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우리들 가슴에 촛불을 켜고 떠났습니다

등록 2002-12-20 00:00 수정 2020-05-02 04:23

이 뽑은 올해의 인물 신효순·심미선, 두 소녀의 삶을 되돌아본다

은 2002년을 마무리하며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숨진 고 신효순·심미선양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전국적 추모열기 속에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의 한목소리를 이끌어낸 두 주인공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2리에서 나고 자란 열네살 동갑내기 단짝친구였다. 모든 미군기지 주변 마을이 그러하듯 두 소녀를 둘러싼 일상의 환경은 한-미 관계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늘상 미군의 훈련차량을 봐왔고, 언제나 위험에 노출돼 살았다. 동맹이라는 이름의 불평등한 국가관계가 국민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유린하는지 두 소녀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며 증언했다. 은 평범하지만 소중한 두 소녀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편집자

초등학교에 입학한 미선이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난 대학 안 갈래” “왜” “대학 가면 군대 가야 하잖아.”

어디서 무슨 얘기를 잘못 들었는지 미선은 자못 심각했다. 엄마가 만들어준 빨간 머리끈을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미선은 종종 이런 표정을 지었다. 살결이 희고 눈빛이 또렷한 미선은 지나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볼 정도로 예뻤다. 자라면서도 미선은 거울 보며 꾸미기를 즐겼다.

4대째 가족처럼 지내온 두 집안

사진/ 1·2 효순(맨 왼쪽)과 미선의 돌 사진. 3 오빠의 졸업식에 온 미선과 부모. 오빠 규진은 처참하게 깔려 죽은 동생의 모습을 가족 중 유일하게 목격했다. 4·5 둘은 유달리 함께 직은 사진이 많다. 양갈래로 딴 머리는효순이의 트레이드마크였고, 미선은 거울보며 꾸미기를 즐겼다.


효순은 얼굴이 까맸다. 집에서든 밖에서든 걷는 법 없이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운동회 씨름대회에서 남자 아이들을 줄줄이 쓰러뜨린 효순은 학교대표 달리기 선수로도 뽑혔다. 엄마는 유난히 숱이 많은 효순의 머리를 매일 네 갈래로 나눠 땋아 두 갈래씩 묶어줬다. 두 갈래 머리는 효순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효순은 얼굴 까만 것과 머리숱 많은 것이 불만이었다.
14살. 그 자체로 희망인 나이다. 미선의 장래희망은 가수였고, 효순은 군인이었다. 서로 다른 성격임에도 둘은 꼬박 붙어다녔다. 한동네에 살면서 유치원 2년, 한 학년에 한반뿐인 초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고 중학교도 나란히 진학했다. 6월13일 지방선거날 오전 10시45분께 효순은 까만 티셔츠에 청바지를, 미선은 빨간 월드컵 응원티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고 고개 너머 친구 다희네 집으로 가고 있었다. 이날은 다희 생일이었고 다음날은 효순이 생일이었다. 또래 10여명은 다희와 효순의 생일잔치를 한꺼번에 하고 의정부에 있는 노래방에 갈 계획이었다. 노래방에 갔다면 미선은 조용하고 가창력이 필요한 노래를, 효순은 춤추며 부르는 노래를 골랐을 것이다. 미선은 노래를 잘했고, 효순은 춤을 잘 췄다.
사고 직후, 미선이 오빠 규진(경민고 3·18)은 이장의 전화를 받았다. “애 둘이 차에 치였다. 동생들 집에 다 있느냐” 규진이 한달음에 고갯마루로 올랐다. 처참하게 짓밟힌 아이들은 동생 미선과 친구 효순이었다. 조금 전 오빠의 휴대용 카세트를 빌려 좋아라고 나간 미선은 옷차림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밭일을 하던 미선과 효순이 부모들은 한발 늦게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부모들은 응급실로 갔지만, 아이들은 이미 영안실에 안치돼 있었다. 미군은 사고현장에 동그란 표시만 해두고 떠났다. 부모는 이틀 뒤 아이들을 화장했다. 친척과 이웃들이 아이들의 재를 뿌렸다. 부모는 재를 뿌린 장소가 어디인지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12월11일 효촌2리를 찾았다. 마을은 온통 눈밭이었다. 사고현장 근처에는 추모비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지난 9월 여론에 떠밀려 미2사단 일동 명의로 세운 추모비다. 누군가 남겨둔 편지와 꽃 위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버석거렸다. 고갯마루에서 바라다본 마을은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 옆 한국군 기지 안에서 병사들이 운동하는 모습만 보였다.

