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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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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 거짓말, 그리고 권노갑의 힘

등록 2003-08-21 00:00 수정 2020-05-02 04:23

2000년 총선을 주무르며 지구당에 ‘실탄’ 지급…‘권노갑 리스트’엔 어떤 인물들이 등장하나

권력의 정점에서 2000년 총선을 주무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그가 정치자금의 ‘정거장’ 역할을 하며 지구당에 봉투나 상자를 돌렸다는 사실이 결국 밝혀졌다. 그렇다면 ‘권노갑 리스트’에는 어떤 정치인들이 포함돼 있을까.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의 돈 문제가 불거지자, 2000년 4·13 총선 출마자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손사래를 치며 권 전 고문과의 관계를 극구 부인한다. 그래도 몇몇은 어렵사리 당시 정황을 털어놓았다.

수도권의 한 원외위원장은 “선거일을 한 보름쯤 앞두고 당에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밤늦게 가보니 윤철상 사무부총장이 현금 5천만원이 든 가방을 건넸다. 그 뒤로도 2~3차례 더 연락이 왔다. 선거 막바지라 도저히 짬을 낼 수가 없어, 가까운 사람에게 위임장을 써준 뒤 돈을 받아오게 했다. 그 덕에 어려운 자금사정이 많이 풀렸다.”

“그는 일종의 ‘감별사’였다”

윤철상 사무부총장은 권 전 고문의 최측근이다. 그 때문이었는지 이 위원장은 그 뒤로 권 전 고문을 가끔씩 찾아가 문안인사를 올린다.

수도권의 다른 출마자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권 전 고문이 격려차 지역구에 들른 적이 있다. 쇼핑백인가 서류봉투인가를 건네줬는데 돈이 들어 있었다. 세간에서 추측하듯이 억대는 아니고 천만원대이다.” 그도 총선 앞뒤로 권 전 고문과 부쩍 가까와진 것으로 알려졌다.

돈의 위력을 매개로 한 권 전 고문의 영향력 확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권 전 고문의 힘은, 국민의 정부 초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본으로 떠나 있다가 1999년 1월 김대중 대통령과의 면담을 거쳐 고문으로 복귀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당 출신 인사들에게 정부 산하기관의 취직 자리를 마련해주는 역할이 맡겨졌다. 청와대에서는 동교동 출신의 행정관 ㅈ씨가 권 전 고문의 손발 노릇을 했다. 권 전 고문과 가까운 이훈평 의원은 “권 전 고문은 일종의 ‘감별사’였다. 모두들 그동안의 공로를 들이밀며 자리를 요구했는데 그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사람은 권 전 고문밖에 없었다. 권 전 고문은 놀라운 기억력으로 김 전 대통령 주변을 거쳐간 수만명의 얼굴과 이름은 물론 성향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권 전 고문 복귀 이전에는, 92년 대선에서 패배하자 당 외곽 사무실 보증금을 빼내 달아난 ㄱ씨가 정권교체의 공신으로 탈바꿈해 정부 산하기관 감사로 내려가기도 했다.

권 전 고문은 총선이 다가오면서 ‘제2인자’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청와대와 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여권 핵심부의 의사결정 구조를 동교동계가 사실상 ‘독식’하면서 권 전 고문이 그 정점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당시 실세라인은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남궁진 청와대 정무수석-김옥두 민주당 사무총장-최재승 기조실장-윤철상 사무부총장’으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한광옥 비서실장만 동교동계 색깔이 옅은 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권 전 고문을 ‘형님’으로 부르는 ‘동생들’이다. 권 전 고문은 이 토대 위에서 공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386에 각별한 애정 표현

권 전 고문의 입김이 직접 미친 통로로는 정균환 현 민주당 원내총무가 꼽힌다.

정 총무는 당 공식조직과 별도로,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총선 출마자들을 수혈하는 비공식 조직을 마포의 한 아파트에서 가동하고 있었다. 이 팀에는 최재승 윤철상 의원뿐만 아니라 정동영·정동채·김민석 의원이 핵심 역할을 맡았다. 이와 별도로 근처의 ㅎ오피스텔에서는 황태연 동국대 교수가 당의 이념과 공천 방향을 제공하기 위한 이론작업을 진행했다. 이들은 전국의 인재를 대상으로 한 사람당 최소한 4~5차례의 여론조사를 실시해가며 경쟁력을 검증했고, 지역구 사정에 맞는 최적의 인물을 선별했다.

하지만 반드시 여론조사 등 객관적 자료가 공천 기준이 되지는 않았다. 인천의 한 출마 희망자는 여론조사를 할 때마다 한나라당 후보를 큰 격차로 따돌렸으나, 동교동계에 비우호적이라는 이유로 끝내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에 반해 어느 정부단체 산하 연구소장은 권 전 고문을 비난하는 내용의 청와대 내 보고서를 권 전 고문에게 갖다 바친 공로로 공천을 따낼 수 있었다.

