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투자자의 거침없는 주식 싹쓸이… 알짜 기업 장악해 경제정책에도 영향력 행사
| 외국인 투자자의 거침없는 주식 싹쓸이가 이어지고 있다. 알짜 기업을 장악해 경제정책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태세다. 재벌 총수의 전횡을 외국인이 대신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그 많던 개미들은 어디로 갔을가. |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증시는 꾼들(외국인)이 서로 짜고 어린아이(내국인)들과 어울려 치는 포커 판처럼 시시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한때 월가에서 일한 적도 있는 한 증권사 고위간부의 말은 아주 자조적이다. 주식시장을 사기도박판에 비유하는 것은 조금 지나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식시장 개방 이후 외국인들이 한국 증시에서 거둔 성과를 보면 그의 말을 그냥 흘려듣기는 어렵다.
지난 1998년 말 25조원에도 미치지 못하던 외국인들의 상장사 주식보유액이 지금은 122조원으로 5배 가까이 늘어나 있다. 주식을 그만큼 많이 사들였기 때문은 아니다. 1999년 이후 외국인들은 장내에서 24조7천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수했을 뿐이다. 유상증자에 참여해 확보한 주식도 있겠지만, 이를 감안한다고 해도 외국인들이 그사이 한국 증시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외환위기 이후 주식 시장 흐름 주도
외국인들에게 주식시장의 문을 활짝 열어준 것은 외환위기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의 적극적인 요구가 있었고, 정부로서도 그것이 외환보유고를 늘리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에 주식시장 개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정부는 97년 말부터 개방폭을 점차 확대해 98년 5월에는 외국인 주식보유 제한을 완전히 없앴다. 이후 한국 증시는 외국인들이 갖고 노는 판이 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외국인들이 몰아치기로 주식을 사면서 주가를 끌어올리고 나면, 뒤늦게 내국인들이 주식 매수에 나서 외국인들의 매도물량을 받아주는 흐름이 반복돼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인가?

올 들어 경기 하강이 가속화하고 있는데도, 4월 이후 주가 상승세는 실로 눈부시다. 종합주가지수가 최저치를 보인 것은 지난 3월17일. 당시 지수는 515였고, 상장사 시가총액은 212조3860억원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9월19일 현재 종합주가지수는 748로 그사이 45.2%가 올랐고, 시가총액은 315조3710억원으로 무려 113조원이나 늘었다. 주가를 끌어올린 세력은 전적으로 외국인들이었다. 외국인들은 그사이 8조392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수했다. 기관투자가와 개인들은 주식을 야금야금 내다팔았다.
그렇다면 올 들어 외국인들의 평가익은 과연 얼마나 될까 지난해 연말 외국인들이 보유한 상장주식 총액은 93조1607억원어치였다. 9월19일에는 122조2334억원으로 29조원이 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외국인들이 주식을 순매수하느라 쓴 돈 7조2627억원과 유상증자에 참여해 지분을 늘린 것을 감안하더라도 20조원 가까운 평가익이 났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변화무쌍한 주식시장에서는 주가가 올랐다고 해도 주식을 팔아 현금으로 바꾸기 전에는 이익을 봤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이익을 실현하지 못한 채 주가가 다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게 그동안 실패는 없었다. 외국인들이 국내 증시에서 투자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때도 물론 있었다. 지난 2000년의 증시 거품 붕괴 때다. 외국인들은 2000년 들어 무려 11조3865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수했다. 그런데 주가가 계속 떨어지면서 연말 보유주식 총액(56조원)이 1999년 말보다 23조원이나 줄어들었다. 주식매수 대금까지 포함하면 평가손이 30조원을 넘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길게 보아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 외국인들이 열심히 주식을 사들인 효과는 이듬해 곧바로 나타났다. 외국인들이 2001년 중 7조4468억원어치를 추가로 순매수하면서 주가를 끌어올리자 보유주식 가치가 93조원으로 37조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2000년의 엄청난 손실을 거의 만회한 것이었다. 외국인들의 실력은 지난해 더욱 돋보였다. 지난해 주가가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외국인들은 전혀 손실을 입지 않았다. 2조8980억원어치를 팔아치웠으면서도 보유주식 가치가 거의 그대로였으니, 오히려 돈을 번 셈이다.
