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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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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풍경이 말을 거네

등록 2004-11-05 00:00 수정 2020-05-03 04:23

그리스 거장 앙겔로풀로스의 광활한 세계

▣ 이성욱/ 기자 lewook@cine21.com

8년 전 과 이 잇따라 방문한 뒤,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소식은 ‘뚝’ 끊겼다. 1998년 가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를 받았다는 소식이 그나마 최신의 것이었다. 앙겔로풀로스 자신이 ‘침묵의 3부작’이라 이름 붙인 작품들 가운데 ‘사랑의 침묵’에 해당하는 가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개봉한 데 이어(은 ‘신의 침묵’에 해당하는 작품) 11월19일에는 가 같은 곳에서 개봉한다.

이따금 스크린으로 봐야 진가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3부작 같은 거대한 액션과 극적인 서사의 경우도 그렇지만 앙겔로풀로스의 깊은 내공을 온전히 만나려면 특히 필수적이다. 느리게 흘러가다가도 섬뜩한 이미지와 의미를 내포하는 스크린의 광활한 공간은 어느 한곳 놓칠 게 없다. 꼭 주인공을 응시하지 않더라도 그의 뒤 풍경, 그를 감싸고 도는 음습한 어둠과 안개, 심지어 공기까지도 연기자처럼 등장해 뭐라고 말을 걸어온다. 이번 두 작품도 “안개, 비 등 슬프고 고립된 풍경에서 일종의 빛을 발견한다”는 그의 신념이 여전히 관철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는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치고는 대단히 대중적인 로드무비다. 우리에게 낯익은 이탈리아의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무너진 심신을 다시금 추스르며 최후의 격정을 나누는 벌통지기 스피로로 나온다. 딸의 결혼식조차 기쁜 표정으로 치르지 못하는 그는 교사 일을 정리하고 가업이었던 벌통지기로 돌아가 길을 나선다. 야심한 시간의 휴게소에서 트럭으로 냉큼 올라탄 소녀를 만나면서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피로감을 느끼는 스피로는 천방지축 소녀를 자꾸 떠나보내지만 또다시 만나면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에너지를 감지한다. 인생이란 추억과 회한의 쓸쓸한 일기장 같은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스피로는 최후의 추억을 퇴락한 극장의 흰 스크린 앞에서 연극의 한 장면처럼 쌓아올린다.

는 좀더 야심차서 앙겔로풀로스 세계의 집대성 같다. 어김없이 반복되는 로드무비 형식에 기구한 발칸반도의 역사, 예술 자체에 대한 명상, 젊은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 아이들도 벗어나지 못하는 추한 사회 현실 등이 고루 심어져 있다. 안개 낀 도시 테살로니키의 낡은 집에서 알렉산더가 외롭게 삶을 접으려 하고 있다. 유명한 시인으로 존경받는 그이지만 돌이켜보니 덧없다. 들어가야 할 병원을 거부하고 19세기 시인 솔로모스의 흩어진 시어들을 찾는 여행을 떠난다. 알바니아 난민 소년과 만나고 헤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30년 전 아내 안나가 쓴 편지를 통해 그는 영원이 곧 하루이고, 하루가 곧 영원 같은 것임을 되새긴다. 에는 의외의 장면이 튀어나오곤 한다. 아내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면, 화면에선 스크린 바깥의 눈마저 부실 정도로 화사하고 밝은 그리스 해변의 파티가 열린다. 이건 음울한 화면과의 기막힌 충돌이다. 앙겔로풀로스는 맘만 먹으면 굉장히 화려한 화면을 만들 수 있지만, 그걸 불필요하다고 느낄 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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