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를 건조하게 누빈 임권택의 99번째 영화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생활부 dmsgud@hani.co.kr
최근 5년 동안 조선시대의 정자에 걸터앉아 한국화( )를 그려오던 임권택 감독이 파란 많고 곡절 많은 그의 시대로 돌아왔다. 제작에 들어가기 전부터 “내 생애 제일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감독의 99번째 영화 이 5월21일 개봉한다.
은 선거에 정치깡패들이 동원되던 자유당 정권 말기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벌어지던 1970년대 초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시대에 휘말려 세상과 함께 망가져간 한 인간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열아홉 소년 태웅(조승우)은 재야인사인 친구 아버지가 출마한 민의원 선거 유세장에서 행패를 부린 깡패들과 ‘맞장’을 뜬 일을 계기로 건달 세계에 들어간다. 자유당 정권과 함께 몰락한 건달 세계에서 빠져나온 태웅은 영화제작자로, 권력에 기생하는 군납업체의 실무자로, 로비와 담합으로 얼룩진 건설사업가로 변신한다.
영화는 4·19, 5·16, 10월 유신 등 현대사의 중요 사건과 당시 태웅의 족적을 포개며 연보처럼 이야기를 이어간다. 유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시대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길을 가려고 했던 한 인물을 그린다는 점에서 은 와 닮아 있다. 그러나 태웅은 성한모처럼 무기력한 소시민이 아니라 깡 있고 야심 많은 인물이다. 불안정한 만큼 빈틈 많은 시대는 태웅과 같은 인물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그는 사업권을 쥐고 흔드는 실권자의 아내 뒷수발까지 하면서 자신의 야심을 채워나간다.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진 사업에 투신하면서 자수성가한 태웅의 스토리는 사실 70년대에 부상하기 시작한 대한민국 재벌사의 변주곡에 가깝다. 권력의 떡고물을 받다가 실권자가 바뀌면 뒤통수 맞기를 반복하면서도 그가 더러운 세상에 더럽게 발을 담그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다. 그러나 아내 혜옥과의 궁핍한 살림살이가 늘어나고 풍요로워질수록 그는 성공에 몰두해가고 태웅에게 유일한 두려움과 경외의 상대인 아내에게마저 신뢰를 잃어버린다.
의 영호처럼 탁류의 시대와 함께 흘러간 태웅의 삶은 그러나 영호처럼 비극적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태웅처럼 하류인생을 살았던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사는 현실을 감안한 듯 영화는 태웅의 삶을 현재형으로 열어놓고 끝낸다. 이야기의 진행 방식에서도 영화는 태웅이라는 인간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태웅의 에피소드를 건조하게 느껴질 만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다. 태웅을 비열한 협잡꾼으로 볼 것인가, 불순한 시대가 오염시킨 희생양으로 볼 것인가는 관객의 몫이겠지만 이 속에서 자신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다소 아쉽다. 태웅이 잠시 영화제작자로 일할 때 동시에 9편의 영화를 찍는 여배우에 대한 분노를 떠뜨리는,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는 다소 튀는 이 장면만이 감독의 그림자를 보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