공기업 해외매각에 따라 상위 기업 장악
올 들어 외국인들의 한국 주식 매수 열기는 글자 그대로 ‘바이 코리아’다. 마치 한국의 괜찮은 기업은 모두 사버리겠다는 기세다. 1998년 말 17.98%에 그치던 외국인 지분율(시가총액 기준)은 지난해 연말 36.1%, 지난 8월 말에는 38.0%로 치솟았다. 자본시장 개방 이후 최고치다. 대형 우량주의 외국인 지분율은 시장 전체 지분율보다 더 높다. 시가총액 상위 10개 종목의 경우 외국인이 49.7%를, 상위 50개 종목의 경우 43.5%를 갖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의 지분율 확대는 정부의 공기업 해외매각이 주요한 배경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증권거래소 통계를 보면, 정부 및 정부관리기업의 상장사 지분율은 1998년 말 19.72%에서 2002년 말 5.66%로 급감했다. 주식투자 인구는 늘었지만, 대형 우량주보다는 저가주를 선호하는 개인투자자들의 속성도 외국인의 지분 확대를 도왔다. 개인투자자의 주식보유 비율은 28.87%에서 22.33%로 줄었다. 기관투자가들의 지분율만 13.65%에서 15.85%로 조금 늘었다.
외국인들의 국내 주식 ‘싹슬이’는 한국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외국인의 국내 주식보유 확대는 그동안 기업이 말로만 주식회사일 뿐, 속으로는 총수와 그 일가의 이익에 휘둘려온 문제점을 상당 부분 개선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꼭 외국인에게 주식을 넘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의 주식 ‘싹쓸이’는 오히려 재벌 경제의 문제점을 외국인 지배 경제의 문제점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상장사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기업들이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국내 상장사들의 수익성은 크게 높아졌다. 지난 2002년 결산 결과 상장사들(금융·보험업종 및 신규상장사 제외)의 순이익은 23조7천억원대로 그 전 3년간의 순이익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상장사들의 자기자본이익률도 10.18%로 시장이자율을 크게 웃돌았다. 그런데 수익성이 높은 기업일수록 외국인들에게 더욱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외국인들에게 상장주식이 쏠리는 것이 국내의 자금 부족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더 큰 문제다. 외환위기 직후만 해도 외국인 주식투자는 달러 보유고를 늘려 한국경제의 신인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지금은 외환보유고도 충분하고 국내 자금도 남아돌아 외국인의 국내 주식 매입이 한국경제에 기여하는 바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총저축률은 30.2%, 이에 비해 국내 총투자율은 27%였다. 저축률이 투자율을 웃도는 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의 여유자금은 비생산적인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거나 부동자금으로 떠돌고 있다.
외국인 지배 경제는 문제가 없는가
지난 5월 이후 가속화된 외국인의 폭발적인 국내 주식 매수는 미국의 초저금리와 경기회복 기대감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외국인의 주식매입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증시 전반에 걸쳐 있고, 지난 8월 외국인의 순매수 대금 1조7374억원 중 57.4%(9975억원)가 미국계 자금으로 나타나 이런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장기적인 측면에서 외국인의 한국주식 순매수 추세는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큰 폭의 주가하락 없이 주식을 처분하려면 주식을 사주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내의 경우 국민연금 기금의 지속적 확대, 기업연금제도의 도입 등 주식매수 기반이 확대될 가능성이 커서, 주식을 선취매한 외국인들이 그 혜택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번 주식시장을 완전 개방한 만큼 외국인들의 지분 확대 추세를 되돌릴 방법은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우려스런 것은 정부의 경제정책까지 외국인 주식투자자들의 입김에 좌우되는 일이다. 한 경제학자는 법인세 논쟁을 예로 들었다. 그는 “법인세 인하의 효과는 법인세를 많이 내는 대기업의 주주, 즉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며 “대기업들이 외국인 투자 촉진을 법인세 인하의 명분으로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작은 이익에 현혹돼 외국인 투자자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고 말했다. 아직 확실히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의 주식보유 증가가 오히려 국내 기업들의 투자를 갈수록 어렵게 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시세차익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들은 투자성과가 먼 훗날에야 가시화되는 설비투자보다는 당장 주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배당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9월 들어 주가가 횡보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서도 외국인들의 주식매수세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럴수록 국내 투자자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외국인들의 주식매수를 그냥 쳐다보고만 있자니 우량주식을 다 뺏길까 걱정스럽고, 매수에 나서자니 외국인들의 단기적인 이익실현만 돕게 될지 모르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바야흐로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외국인만을 위한 진퇴양난의 상황
현재로서 유일한 대응책은 외국인이 주식을 사든 팔든, 정부가 주가 자체에 집착하지 않는 일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유치 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유입된 외국인 투자의 대부분은 고용창출이나 기술이전에 직접적 도움을 주는 직접투자가 아니다. 지난 8월 말 현재 외국인 투자 중 직접투자는 6조881억원으로 5.1%뿐이고, 나머지 94.9%는 그저 돈놀이에 불과한 주식투자다. 그런데 주가가 떨어진다고 해서, 정부가 인위적인 주가부양책을 쓴다면 이는 외국인들에게만 안전하게 이익을 실현하도록 해주는 일이 될 뿐이다. 한 증권사 분석가는 “증권맨으로서 내놓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을 처분하면서 주가가 떨어지면 마치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처럼 과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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