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손인쇄 시스템 필요해요”

등록 2004-10-28 00:00 수정 2020-05-03 04:23

점자 그림책 만드는 공공문화개발센터 URART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공공문화개발센터 URART(www.urart.org) 대표 김영현씨는 오래전부터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앞을 못 보는 어린이들을 위한 점자그림책이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 근처에 맹학교가 있어서 출근길에 늘 그 애들과 같은 버스를 탔어요. 아침마다 시각장애 어린이들을 보면서 얼마나 답답할까, 눈이 없으면 어떻게 세상을 배울까 그런 생각들을 오랫동안 했지요.”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들을 위한 ‘눈’이 돼주고 싶다는 생각에 도서관·서점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유아를 위한 점자그림책이 전무했다. 비장애인용 책을 점역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잖아도 어릴 때부터 시각 외에 예민한 감각을 길러야 하는 아이들이 만지고 놀면서 상상력을 키워나갈 재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김 대표의 소원은 지난 4월부터 실현되기 시작했다. 김세희·김지은·이후미·김도경·신보리씨 등 회화·공예 분야 젊은 작가들이 동참했다. 그러나 시각적 훈련이 돼 있고 손재주가 있다고 해서 점자그림책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다. “책을 경험한 적이 없는 시각장애 어린이들은 책을 어떻게 펼치고 넘겨야 하는지도 몰라요. 눈으로 계속 세상을 배워온 우리들로선 이들의 감각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지요.” 몇달 동안의 표류 끝에 유알아트팀은 6~8살 어린이들을 위해 이야기와 그림이 곁들여진 동화책을 만들기로 했다. 소월이 읊던 강변의 금빛 모래는 어떤 느낌인지, 자갈과는 또 어떻게 다른지, 조개는 어떤지, 나무 줄기의 거친 느낌은 어떤 것인지, 솔방울이란 어떻게 생긴 건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표현해야 했다. 귓가에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어떤 느낌일까, 정수리에 꽂히는 뜨거운 햇볕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스토리가 정해지고 그림을 만들어나가면서 작가들은 더 분주해졌다. 그림을 표현하기 위한 재료들을 구하기 위해 동대문 직물시장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눈보다 손이 먼저 갔어요. 재료를 만져보면서 골라야 하니까요.” 회화를 전공한 김세희씨는 “마치 그림을 처음부터 배우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시각 중심의 삶에서 촉각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배워나가야 했죠.”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림책이 4권. . 이 책들은 현재 한빛맹학교 유치부 아이들이 보고 있다.

유알아트팀은 이후 새로운 책을 개발하는 일 외에 이미 만들어진 책을 ‘손인쇄’하는 데 필요한 매뉴얼북을 만들고 있다. 점자그림책의 특수성 때문에 기계로 대량 복제하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자원봉사자들이 나서서 점자그림책을 만든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선 장애인 단체나 정부가 나서서 점자그림책을 만드는 생산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들은 질 높은 책을 개발하고 이를 튼튼하고 정확하게 손인쇄하는 시스템이 정착돼야 전국의 시각장애 어린이들에게 책이 돌아갈 겁니다.” 김 대표는 유알아트가 뿌린 씨앗이 세상에 널리 퍼져 열매 맺기를 간절히 원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