취향>도 있었다.
그러나 예술영화 전반의 침체와 맞물려 최근 백두대간의 개봉작 성적도 옛날 같지는 않다. 비교적 성공했다고 자평하는 <아타나주아>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팻걸> 등이 1만명을 넘긴 정도다. 최근 개봉작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불과 2천명의 관객만 보고 갔다.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수입작품을 골라왔던 이광모 백두대간 대표는 최근 만난 자리에서 “영화를 보면 자꾸 사고 싶으니까 요새는 아예 영화제에 나가지 않는다”는 말로 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사실 <희생>의 흥행은 기현상에 가까웠다. 한 영화평론가는 수업시간에 여러 번 타르코프스키를 강의했고 열번 가까이 이 영화를 봤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하려면 편집을 해서 연결해야 할 정도- 볼 때마다 한두번의 블랙홀에 빠졌다는 이야기- 라니 일반 관객들의 열광이란 허수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90년 후반 순진하게 또는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예술영화’를 보러갔던 관객들의 상당수가 정신을 차렸다는 게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다. 한 사회의 문화적 교양이란 소수의 전투적인 예술애호가들뿐 아니라 ‘예술’이라는 말 앞에서 발걸음을 한번 멈추는 교양주의자들의 허영심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 18일부터 백두대간은 ‘10년 만의 외출’이라는 타이틀로 예전에 개봉했던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와 <희생>을 재개봉한다. 나 역시 두 영화를 보면서 감동보다는 지루함을 더 많이 느꼈던 터라 영화에 대한 전세계의 극찬을 장황하게 펼쳐놓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희생>에서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집이 불타는 장면 등은 아직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평범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의 빈약한 교양 주머니에 어떤 영화의 매우 아름다운 한두 장면을 채워넣는다는 것- 비록 온전히 이해하거나 감동받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관람의 추억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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