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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국을 향해 무너지다

등록 2004-10-29 00:00 수정 2020-05-03 04:23

한석규의 강렬함으로 끓여 낸 미스터리 치정극

▣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생활부 dmsgud@hani.co.kr

는 구약성서의 창세기 3장 6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구절이다. 선악과는 금단의 열매다. 성경은 신이 허락하지 않은 욕망을 품은 두 인간이 치러야 하는(인류 전체로 이어지는!) 혹독한 대가를 덧붙여 알려준다. 이처럼 의 첫 장면은 영화가 보여주려는 주제를 두괄식으로 드러낸다.

고급 승용차에서 오페라 음반을 틀어놓고 목청껏 따라부르는 강력계 형사 기훈(한석규). 살인사건 발생 전화를 받고도 그의 여유만만한 목소리에는 미동이 없다. 그만큼 자신의 삶에 확신이 넘치는 사람이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는 아쉬울 게 없다. 직장에서의 인정과 부유한 집, 정숙하고 아름다운 아내, 섹시하고 도발적인 정부까지. 본인도 그 사실을 즐긴다. 그러나 이 풍요로운 안정에는 기훈의 독백처럼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거부할 수 없었고” 나중에는 치명적으로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금지된 욕망이 끼어 있다. 그에게 떨어진 까다로운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기훈은 피해자의 아내 경희(성현아)를 의심한다. 한 손에 잡히지 않는 여자 경희는 기훈을 혼란에 빠뜨리고 기훈은 경희에게서 이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될 불륜의 냄새를 감지한다.

쉽게 말하면 는 치정극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한 남자의 삶에 똬리 틀고 있던 부정한 욕망이 목을 뺐을 때 그가 가지고 있던(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삽시간에 균열이 가고 파국을 향해 가파르게 무너져간다. 영화는 아내와 정부, 두 여자와 기훈의 관계에 불륜으로 얼룩진 살인사건을 겹쳐놓으며 금지된 욕망이 펼치는 비극의 드라마를 미스터리극 형식으로 이어간다.

오페라와 재즈, 화려한 실내 공간이 영화의 온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를 임계점까지 끓이는 건 무엇보다 한석규의 타버릴 듯 강렬한 연기다. 언제나 자로 잰 듯 냉정하게 계산된 연기를 했던 한석규가 이 영화에서 특별한 변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자신이 가진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히스테리를 넘어서 발악으로 몸부림치는 기훈의 미쳐가는 과정이 여느 영화에서보다 강렬하고 섬뜩하다.

기훈과 두 여자라는 하나의 이야기 축과 살인사건이라는 또 하나의 축이 드라마 안에서 하나의 요리로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건 흠이다. 그러나 매끄럽고 속도감 있는 편집이 이 단점을 보강한다. 영화의 절정은 기훈과 정부 가희(이은주)가 기훈의 차 트렁크에 갇히는 장면이다. 20분에 이르는 이 장면에서 몸과 마음이 무너지면서 욕망의 한 방울까지 다 짜낸 뒤 남겨지는 찌꺼기로 진탕이 된 한 인간의 초상을 보는 것은 구토가 날 정도로 비린 냄새가 가득하다. 로 장편 데뷔를 했던 변혁 감독이 4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연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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