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80년대 캠퍼스 밴드들의 재등장 ‘7080 빅 콘서트’… 상업 시스템이 만드는 ‘새끈한’ 노래들이 이젠 지겹다
신현준/ 음악평론가 http://homey.compuz.com
2004년은 1954년에 태어난 사람이 만 50살(!)이 되는 해이다. 음악계에서 1954년생이 누가 있을까. ‘가수’로 이름을 알린 유명인의 이름을 열거해보면 김창완, 구창모, 전인권, 최성원 등이 그들이다. 1년 앞뒤로 범위를 넓히고, 가수뿐만 아니라 작곡가나 연주인까지 포함시키면 리스트가 매우 길다. 배철수, 김정선, 이봉환, 조덕환, 이영재 등등…. 간단히 말해서 산울림, 송골매, 들국화와 관련된 많은 멤버들이 대체로 이 연배에 속한다. 이들이 벌써 50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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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요제로 출세… 운동권에게 비난받고
이들을 편의상 2세대 한국 록이라고 부르자. 1세대 록 음악인들이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퇴폐풍조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이런저런 태클을 받다가 마침내 1975년 말 ‘대마초 파동’으로 거대한 시련을 맞이했다면, 2세대 록 음악인들은 이런 무지막지한 폭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언더그라운드 생활이 길었던 들국화를 제외한다면, 이들 대부분은 1977년 이후 방송사가 주최한 대학생 가요제의 직간접적 세례를 받고 ‘자고 일어나 보니 스타가 되는’ 벼락 출세를 맞이했다.
2004년 들어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그 절정은 6월12일 밤 상암 월드컵 구장에서 열린 ‘7080 빅 콘서트’일 것이다. 2만명이 넘는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당대의 아마추어 대학생 스타들이 무대에 올랐다. 음향은 그리 좋지 않았고, 난생 처음 서는 대형 무대가 부담스러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런 건 대수가 아니었다. 중년에 접어든 관객들은 모처럼 ‘축제의 밤’을 맞이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은 지난 20년 동안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앞서 1세대 록 음악인들과 달리 2세대 록 음악인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음악을 하는 동안 마음 편하게 지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을 싫어했던 측은 ‘독재정권’보다는 ‘학생운동권’이었고, 그래서 한때 캠퍼스 그룹사운드는 ‘외래 퇴폐 향락문화’라는 비판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그 중에는 나도 ‘부분적으로’ 포함된다). 누가 옳고 그른지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무언가를 ‘금지’시키려고 하는 것은 ‘꼴통스러운’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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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다. 음악 마니아들은 이제나 저제나 ‘국산 록음악’은 시시껄렁하게 생각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형성된 음악듣기의 고수들은 외국(주로 영미)의 음반들은 빠짐없이 사모으려 했어도 국산 음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 중에는 나도 포함된다). 음질이 후지다느니, 연주가 시원치 않다느니 등등의 이유를 달면서….
그 사이 2세대 록 음악인들은 나이가 들어갔고 그러면서 서서히 지쳐갔던 것 같다. 1990년대가 접어들면서 이들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낯선 시간을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김창완은 음악인이라기보다는 연기자로 전업한 것 같았고, (이날은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배철수는 라디오 DJ와 성우를 하면서 방송인으로 자리잡았고, 구창모는 러시아에 가서 사업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스타급 음악인들의 경력이 이럴진대 나머지 음악인들이 어땠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계속 음악에 전념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생활의 제약이 여유 있는 창작을 보장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 에서 묘사된 과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에서 음악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아, 더 많은 이들은 음악을 그만두고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대마초 파동’만큼 강력한 어떤 힘이 작용했다는 이야기일까. 되돌아보면 그랬다고 생각된다. 1990년대 이후의 시기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어떤 시스템’이 확립된 시기다. 그걸 ‘신자유주의’라고 불러야 할지 ‘세계화’라고 불러야 할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학자들의 놀음이겠지만, 무언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한 것은 틀림없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꽉 짜여지고 직업화되었다. 이게 무시무시한 힘이다.
이 시스템의 하나의 특징은, 시스템의 내부에서 진정성을 추구하는 행위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는 점이다. 대중음악계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말한다면 주류 세계에서 아티스트가 되려고 하거나 반항적이 되려고 하는 일은 우스워졌다. 그래서 남는 건 양자택일이다. 주류에서 재롱을 떨고 ‘쇼’를 부리거나, 아니면 ‘인디’나 ‘언더’에서 소박하게 자기표현을 하거나….
자연발생적인 음악적 실천들
이제까지 나는 ‘록음악’이라는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해왔다. 그렇지만 ‘록음악’이나 ‘록밴드’라는 용어는 1980년대까지도 광범하게 사용되지 않았고, 그 대신 ‘그룹사운드’라는 용어가 있었다. 정치평론가 김규항은 이를 “시골 이발소풍의 이름”이라고 칭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 촌스러운 이름에서 오히려 상황적 진정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한국에 어떤 시스템이 정착되기 이전 그 불안한 틈새를 비집고 탄생했던 예기치 못했던 움직임(운동?)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건 참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따라서 단지 세월이 지나서 관대해진 것은 아니다. 이때의 음악에 진하고 강렬한 추억을 느낀다면 그 이유가 단지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건 시스템의 필요와 요구에 쌔끈하게 잘 포장되어 만들어지는 문화적 생산물들의 범람에 질렸기 때문일 것이다. ‘7080’은 자연발생적인 음악적 실천이 살아 움직이면서 각개약진하던 시절의 상징이다. 일회적 공연을 넘어서, (1960년대를 포함하여) 1970~80년대 대중음악계, 나아가 대중문화계 전반에 일어났던 복잡하고 다양했던 이야기들에 대한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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