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연극] 풀코스 연극 요리, 맛있었어요!

등록 2004-12-16 00:00 수정 2020-05-03 04:23

12월31일 막내리는 ‘연극열전’의 관객몰이… 20년산 ‘레퍼토리’로 대학로는 ‘연극의 메카’ 재도약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지난 1월30일 연극공연 직후 탤런트 김흥기(57)씨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현실과 신화를 넘나들며 신과 인간의 문제를 이성과 광기로 풀어낸〈에쿠우스〉에서 김씨가 맡은 다이사트(정신과 의사)는 주인공 앨런에 버금가는 배역이었다. 곧바로 김씨는 병원으로 실려가 뇌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제작진은 갑작스럽게 배우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다이사트 역으로 4번이나 무대에 섰던 이승호씨가 있었기에 열흘 만에 는 공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다만 가 성황리에 막을 내린 뒤, 계절이 몇번이나 바뀌었지만 김씨의 병세는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씨연대기〉로 출발! 유혹당한 ‘연애인’

그렇게 ‘연극열전’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물론 한겨울의 시련은 따뜻한 봄날의 햇살을 품고 있었다. 극중 배역이 바뀐 연극 는 서른아홉의 조재현씨가 17살 앨런의 순수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연애인)들을 대학로로 이끌었다. 공연예술계의 ‘준비된 명품’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가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1980년부터 20여년 동안 대학로를 연극의 메카로 키웠던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묶어낼 생각을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연극열전은 대학로를 찾았던 사람들에게 명품 요리를 풀코스로 내놓는 ‘맞춤 정식’이었다.

연극열전은 레퍼토리 형식의 공연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됐다. 레퍼토리 시스템은 공연 작품의 고갈을 막고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로 작용한다. 재공연이 이뤄지면서 작품의 질적 발전도 기대할 수 있다. 극단별로 레퍼토리를 개발해도 그것을 한데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서로 다른 색깔의 작품으로 극단을 일구는 사람들이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연극열전을 기획한 동숭아트센터의 프로그래머 홍기유씨는 “제대로 된 공연을 보여주려는 관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사상 초유의 레퍼토리 축제를 가능하게 했다”고 밝혔다.

이런 연극열전의 관객몰이는 ‘예고된 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국내 공연예술계는 색다른 기획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섰다. 연극의 테마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3기 동안들이 실험적 연극의 가능성과 새로운 창작극의 진로를 모색한 ‘섹슈얼리티전’ ‘권력유감 페스티벌’, 동숭아트센터와 극단 차이무가 레퍼토리 개발 공연으로 마련한 ‘생연극시리즈’ 등은 연극의 질적 도약을 일찌감치 예감케 했다. 관객의 검증을 받은 작품을 재공연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기획자들은 관객들을 상대로 ‘다시 보고 싶은 연극’을 파악하면서 연극열전 참가작을 구체화했다.

지난 1월8일 연우무대의 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 연극열전은 대학로를 연극의 메카로 재도약하게 하는 구실을 했다. 2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그때 그 배우’들이 무대에 오를 수는 없었다. 연극과 뮤지컬의 구분마저 희미하던 1980년대 초반 고 추송웅씨와 최종원(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이혜영(영화배우), 설도윤(설앤컴퍼니 대표) 등이 출연했던 뮤지컬 는 추상록씨가 부친이 열연한 엘가 역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30여년을 에 출연한 박정자씨는 특유의 카리스마 연기를 재현했고, 〈에쿠우스〉의 조재현,〈남자충동〉의 안석환 등은 한결 성숙한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줬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연극열전을 통해 공연예술계의 놀라운 서비스를 경험한 것일까. 연극열전 참가작들은 극단의 레퍼토리로 줄곧 무대에 오른 작품이다. 예컨대 극단 자유의 은 1982년 초연 뒤, 김정옥(연출)·이병복(무대미술)뿐만 아니라 박정자·박웅 등의 출연 배우들이 한결같이 무대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연극열전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거의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났다. 스페인의 작가 가르시아 로르카의 작품이 전위적인 의상과 환상적인 무대의 한국적 마당극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관객들은 눈에 익은 공연을 다르게 보면서 레퍼토리의 진화를 눈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관객 입맞 돋운 기획력이 있었네

