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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커스] 돌아온 ‘싸나이’ 인기 있습니까?

등록 2004-09-03 00:00 수정 2020-05-03 04:23

대중문화 소재로 부상하는 ‘강한 남자’들… 복고에 머무는 원초적 남성성, 최신판 남자들에게 밀리나

▣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싸나이’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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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품새로 이단옆차기를 날리던 말죽거리의 고등학생과 의리에 살고 죽는 실미도 부대원을 넘어, 한국전쟁에서 형제애를 과시하던 싸나이들은 이제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온 나라를 돌며 맞장을 뜨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까지 ‘고개 숙인 남성’들이 애처로움을 자아내면서 기차에 몸을 던지거나(), 밤에만 가면을 뒤집어쓰고 설쳐대는 소심한 회사원()으로 비실대더니만, 얼마 전부터는 애국충정에 충만하고 힘센 남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한없이 부드럽고 순수한 꽃미남과 ‘얼짱’에 ‘몸짱’, 심지어 패션감각까지 끝내주는 메트로섹슈얼이 인기를 끈다지만, 현실의 자아는 무능하고 왜소하다. 무기력한 자화상에 대한 반작용 탓일까. 최근 대중문화에서는 강한 남자를 추억하고 재생산해는 움직임이 한창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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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 이순신이 주는 카타르시스의 정체

지난해 와 등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영화가 연일 대박을 터뜨리면서, 최근 과거의 영웅적 인물이 대중문화의 중심소재로 떠오르고 있다.

얼마 전 개봉한 와 오는 12월 선보이는 은 각각 극진 공수도의 창시자인 최배달과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인생역정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인이면서도 전 일본인의 영웅으로 떠오른 전설의 두 파이터가 나란히 영상으로 재현됐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임을 ‘당당히’ 밝히면서도 몸뚱이 하나로 핍박받는 백성의 설움을 풀어준 두 ‘영웅’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영화 제작 이전부터 숱한 화제와 소문을 뿌려왔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 은 민족의 영웅을 액션 영웅으로 그리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영화에서 안중근 의사는 노천카페에서 저격수의 습격을 받지만, 총알이 떨어진다 해도 몸을 날려 피하고 심지어 빼앗은 총으로 순발력 있게 적을 없애고야 마는 ‘액션스타’로 변모했다. 이들 인물의 공통점은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강한 남자의 힘으로 이겨내고,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한국 남자의 자긍심을 세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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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소설 로 시작되어 드라마까지 제작되고 있는 ‘이순신 열풍’은 누란의 위기에서 한 나라를 구했던 강인한 남성성에 대한 향수다. 이순신은 남북 문제, 일본과의 관계 등 한국 특유의 시대적·정치적 상황에 꼭 맞는 애국의 아이콘이다. 여기에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내면으로 깊이 침잠했던 개인적인 고뇌와 외로움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해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에 대해, 일부에서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을 수립하는 흐름이라고 분석한다. 에서 시작된 마초적인 남성성과 남성 연대에 대한 찬미, 공격적인 액션과 정서를 통해 현실에서는 유명무실해진 남성적 가치를 화면상의 ‘과잉 남성성’으로 보상받고 싶어한다는 설명이다. 권김현영 국민대 강사는 “여성들의 권리찾기운동이 활발해지고 이른바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되면서, 민족·전사로서의 이미지를 통해 남성성이 여전히 유효하고 찬양할 만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나간다”고 해석했다. 힘이 세서 또는 충만한 민족의식으로 일본을 이긴 원초적인 남성을 통해, 남성의 강인함을 과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관객 1천만 시대를 맞은 영화산업에서 다양한 소재가 영화화되고, 실화가 갖는 힘을 ‘안전핀’으로 확보하려는 제작자, 감독들의 셈법도 남성 영화가 만들어지는 배경이다. 를 제작한 명필름의 심보경 이사는 “소재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 미래로 확장되는 것은 영화산업의 파이가 커지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최근에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낸 이야기보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어필하고, 그 과정에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인물에 자연스레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전기물 영화에 묻어 있는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경계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과거사에서 대중성을 고민하다 보니 사람들이 쉽게 열광하는 영웅적·국수적인 민족주의가 전면에 부각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서사의 주체는 강한 남성이다.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영화가 한민족 중심적인 폐쇄적 정서를 담고, 이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권 교수는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남성성과 국가애국주의, 가족주의가 결합하면서 강한 남자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어냈다”며 “이런 흐름이 한국 사회에서 주류 정서가 됐고, 영화가 이를 무비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맨주먹의 영웅들, 현재화되기 힘들어

이런 맨주먹류의 ‘강한 남자’들이 복고적인 영화 안에서만 살아 있을뿐, 현실로 걸어나오지 못한다는 점은 또 다른 아이러니다. 탈근대와 신세대 문화 담론으로 요약되는 1990년대를 지나면서 현대적 공간의 ‘강한 남자’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8월 말 현재, 10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220만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에는 두명의 ‘터프남’이 등장한다. 주먹쓰기 좋아하는 불량청소년들이지만 연상의 여인을 ‘리드’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들이다. 터프가이 정우성은 CF에서 덩치 큰 상대방을 돌려차기로 쓰러뜨리는 샐러리맨으로 ‘활약’ 중이고, 한 고등학생 가수는 짝사랑하는 누나를 향해 “넌 내 여자”라고 외친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는 순정적이고 모성애를 자극하는 인물들이 한때 유행했다면, 요즘에는 돈 있고 카리스마 있고 몸 좋은 남성이 ‘각광’받는다. “애기야” 한마디로 올여름을 평정했던 의 한기주는 최신판 ‘강한 남자’인 셈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이제는 남성성이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돈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대중문화의 주소비층인 젊은 세대가 이미 자본주의를 끔찍하게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대의에 죽고 사는 비현실적인 남성성보다는 금전적으로 힘이 센 남성을 새로운 판타지로 만들어냈다”고 해석했다.

의리를 부르짖던 ‘원조 터프가이’ 최민수는 ‘몰락’했고,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요,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라고 되뇌며 맨손으로 황소를 때려잡은 최배달은 현재화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공고하고 돈은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권위를 빼앗겼다는 피해의식과 여전히 갖고 있는 기득권 사이에서 분열하면서 ‘강한 남성’을 찾는 기나긴 여정은 쉽게 끝나지 않을 태세다. 남성들이 하나둘 깨진 거울 앞으로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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