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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그래피티’는 살아있다!

등록 2004-11-19 00:00 수정 2020-05-03 04:23

벽화·음반 재킷·콘서트 무대 등에서 진가발휘… 강렬한 원색들, 제3의 예술 장르로 안착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20세기 끄트머리에 열혈남아들이 경기도 파주에서 군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푸른 제복을 입고도 ‘힙합’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수 없던 유인준(27)씨. 그는 군대에서 말이 통하는 ‘고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괜찮은 후임병이라도 만나 관심의 끈을 이어가는 정도를 기대했던 그는 한마디 말로 선임병을 친구로 만나게 됐다. “취미가 무엇이냐”는 선임병의 질문에 “힙합과 그림”이라고 말한 게 결정적이었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힙합의 진화를 고민한 끝에 미래를 함께하기로 했다. 시차를 두고 전역한 이들은 2001년에 ‘jnjcrew’라는 이름의 ‘그래피티’(graffiti) 창작 팀을 결성했다.

열혈남아들 ‘jnjcrew’팀 만들어

“어떤 장르보다 자기 표현력이 강한 게 힙합이다. DJ가 간주 부분을 반복해 틀면서 소리를 지른 데서 비롯된 힙합은 세월이 흐르면서 내용이 풍부해졌다.” 유씨는 광고 디자인을 전공했기에 이미지로 힙합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힙합은 진화 과정에서 4개의 요소를 포함하게 됐다. 그것은 판을 돌리는 ‘디제잉’과 소리를 지르는 ‘랩’, 몸으로 말하는 ‘브레이크 댄스’, 이미지로 표현하는 그래피티 등이다. 그래피티가 힙합의 한 분야인 셈이다. 애당초 ‘벽에 긁어서 그린 그림’이란 뜻으로 고대 벽화에서 비롯된 그래피티는 슬럼가 소외계층이 사회적 불만을 드러내는 데 쓰였다.

현재 힙합 모임 ‘엘라멘트리’에 속한 jnjcrew는 세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개성을 드러낸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표시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유인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는 없다. 대신 ARTIME JOE라는 ‘태그’(표식)가 있을 뿐이다. 다른 동료는 JAY FLOW와 하바다라는 이름을 쓴다. 이들의 작품은 외국의 그것과 다른 느낌이다. 유인준씨 아니 ARTIME JOE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래피티가 그림 낙서일 뿐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싶은 것이다. 아직은 예술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지만 내 안에 숨어 있는 열정을 개성적인 색깔로 드러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jnjcrew의 그래피티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명 ‘압구리’(압구정 굴다리)라 불리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한강시민공원으로 이어지는 지하보도는 국내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아지트였다. 지금은 지역 주민들의 민원으로 통제된 압구리에서 jnjcrew도 그래피티의 기본을 다졌다.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은 jnjcrew는 문화방송 와 ‘대단한 도전’ 등의 무대 그래피티로 방송을 탔고, 크고 작은 카페에 실내 그래피티로 이름을 날렸다. 힙합 가수와 래퍼 등의 음반 재킷, 콘서트 무대에 자신들의 태그를 새기기도 했다. 여기에서 수익을 챙기면 그들만의 공간으로 달려나갔다.

“지금은 기업이나 방송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소화한다. 그래피티 작가의 스타일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현실이 안타깝지만 하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있는 비용을 충당하려면 감수해야 한다.” 전문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진가가 발휘되는 예술공간은 대체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곳들이다. 그래피티의 주재료인 래커를 뿌리려면 공기압축기를 갖춰야 하고 수십종의 페인트가 필요한 탓에 인적이 뜸한 곳에서 자신들의 스타일을 선보일 수밖에 없다. 압구리를 벗어난 jnjcrew는 경기도 분당의 하천가의 다리 기둥에 다양한 이미지를 새기고 다른 작가들과 함께 부천에서 김포공항으로 이어지는 오정대로 아래 벽면을 이용한 ‘신서유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미술관 진입… 추상 문양 등 변신 예고

그래피티가 고정된 벽이나 기둥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힙합이 기존의 작품을 ‘샘플링’이라는 이름으로 빌려와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래피티도 일상적인 재료를 ‘재활용’하고 있다. 턴테이블·스노보드·앰프·턴박스·쇼케이스·신발 등 다양한 오브제들이 강렬한 이미지 재료로 거듭나는 것이다. “힙합 리듬이 심장 박동처럼 살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처럼 그래피티를 통해 생동하는 이미지를 느끼게 하려고 한다. 때론 내면의 심리를 원색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자기 표현 욕구가 강한 것으로 받아들 였으면 좋겠다.”

최근 그래피티는 제3의 예술적 장르로 당당하게 인정받는 추세다. ‘보밍’(Bombing· 공공장소에 그림을 그린 뒤 도망치는 행위)을 일삼는 ‘불량청년’들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스타일 큐브 잔다리’는 ‘Street Writers-거리의 예술가를 만나다’전(11월23일까지)을 열어 일상에 스며드는 그래피티를 재조명한다. 여기에선 한국적 그래피티를 일구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jnjcrew, day-z, WK(고성욱)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day-z의 성악설을 근거로 삼아 ‘악마’ 형상을 보여주는 원색적 페인팅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ARTIME JOE는 ‘이기주의’라는 테마에 관람 순서까지 제시하며 관객의 발길을 이끈다.

그래피티가 진화하는 면모는 WK의 작품에서 실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원색적 이미지로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그래피티의 일반적 흐름에서 조금 비켜나 있다. 추상적 문양을 변형시켜 회화적인 느낌을 안겨주면서 그래피티의 또 다른 변신을 예고한다. 물론 다원적인 이미지에 목소리를 담아내더라도 벽그림을 근간으로 하는 그래피티의 본디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피티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려면 공공미술로 자리잡는 게 필요하다. 공공건물의 획일화된 스타일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이미지를 수혈하는 방식으로. 미술관에서 예술성을 검증받은 그래피티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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