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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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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사세요, ‘영웅’도 팝니다!

등록 2005-03-09 00:00 수정 2020-05-03 04:24

영화·드라마의 강자, 민족주의 상품들… 대한민국은 보수·진보 구분없이 ‘좋은 나라 세우기 캠페인’에 열중?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해방 60년. 대한민국은 아직도 건국 중이다. 영화, 드라마 등 문화를 통한 ‘정상 국가’ 만들기 캠페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영화에서는 좋은 공권력이 만드는 정상 국가를 ‘염원’하는 <공공의 적2>가 흥행에 성공했고, 드라마에서는 <영웅시대>를 비롯한 사극과 시대극이 영웅의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이 시작되면서 국민은 또다시 “대~한민국”의 주술에 걸리고 있다. 단일민족 국가는 ‘애국’이라는 단일취향의 사회다. ‘후끈한’ 국가주의 열기는 동원된 것이 아닌 대중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하고 있다. 문화산업은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 민족주의 상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마치 대한민국은 애국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성공이라는 상품이 나오는 자판기 같다.

<실미도>의 흥행과 <역도산>의 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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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흥행에 성공한 <공공의 적2>는 황진미 영화평론가의 표현대로 “제대로 된 국가권력의 품에 안기고 싶다”를 목놓아 외치는 영화다. 2004년 <실미도>는 국가를 위해 헌신했으나 국가에 배신당한 인물들을 통해 국가를 바로 세우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의 ‘좋은 나라 만들기 캠페인’에 국민은 1천만명의 단체관람으로 화답했다. 황진미 평론가는 “<도마 안중근>이 ‘유치하고 감상적인 민족주의’로 비판받는 것을 보고 반가웠는데, <공공의 적2>의 흥행을 보면서 역시 달라진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한국형 블록버스터였던 <역도산>은 관객의 외면을 당했다. “나는 조선, 일본 그런 거 몰라”라고 일갈했던 <역도산>의 진심을 관객들은 정말 몰랐다. 일본을 제압한 한민족 영웅담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도통 무슨 얘기인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극장문을 나섰다. 영화가 역도산을 민족주의 영웅으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주의 영웅은 환대를 받고, 탈민족주의 영웅은 박대를 당한다. 일종의 흥행공식이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는 “민족주의, 남성주의, 가족주의 세 요소를 짬뽕하되 웰메이드만 하면 대박이라는 흥행공식이 성립됐다”고 분석했다.

문화민족주의 캠페인은 박정희 지지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강우석 감독이 주장하는 ‘제대로 된 공권력’에 대한 열망은 오히려 노무현 지지자들의 정서와 닿아 있다. 실제 강우석 감독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미도>의 주제 또한 역사청산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권혁범 교수는 “최근 한국 사회에는 민주화와 경제개발을 동시에 이룩했다는 자부심이 강해졌다”며 “민주화 이후에는 저항적 민족주의와 우파적 민족주의의 구분이 애매해졌다”고 지적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저항적 민족주의와 우파적 민족주의가 경계 없이 하나의 정서로 뒤섞이고 있다. 청년세대에게 ‘반미와 반일’은 논리를 넘어선 감정으로 자리 잡았다. 권 교수는 “반미와 반일을 외치면서도 같은 민족인 북한에 대해서는 냉정한 학생들이 많다”며 “이들의 정서는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대한민국주의”라고 요약했다. 청년세대의 민족주의 열기는 월드컵 4강신화로 불붙어서 촛불집회로 활활 타오르고, <실미도>의 흥행으로 폭발했다. 촛불집회가 열망하는 자주적인 대한민국도 정상국가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역사학)는 “민주화 이후 물밑에서 작동하는 헤게모니는 민족주의”라며 ““아래로부터의 민족주의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사실 국가주의는 군부독재에 대한 찬반을 떠나 한국 사회가 공유하는 틀이었다”며 “민주화운동을 한 좋은 헤게모니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민족주의 정서는 더욱 거칠 것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강력한 징병제와 의무교육은 국가주의 정서의 결정적 기반을 제공했다.

“대~한민국” 스포츠도 예외 아니다

드라마에서는 죽은 영웅들이 살아나 인기를 얻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과 <해신>의 장보고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장기적 상승세와 단기적 위기가 겹치면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난세의 영웅이 떠오르고 있다. <실미도> 같은 영화가 한민족의 울분을 분출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면, 드라마는 나아가 민족의 영광스러운 시절을 상기시킨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는 “현실에서 찾기 힘든 역할모델을 역사에서 찾으려는 노력”이라며 “자긍심이 부족한 한국에 자긍심을 줄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조흡 동국대 교수(영화영상학)는 “상업적 민족주의의 배경에는 조갑제류의 국가주의가 있다”며 “사극의 인기에는 ‘영웅들은 난세에 훌륭하게 대처했는데, 대통령 너는 뭐냐?’는 심리가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시대극 <영웅시대>는 민족자본가의 찬양에 열정을 쏟았고 시청자들의 사랑 속에 막을 내렸다. 황진미 평론가는 “몇해 전만 해도 착한 자본가의 존재와 역할을 수긍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며 “외국자본이 아닌 민족자본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재벌에 대한 시청자들의 사랑은 지금이 바로 문화적으로 근대 민족국가 형성기라는 징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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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아시아에 불어닥친 한류 열풍은 문화민족주의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동연 문화사회연구소 소장은 “한국인이 한류를 통해 중국, 동남아를 대하는 태도에는 종족 우월주의가 깔려 있다”며 “국가가 나서 한류를 주도하려 하면서 국가주의 색채가 짙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비판적인 문화연구자들은 한류를 대중들 스스로 만들어낸 ‘포퓰러한 민족주의’ 혹은 ‘새로운 형태의 내셔널리즘’으로 해석한다. 제3세계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대중 스스로 만들어낸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내셔널리즘은 전통적인 분단체제론과 다르지만 통한다. 이동연 소장은 “분단체제론의 민족주의도 결국은 강한 대한민국이 동북아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논리”라며 “분단체제론과 포퓰러한 민족주의는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강한 대한민국을 매개로 서로 얽혀 있다”고 말했다. 문화의 한류뿐 아니라 정부의 신한국론, 기업의 글로벌 경영론까지 새로운 국가주의 담론은 잇따라 대중의 의식을 장악해가고 있다.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다. 월드컵 4강이 달성됐을 때, 많은 한국인은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낀 첫 경험”이라고 고백했다. 4천만은 그 자긍심에 겨워 “대~한민국”을 합창했다. 2002 월드컵은 이처럼 국민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등공신이었다. 붉은 악마는 국민과 ‘CU@KLEAGUE’라고 약속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럽의 축구문화는 국가대표팀과 클럽팀의 두 다리로 움직이지만, 한국의 축구문화는 오로지 국가대표팀 한 다리로만 지탱되는 기형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한국에는 ‘FC 코리아’ 단 한개의 팀만 있다는 뼈 있는 농담이 나왔겠는가. 월드컵 당시 유럽의 한 기자는 “한국에는 애국자는 많지만 축구팬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 예선이 시작되면서 한국은 또다시 국가주의 주술에 걸리고 있다. 다만 ‘다행’인 것은 한국의 국가주의는 아직 ‘덜’ 위험하는 것이다. 권혁범 교수는 “한국은 100년간 지구적 약자로서 피해의 경험이 있어 위험한 방향으로 가기는 힘들다”며 “한국의 민족주의는 위험하지 않지만 문제적”이라고 말했다. 아직 건국 중인 대한민국이 문제적 민족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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