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권노갑에 이어 몇몇 여야 정치인까지 그의 ‘입바람’에 휘말린다
정치인들이 요즘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다.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권노갑 전 민주당 상임고문 등 거물급 인사들이 구속되는 데 그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검찰 안팎의 소문으로 볼 때, 조만간 몇명의 정치인이 추가로 그의 입바람에 흔들려 구치소 담장 안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저승사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현대와 이익치, 갈등의 시작

어쩌면 이익치 전 회장의 행동은 검찰의 추궁에 따라, 단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그가 평생을 함께 일해온 현대의 정씨 일가로부터는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았고, 고 정몽헌 의장의 최측근이기도 했던 그의 처지가 이렇게 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2000년 현대증권 회장직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만 해도 현대그룹 안에서 그의 위상은 감히 누구도 흔들 수 없을 정도였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비서 출신인 그가 현대 안에서 실세로 부상한 것은 지난 1995년 현대증권 부사장을 맡으면서부터다. 그는 국민투자신탁을 인수하고 한남투신을 인수하는 등 현대 특유의 불도저식 경영을 금융업에까지 밀어붙이며 승승장구했다.
그를 결정적으로 키워놓은 것은 ‘바이코리아’펀드다. 국제통화기금이 고금리 정책을 저금리 정책으로 전환하자, 주식시장으로 돈이 몰릴 것을 예측한 그는 “주식을 사서 돈도 벌고 애국도 하자”는 논리를 전국 방방곡곡에 설파하고 다녔다. 외국인들의 주식매수로 주가가 상승하면서 그는 순식간에 ‘이익치 주가’를 만들어내는 인물로 떠올랐다. 바이코리아펀드로는 수십조원의 돈이 쉬지 않고 몰려들었고, 그럴수록 그의 인기도 치솟았다. 주가상승에 힘입어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유상증자에 성공하고, 그룹의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맞추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는 그룹 안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그는 현대의 대북사업에도 깊숙이 개입했고, 특히 현대그룹의 자금을 도맡아 관리했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종합주가지수가 2천까지 간다. 6천까지도 간다”던 그의 말이 끝내 화를 불렀다. 대우사태가 터지면서 외국인들은 주식을 팔아치웠지만, 바이코리아펀드는 그 뒤로도 돈을 더 끌어들였다가 훗날 주가하락으로 고객들에게 집중적인 비난을 당해야 했다.
그와 현대그룹 사이에 앙금이 쌓이기 시작한 것은 1999년 9월 검찰이 그를 현대전자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주가조작 사건을 나에게만 덮어씌운다”고 서운해했다고 한다. 이듬해 3월 현대그룹 후계구도를 놓고 내부갈등이 일면서,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물러났던 그는 2달 뒤 정주영, 몽구·몽헌 회장의 동반퇴진으로 이어진 이른바 ‘왕자의 난’을 통해 다시 현대증권 회장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해 8월 정부와 채권단의 ‘가신 퇴진’ 압력에 그는 현대증권 회장직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익치 전 회장의 태도는 돌변하기 시작한다.
“약방에는 감초, 검찰에는 익치”

미국에 체류 중이던 그는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이 연루돼 있다”며, 정 후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선거 국면에서 그의 돌출행동은 2000년 7월 현대중공업이 현대전자 주식매각 과정에서 풋옵션 계약을 맺었다가 입은 손실 2억2천만달러를 이익치 회장과 현대증권, 현대전자가 물어내라는 소송을 낸 데 대한 역공이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는 이미 1심에서 패소해, 전 재산을 내놓아야 할 처지에 내몰려 있었다.
그는 올 들어서는 “약방에는 감초, 검찰에는 익치”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현대그룹 대북송금 및 비자금 사건의 핵심 참고인으로 특별검사 사무실과 검찰을 드나들고 있다. 특검은 대북송금사건 수사를 벌여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기호 경제수석,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을 구속했다. 이 전 회장은 박지원 전 비서실장의 구속과 관련해 핵심증인이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처음에는 박씨에게 150억원을 건넨 혐의에 대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비난받는 것은 이런 발뺌이 철저히 자신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데 있다. 그는 변호인을 통해 낸 소명자료에서 “나는 전혀 몰랐으며, 정몽헌 의장이 직접 결정했다”고 주장했다가, 자신은 법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내가 직접 돈을 건넸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검찰이 현대그룹으로부터 200억원의 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한 권노갑씨 사건의 경우, 이 전 회장은 결정적인 증인으로 보인다. 검찰 발표를 보면 권씨는 비자금을 요청할 때 고 정몽헌 의장, 이익치씨, 그리고 김영완씨와 함께 있었다. 정 의장은 고인이 됐고, 김영완씨는 해외에 체류 중인 만큼, 검찰쪽의 확실한 증인은 현재 이 전 회장뿐이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그는 적극적인 협조자”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중요한 비리사건에 연루돼 있지만, 이 전 회장의 검찰에서의 신분은 여전히 ‘참고인’일 뿐이다. 검찰이 이 전 회장의 형사처벌을 최소화하고, 그 대가로 이 전 회장은 증언을 하는 이른바 ‘플리 바게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형제’의 빈소에도 나타나지 않은…
현대 관계자는 “정주영 명예회장이 살아있을 때 이 전 회장은 그를 ‘아버님’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2001년 정 명예회장이 사망했을 때 그는 뒤늦게야 빈소에 나타났고, 일부 유족한테서 ‘뭐하러 왔느냐’는 비난을 들었다. 2년 뒤 이번에는 그가 ‘모시던’ 정몽헌 의장이 검찰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서 김윤규 사장에게 “명예회장님께는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다고 썼다. 그러나 정주영 명예회장 생전에 그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던, 정몽헌 의장의 또 다른 ‘형제’는 이번에는 아예 빈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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