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트렌드의 댄스 뮤지컬 … 장르 뒤섞인 퓨전 뮤지컬의 파격이 세계를 휩쓴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 · 뮤지컬 비평가 jwon@sch.ac.kr
뮤지컬에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얼핏 보면 말도 안 될 것 같지만, 요즘 세계 극장가에서는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노래나 대사는 없어도 새로운 창의력과 창작정신으로 꾸민 수작들이 속속 무대에 올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탈과 파격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대 예술의 ‘맛’은 무대라고 예외일 수 없다. 기존의 질서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영이기도 하다.
매튜 본, 발레와 뮤지컬 기발하게 합쳐
LG아트센터를 찾은 댄스 뮤지컬 은 이런 세계적 트렌드의 최전방에 있는 작품이다. 영국의 대표적 안무가인 매튜 본(Matthew Bourne)이 1992년 처음 무대에 올린 뒤, 2002년 다시 새롭게 각색된 이 공연의 재미는 기존의 발레가 아닌 완전히 재해석된 무대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차이코프스키의 유명한 발레 음악은 그대로 활용하되 무대와 안무는 원작과 판이한 스토리를 통해 새로운 ‘재미’와 ‘예술적 감흥’을 잉태해낸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은 첫 장면에서부터 원작의 그것과 180도 다르다. 원래 발레 공연에서는 부유한 가정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발점이지만, 매튜 본의 은 어두침침하고 지저분한 고아원에서 시작된다. 일년에 한번 거드름을 피우며 고아원을 찾는 돈 많은 귀족들이 선심 쓰듯 중고 장난감들을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주인공 클라라가 받은 것은 바로 호두까기 인형. 그러나 후원자들이 돌아가면 장난감들은 못된 고아원 원장에 의해 모두 한쪽 벽 찬장 안에 처박힐 신세다. 호두까기 인형을 처음 보는 사람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기존 발레 공연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새롭고 별스러운 전개방식이다. 기존의 것을 해체해 현대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하는 매튜 본만의 독특한 시도가 빚어낸 개가인 셈이다.
탄성 짓거나 무릎을 치게 만드는 매튜 본의 기발함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공연 뒤 인터뷰에서 그는 “본격적인 무용 공부는 세계적인 컨템퍼러리 댄스 스쿨인 라반센터에서 스무살이 넘어 시작했지만 그 전부터 영화나 연극 등 대중문화 분야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고, 내 작품의 상상력들은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의 창의력은 무용의 경계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인접 영역과의 교류를 통한 실험의 결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공연 뒤 만난 국립발레단의 최태지 전 단장 역시 “매튜 본은 뛰어난 안무가라기보다 뛰어난 연출가”라고 지적했는데,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세계의 뮤지컬 극장가에서 ‘인접 장르간 융화’는 하나의 트렌드로 불릴 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일명 ‘무대 위의 크로스오버 현상’이라고도 불리는 이같은 유행은 물론 이질적인 두 가지 이상의 요소를 한 곳에 몰아넣음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는 것을 일컫는다. 특히 매튜 본이 시도한 무용과 뮤지컬의 만남은 이른바 ‘댄스 뮤지컬’ 혹은 ‘댄스 시어터’(Dance Theatre)라는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냈다. 역시 말 그대로 전통적 뮤지컬의 요소에 집착하는 대신 ‘춤’이라는 한 요소만을 통해 극적 전개를 이끌어간다는 의미다.
등의 창의적 실험
이 분야에 물론 매튜 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성 연출자이자 안무가인 수잔 스트로만 또한 ‘댄스 뮤지컬’로는 각광받는 주자이다. 남녀의 ‘만남’에 대한 세 가지 소재를 각각 고전무용과 발레, 재즈 댄스로 엮어낸 그의 대표적 댄스 뮤지컬 (Contact)는 2000년 뉴욕 링컨센터의 소극장인 비비안 극장에서 첫 무대를 가진 이래 1174회 연속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큰 인기를 누렸다. 링컨센터 개장 이래 가장 오랫동안 계속된 공연이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데 뮤지컬로 구분할 수 있느냐’는 평단의 격렬한 논쟁도 있었지만, 결국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대 예술 정신에 칼로 긋는 듯한 장르의 구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결국 그해 토니상 수상식에서 안무상과 뮤지컬 부문의 남녀 주연상, 그리고 최우수 뮤지컬 작품상을 휩쓰는 대성공을 거뒀다.
매튜 본과 마찬가지로 수잔 스트로만의 에도 뮤지컬에서나 봄직한 극적인 반전과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 숨어 있다. 예를 들어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낭만파 화가인 프리고나르의 회화 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과연 저 그림의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라는 장난기 넘치는 상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결국 수잔 스트로만의 이 작품 역시 기존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물음표를 던지며 요즘 시각을 바탕으로 의미를 재해석해보고자 하는 창의적인 시도의 결과물인 셈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여성 안무가인 트왈라 사프가 초안과 안무, 연출을 맡았던 (Movin’ Out)도 대중적 배려가 돋보이는 근작 댄스 뮤지컬이다. 2002년, 브로드웨이 46번가의 리처드 로저스 극장에서 막을 올린 이 작품은 미국의 국민가수라 불리는 빌리 조엘의 히트곡들로 꾸민 무대이다. 제목 역시 빌리 조엘이 1977년 발표한 음반 (The Stranger)에 실린 싱글 타이틀을 그대로 사용했다. 무대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롱아일랜드의 한 마을로, 고교 동창생인 다섯 남녀가 베트남 전쟁을 전후로 얽히고설킨 사랑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로 꾸며졌다.
의 도드라진 실험성은 다른 댄스 뮤지컬들에 비해 더욱 흥미롭다. 무대를 반으로 나눠 빌리 조엘의 모창을 연주하는 라이브 콘서트와 모던 댄스를 동시에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원작 음악의 가사는 바꾸지 않은 채 적정한 스토리를 춤으로만 진행시킨 이 공연은 아바의 음악으로 만든 팝 뮤지컬 (Mamma Mia)나 퀸의 음악으로 완성된 (We Will Rock You), 로드 스튜어트의 (Tonight’s the Night) 등과 함께 대중음악을 공연예술과 성공적으로 접목한 새로운 예술적 시도로 평가받는다.
복잡한 현대성, 무대에 오르다
물론 무용과의 접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뒤섞임’의 미학은 전방위적으로 이뤄지는 현대 대중문화의 도도한 물결이다. 지난해 런던 극장가에서 막을 올려 빅히트를 기록한 (Jerry Springer-The Opera)는 미국 상업 텔레비전의 3류 토크쇼를 오페라 형식에 담아 만든 ‘퓨전’ 뮤지컬이다. 또 270년이 넘는 전통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도 역사상 처음으로 뮤지컬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가 하면, 톱클래스의 성악가가 만든 대중음악 음반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이질적인 요소들의 조화- 예술성과 상업성의 어울림,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의 병존은 바로 현대 뮤지컬계의 큰 흐름이다. 굳이 말하자면 복잡다단한 현대성의 한 단면인 셈이다.
경직된 한국의 창작 무대에서는 언제쯤 이런 파격을 만나게 될까. 우리 예술가들의 진지한 고민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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