권 전 고문은 수시로 정 총무를 만나 공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인물 자료를 넘겨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마포팀의 한 관계자는 “정 총무는 가끔씩 청와대로 들어가 진행 상황을 보고하기도 했지만, 권 전 고문으로부터는 보다 직접적인 지시를 받았다. 권 전 고문이 김 대통령으로부터 총선에 관한 한 ‘포괄적 위임’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권 전 고문은 최재승 의원을 통해 ‘386’ 출신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최 의원은 1987년부터 동교동에서 청년조직 담당자였는데, 총선 당시에는 학생운동 출신의 신계륜 의원을 매개로 386 출신들과 인연을 맺어나갔다. 권 전 고문은 이들 신진인사에게 상당한 애정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386 의원은 권 전 고문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총선 전 386 출신 몇몇이 서울 신라호텔에서 권 전 고문을 만났다. 권 전 고문은 처음 보는 사람과는 악수도 하지 않을 정도의 결벽증으로 유명하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를 만났을 때는 어깨를 끌어안고 의자가 모자라자 본인이 직접 옆 자리의 의자를 끌어다 앉히는 등 각별한 정을 나타냈다.” 권 전 고문은 또 이 모임 이후 한 초선의원에게 “큰 정치를 하려면 골프를 해야 한다”고 외제 골프채를 선물하며 골프에 입문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권 전 고문이 만들고 뿌린 돈이다. 물론 권 전 고문은 현대 비자금 200억원을 받은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단지 지인들로부터 110억원을 빌려 당에 전달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든 민주당이 총선에 쓴 ‘실탄’의 상당 부분을 권 전 고문에게 의지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권 전 고문이 직접 나서서 후보들에게 돈을 전달한 경우는 극히 드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당의 공식 경로를 통해 내려갔다는 것이 민주당 관계자들의 얘기다. 공식 라인 중에서도 최재승 기조실장과 윤철상 사무부총장이 주목받고 있다.

“지구당에 돈심부름 가는 중이다”

최재승 의원은 386 출신 등 주로 젊은 출마자들의 지원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386 출신 의원은 최 의원을 직접 만나 2천만원을 받았음을 토로했다. 최 의원을 잘 아는 당 관계자는 “최 의원은 워낙 작은 보안에도 예민하게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라, 돈과 관련된 문제는 누구에게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다루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윤철상 의원의 경우는 본인이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주로 신임하는 당직자 ㅇ씨를 시켜 돈을 운반하게 했다는 것이 당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ㅇ씨가 007가방이나 스포츠백 등에 1억원 안팎의 현찰을 넣어 차로 각 지역구를 돌며 하나씩 전달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ㅇ씨가 워낙 분주하게 돈심부름을 하다보니, 여기저기서 목격한 사람도 많다. 한번은 ㅇ씨가 돈을 들고 나오다, 당 출입기자와 마주치자 엉겹결에 “○○지구당에 돈심부름 가는 중이다”라고 말해 이 지구당의 의원이 대표적으로 거액의 지원을 받은 후보로 지목받기도 했다.

현찰로 당의 지원금이 내려간 곳은 주로 수도권의 접전지역이라는 것이 당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증언이다. 당시 여론조사를 맡았던 한 관계자는 “선거일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24시간 여론조사를 돌렸다. 그 결과를 우세, 박빙우세, 박빙열세, 열세 등으로 나눠 보고했는데 당의 지원은 주로 박빙우세나 박빙열세 등 접전지역에 집중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물론 현금 지원은 중앙당 차원의 공식 지원과는 별도로 은밀하게 이뤄진 것으로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된 부분이다. 민주당과 후보들이 당시 중앙선관위에 제출한 ‘16대 총선 수입·지출 보고’를 보면 중앙당 지원금은 당선이 확실시된 호남지역 후보들에게 350만~1천만원 안팎의 소액이 내려갔지만, 수도권 지역과 영남·충청·강원 등 전략지역에는 최고 3억2750만원까지 집중 투입됐다. 2억원 이상 받은 후보도 91명이다. 그러나 이 신고 내용은 민주당이 각 지역구의 예금 계좌를 통해 보낸 것일 뿐이다.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해주는 사례도 있다. 중앙선관위가 16대 총선 선거비용 실사 결과 현역의원 19명을 검찰에 고발한 직후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 때였다. 고발된 송영길 의원이 당의 무관심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자, 윤철상 사무부총장은 “당은 선거 전에 지구당 사무국장회의, 선거기간 중 회계책임자를 불러 철저히 교육시켰다. 법정한도를 넘길 수 있으니 반드시 2분의 1만 신고하라고 공개적으로 다 교육했다”고 말해 축소신고 의혹을 스스로 인정했다. 당시 회의는 비공개라 민주당 의원들이 아무도 듣지 않는 줄 알고 솔직한 얘기들이 오고 갔으나, 일부 기자들이 옆방에서 들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지원 내용 공개로 신주류 압박

권 전 고문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만큼, 권 전 고문이 혼자 당하고 앉아 있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요즘 여의도 정가에서는 각종 ‘권노갑 리스트’가 돌고 있다. 그 중 하나만 보면, 1차 수수대상자 5명과 2차 수수대상자 14명, 전략적 지원 대상자 2명 등 모두 21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대부분이 신주류 핵심의원들이다. 이런 종류의 리스트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고 그 신빙성도 크게 의심되지만, 권 전 고문쪽은 “지원 내역을 밝힐 수도 있다”며 신주류를 압박하고 있다. 일부 참모들은 권 전 고문에게 적극적으로 공개를 촉구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훈평 의원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공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 전 고문쪽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끌어들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검찰이 자신을 사법처리하려면 김 전 대통령을 조사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한 얘기도 들린다. 노 대통령이 15대 총선 때 지원받은 선거자금 가운데 1억원을 남겨서는 도로 당에 반환해 권 전 고문이 “참 희한한 사람도 다 있다. 선거자금을 반환한 경우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미담성’ 얘기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노 대통령에 대한 자금지원 내역을 소상히 알고 있다는 투이다.

권 전 고문은 구속됐지만, 모두들 그의 입을 계속 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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