하지만 이런 면모는 연극열전 전반에 적용되지는 않았다. 참가작들은 작품 자체의 호소력과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을 오랜 경험으로 인정받았다. 그동안 ‘눈맛’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기에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올 것이라 믿을 만했다. ‘새 맛’을 내기보다는 ‘묵은 맛’을 되살린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선뜻 모험을 감행하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연극평론가 장은수 교수(한국외대 독어과)는 “연극열전은 국내 극단의 수준작들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보는 좋은 기회였다. 적어도 관객 동원에 실패하기 힘든 작품이었다. 오히려 흥행 실패가 두렵지 않은 한두개 작품이 있었다면 관객의 외연을 넓힐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연극열전은 관객을 중심으로 작품을 선정한 효과를 톡톡히 봤다. 관객의 시선을 대학로로 향하게 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참가작들은 대학로를 벗어나 지방 순회 공연을 떠나기도 했다. 연극열전 사무국이 앉아서 관객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공연장 밖에서 다양한 홍보 이벤트로 관객을 부르기도 했다.〈한씨연대기〉는 기업체의 과장과 부장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장(長) 이벤트’를 〈불 좀 꺼주세요〉는 ‘3040 남성을 위한 낭만 시사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모처럼 만원사례를 경험하는 작품도 있었다. 연극열전 기간을 통해 ‘연애인’으로 가입한 사람이 2만5천여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어쨌든 연극열전은 레퍼토리 빈곤의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공연 연감에는 관객에 꽂힌 작품이 수두룩했다. ‘연극은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기획력 부재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작품들은 공연예술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문화 정체성을 찾는 계기로 작용했다. 추억의 명작이 중년 관객을 자극하면서 4050 부부 혹은 부녀가 무대를 찾는 경우도 흔했다. 이제 연극열전은 또 다른 분화를 준비하고 있다. PMC프로덕션이 ‘여배우 열전’을, 기획사 축제는 ‘연극 수작걸다’를 준비하고 있다. 바야흐로 연극의 레퍼토리 시대가 열린 셈이다.



"‘연애인’과 축제 열어요"

인터뷰/ 연극열전 사무국 손상원 프로듀서 연극열전은 속된 말로 ‘대박’을 터트렸다. 동숭아트센터에 효자 노릇을 한 것은 물론이고 대학로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연극이 다른 장르에 비해 다소 무겁고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뜨린 것도 의미 있는 성과다. 연극열전 1년의 마지막 작품 이 무대에 오른 시점에 연극열전 사무국 손상원 프로듀서를 만났다.




연극열전이 관객을 모았지만 평단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는데.

괜찮은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싶었다. 적어도 볼 만한 연극이 없어서 대학로를 찾지 않는다는 말은 ‘수정’하려고 했다. 전체적으로 80% 안팎의 객석 점유율을 보였고, 소극장 일곱 작품은 90%를 웃돌기도 했다.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시도였는데 관객이 기획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평단에도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안겨줬다고 본다.
레퍼토리 선정에 아쉬움으로 남는 작품도 있었을 텐데.

두툼한 공연 연감을 놓고 작품을 골랐다. 연극열전 참가작 15편이 최선의 선택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인정받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작품을 선정했는데 이름만 남은 유명무실한 극단도 있었다. 그런 경우 제작사를 찾기도 했고 직접 제작에 나서기도 했다. 다만, 등은 저작권 문제와 제작 여건이 맞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연극열전이 장기적으로 대학로 연극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겠는가.

일부에서는 관객을 모두 데려간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연극 마니아가 아니라 오랜만에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일 것이다. 연극열전을 통해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이 다른 무대에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레퍼토리 형식의 공연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이를 다양한 기획으로 시도하는 분위기다. 나름대로 연극계의 기초를 다졌다고 생각한다.
이제 연극열전을 마무리하는 시점인데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연극열전은 ‘캐주얼한 연극제’로서 누구나 보고 싶은 연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대학로에서 관객을 확인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관객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12월31일 오후 3시 공연이 끝난 뒤 6시부터 ‘연극열전 막 내리다’라는 축제를 기획하고 있다. ‘연애인’이 연극열전 참가작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뽑기도 할 것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