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상의 위기’설 속 직선제 개헌안 요구 움직임도
이번 대선에서의 혼돈 이후 미국 내 언론과 국민들의 반응은 미국이 이번 사태를 보는 방식과 앞으로의 해결책을 시사해주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현 단계가 ‘위기’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강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먼저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미국 내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위기 규정을 통해 이번 상황이 정말 위기로 발전하는 것을 사전에 봉쇄하고 논의가 진행될 수 있는 방향을 미리 제시한다. 이들은 현 상황을 ‘선거위기’, ‘정치위기’ 그리고 ‘헌법상의 위기’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평하고 있다.
선거위기는 문자 그대로 투개표 과정에서의 적법성과 정당성에 대한 논의일 뿐이다. 따라서 결과를 지켜보고 제도를 개선하면 해결된다.
정치위기론은 좀더 폭넓은 고민을 담고 있다. 첫째 클린턴 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1월20일까지도 차기 대통령 선출이 불투명한 경우이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이고 헌법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어 있다. 내각에서 다음 권력 서열이 임시로 국정을 이끌어나가면 해결된다. 둘째로는 현행 정치구조 자체가 위협받는 일이다. 이들은 민주당 고어나 공화당 부시 후보 둘 다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법정투쟁을 포함한 광범위한 대립으로 발전할 경우 현재의 양당제도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다. 국민들이 양당 모두에 대한 신뢰를 잃을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어느 한쪽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면 미국의 정치를 이끌어온 균형이 깨지게 될 것이라는 목소리이다. 현재 고어, 부시 두 후보에 대해서 1차적으로 문제가 된 플로리다 선거 결과가 일단락된다면, 더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승복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는 이른바 지도층 여론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치적 위기론에서 결여되어 있는 부분은 당장의 ‘있을지도 모르는’ 정치적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서 투표를 통해 행사된 국민의 의지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이다. 즉 국민의 의지가 과연 무엇인지를 끝까지 확인해야 되는지, 아니면 중간에 조정을 통한 후보자들 사이의 ‘결단’으로 대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실상 이 부분은 위기론의 또다른 한축인 ‘헌법적 위기론’의 배경을 이룬다. 헌법적 위기론은 지도층 여론에 거의 반영되어 있지는 않지만 마이너리티들과 소수 진보파들 사이에서 제기하고 있는 직선제 개헌론으로 대표된다. 이들은 “200년 전의 연방 구성을 위한 헌법은 지금의 민주주의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며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60%의 응답자가 직선제 개헌을 지지했지만 이 문제는 단지 대통령 선출방법만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 구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남부 주들뿐만이 아니라 백인사회 전체에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커서 현실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국은 뉴저지주 상원의원인 토리첼리가 지적한 것처럼 “공화국이 아니라 연방 유니온”(not a federal republic but a federal union)이기 때문이다.
사실 선거인단 선출에 의한 대통령 선거라는 간선제에 대해서 미국인들이 새삼스럽게 놀라게 된 것은 바로 이 점, 즉 자신들의 국가형태가 공화국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근대적인 국가 형태로서의 공화국은 근본 원리가 주권재민, 즉 주권의 소재가 국민에게 있지만, 미국식의 연방 유니온은 각주(state)를 주권의 단위로 삼는다. 물론 헌법학자들의 논란이 있고 현실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절충적인 법적 장치들이 만들어져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권력구조가 전체 국민의 의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국가 구성원리는 미국의 헌법과 정치전통에서 뿌리깊게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이 ‘미국식 민주주의’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근대적 ‘공화국’은 아닌 것이다.
사실 이번 논란으로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미국이 그토록 자랑해온 그들의 헌법이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위기를 맞아 사임했을 때만 해도 미국은 자신들이 대통령의 부정을 파헤쳐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제도를 가졌다며 “System works”(체제는 잘 굴러가고 있다)라는 수사를 잊지 않았다. 물론 이번에도 그 문구는 여지없이 등장했다. 바로 74년 당시 그말을 썼던 포드 전 대통령에 의해 며칠 전 열린 백악관 개관 200주년 기념식에서 그대로 반복되었다.
선거인단 투표방식이 부조리하다는 주장이 도처에서 터져나오고 있고 미국인들은 처음으로 과연 자신들의 체제가 ‘공평’(fairness)한 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 의문이 정치 현실을 바꿀 수 없을지는 몰라도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한번도 민중의 힘으로 체제를 바꿔보지 못한 미국사회에서는, 소중한 한걸음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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