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다시, 동아시아!]
동북아 협력과 번영을 위한 네트워크 설립… 언제까지 냉소만 하고 있을 것인가
▣ 정태인/ 대통령 직속 동북아시대위원회 기획조정실장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가 동북아시대위원회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어떤 사람은 정부가 실현할 수도 없는 동북아 허브를 내세웠다가 포기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호함만 더해졌다고 넌지시 충고한다.
‘동북아 시대’란 물론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의 줄임말이며 이 ‘시대’가 상정하는 ‘동북아 공동체’는 사실 그리 새롭다 할 것도 없다. 두 줄기의 세계사적 흐름이 이 개념 위에서 만나고 있다. 하나는 80년대 이래 자본의 국제화가 이끌고 있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흐름, 또 하나는 80년대 말 냉전 체제의 해체이다.
경제 공동체를 넘어선 평화의 이정표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역사의 대세지만 현실적으로는 지역주의화를 통해 관철되고 있다. 유럽합중국(States of Europe)을 목표로 더욱 촘촘해지고 있는 유럽연합(EU), 이에 맞서 숫자를 늘리고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인구로 보나 잠재력으로 보나 앞으로 세계를 끌고 갈 아시아에 또 하나의 지역 공동체가 들어서지 말란 법이 있을까. 이것이 80년대 말 이후 대두된 아시아 경제 공동체 구상이며 현재의 흐름으로 보아 그 실현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구상은 이러저러한 경제 공동체 구상의 재판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구상의 핵심은 이러한 경제협력 네트워크를 위해서는 평화의 이정표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정표에는 남북의 평화체제 수립이 명확하게 기록돼 있다.
실로 남북간에 평화 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끊어진 철도의 연결로 상징되듯 동북아 네트워크 복원의 전제이며 또한 역으로 동북아 네트워크에서 오는 이익이 풍성해질수록 북한이 개방과 개혁에 나설 유인도 커진다. 이 ‘평화’와 ‘번영’간의 상호관계야말로 동북아 구상의 백미인 것이다. 평화는 번영의 전제이고 번영은 평화의 전제이다.
그렇다면 이제 동북아위원회는 동북아 허브로 표상되는 ‘경쟁’을 포기하고, 이 팍팍한 시대에 낭만의 구호로 들릴 수밖에 없는 ‘협력’만 하겠다는 말인가? 아니다. 네트워크는 모든 참여자에게 이익을 줄 가능성이 높다. 제도주의 경제학이나 사회학에서 말하는 네트워크 외부성 또는 협조의 이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보아도 참여자들이 네트워크에서 오는 이익을 균등하게 누릴 수는 없다. 가장 초보적인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는 무역을 보더라도 더 많은 이익을 보는 쪽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모든 협조 행위는 경쟁의 측면을 내포하는 것이다. 네트워크의 형성 역시 일종의 개방이며 개방의 이익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국내 경쟁력의 제고를 가져오는 광범위한 개혁이 필요하다. 이러한 개혁을 게을리하면 개방은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금융감독 체제를 전면 개편하지 않은 채 무분별하게 자본시장을 개방한 결과가 바로 97년 금융위기였다.
‘동북아 시대’의 구상은 피동적인 개방과 어쩔 수 없는 내부의 구조조정이 아니라 우리가 주도하는 개방=네트워크의 형성과 구조개혁을 강조한다. 좁게 말해서 우리의 경쟁력 제고, 조금 더 광범위하게 잡을 때 과거 사회 구조의 전반적인 재편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평화가 더욱 문제인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는 나날이 기세등등하고 일본은 평화헌법마저 버리고 군국주의의 길로 내닫는 듯하다. 중국은 또 어떤가. 도광양회를 내세워 한껏 몸을 낮추고 경제에만 전념하는 듯하더니 최근에는 화평굴기라 하여 서서히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급기야 동북공정에 이르면 천년이 지나도 중국은 여전히 중화밖에 모르는 패권국가라는 생각이 든다.
비패권 국가, 동북아 시대 주도
마치 근대 초기에 있는 듯 영토분쟁과 역사분쟁이 동북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공동체라니 터무니없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참여정부의 동북아시대론은 오히려 이러한 동북아의 혼란에서 비롯됐다. 열강이 각축하는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는 것은 게임이론의 논리로는 그럴듯한 전략이지만 애당초 힘이 약한 쪽의 전략이 될 수는 없다.
오직 당사자들의 양보가 공동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점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중간에 끼인 자야말로 최선의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설적으로 우리가 동북아 시대의 주역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이다. 우리의 위상이 가교국가, 협력국가임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은 변방의 역사로부터 공존공영의 가치를 체득한 비패권 중견국가로서 동북아 시대를 주도할 국격(國格)을 보유”하고 있다(동북아시대위원회 대통령 보고서).
냉소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아니 100년 전 우리가 당한 굴욕의 역사를 다시 강요할 것이다. 유행에서 오는 상투성 때문에 그리 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동북아 전략은 이미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속하는 일이 됐다. 그렇다면 국내총생산(GDP)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동북아 국가 중 가장 작은 나라가 주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동북아시대위원회는 이 난제의 실마리를 동견동리(同見同利)에서 찾고 있다.
원래 불경의 6화경에서 나온 말이지만 종교의 색깔을 약간만 덜어낸다면 같은 비전을 가지면 공동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팍팍한 경제학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양의 결과가 나오는 한 당사자들의 협상에 의해 모두 이익을 보는 플러스섬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안겨준 코즈정리가 바로 그것이다.
패권국가들의 제로섬 게임을 플러스섬 게임으로 바꾸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다. 특히 평화와 번영, 즉 외교안보와 경제의 문제가 겹치는 사안들이 시발점이 될 것이다. 공동체 운동의 전범인 EU가 석탄철강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것도 그 때문이다. 두번에 걸친 세계대전의 원인이 석탄과 철강을 둘러싼 제로섬 게임이라는 반성이 공동체 구상을 탄생시킨 것이다.
동북아도 마찬가지다. 영토분쟁이니 역사분쟁이니 모두 거점을 장악해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생긴 일들이다. 이 문제의 해답은 그 거점 일대를 더욱 넓혀서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데 있다. 즉,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이다. 러시아 석유 문제로 설명한다면 다칭 노선이든 나홋카 노선이든 양쪽을 다 포괄하는 네트워크(송유관)를 건설하면 그만이다. 돈이 문제라면 통합 네트워크에서 각국이 얻는 이익과 위험도를 각각 계산하고 그에 비례해서 투자하면 된다. 물론 이런 계산은 민간이 훨씬 기민하니 기업의 참여는 대환영이다.
설익은 아마추어리즘이라고?
꿈으로 들리는가? 설익은 학자의 아마추어리즘이라고? 그렇다. 필자가 정부에서 일한 지 불과 1년 남짓. 그 짧은 기간도 우리 사회의 지나친 자기 비하에 절망하기에 지나치게 길었다. 심지어 모험을 즐기기 마련이라는 기업들마저 보신주의에 빠져 있다. 꿈을 꾸지 않는 자는 당연히 꿈을 이룰 수도 없다. 더욱 확실한 것은 냉소에 냉소를 거듭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또다시 100년 전의 대한제국이 되리라는 사실이다. 동북아시대위원회만 발버둥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 모두 다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다 같이 뛸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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