마을 사람들과 두 소녀의 친구들은 악몽을 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사고 당일 집에서 효순과 미선을 기다리던 친구 다희는 방송에서 두 친구 얘기만 나오면 아직도 눈물을 흘린다. 효순·미선과 함께 삼총사로 불리던 친구 신애는 길에서 두 소녀의 가족을 만나면 피한다. 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두어명이 효순과 미선의 집 앞에 와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인기척이 나면 화들짝 놀라 도망친다. 어른들도 속앓이는 마찬가지다. 다희 엄마 이옥선(41)씨는 “그날 다희가 애들이 늦는다며 종종거리길래 고개쪽으로 나가보라고 했는데. 만약 다희도 나갔다면 어떤 일을 당했을지…. 효순이·미선이 엄마 볼 낯이 없어요”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이없고도 끔찍한 사고가 난 지점은 거마울, 혹은 수레너미로 불리는 고갯길의 시작 지점이다. 커브와 경사가 급한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성황당 고개로 불렀다. 옛부터 거마울 고갯길은 산적떼가 많이 출몰해 여러 사람이 주막거리에서 함께 모여 넘어갔다고 한다. 효순과 미선의 증조할아버지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양쪽 집안은 4대째 한 가족처럼 지내온 셈이다. 효순의 아빠 신현수(48)씨와 미선의 아빠 심수보(48)씨 역시 동갑내기로 아이들이 다닌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2대가 다닌 효촌초등학교 옆 현재의 한국군 기지는 6·25 직후에는 터키군 기지였다가 그 뒤 미군기지로 바뀌었다.

일곱살짜리의 죽음을 아시나요

효순이 아빠 신현수씨는 미군이 학교 옆에서 사격 훈련을 했던 당시의 정황을 기억하고 있다. “아이들이 손을 까불어대면서 탄피를 주으면 미군들이 웃으면서 더 총을 쏘아댔지.” 뜨거운 탄피를 줍던 아이들 무리에는 효순이와 미선이 아버지도 끼어 있었다. 그 옆에서 미군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훈련을 했다. 70년대 중반 미군이 옮겨가기 전까지는 기지 규모가 컸다. 마을 사람들은 미군기지 안에서 진행된 도로보수, 땅 파기, 나무 나르기 등의 노역에 동원됐고, 마을에는 개성옥·풍년옥이라는 미군 상대 “색싯집”이 두 군데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크리스마스 때면 철망 너머에서 미군이 깡통을 던져줬다. 집집마다 미군이 준 치즈를 시래깃국에 넣어 끓여먹었다. 두 사람은 줄창 미군을 보고 자랐고, 그들의 아이들 효순과 미선도 마찬가지였다.

효순은 3녀1남의 둘째고, 미선은 1남2녀의 막내다. 의정부여고 2년인 효순의 언니 미순(17)과 미선의 언니 혜선(16) 역시 한 동네에서 한 학교를 다닌 친구 사이다. 미선의 오빠 규진이 다니는 경민고등학교는 미2사단 옆에 있다. 지난 7월4일 미국독립기념일 축포를 쏘아올릴 때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규진은 “꼭지가 돌아” 뛰쳐나가려고 했다. 친구들이 말렸다. 오빠 규진의 친구들과 언니 혜선, 미순의 친구들은 의정부에서 열리는 추모시위에 줄곧 참석했다. 상처와 분노에 몸을 떨던 가족들은 11월21일 가해 미군의 무죄평결이 난 날부터 본격적으로 항의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경기 북부지역의 미군들은 여름과 겨울에 집중적으로 훈련을 한다. 두 아이가 참혹하게 숨진 날 전후로도 연일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을 들머리 미선의 집은 미군 궤도차량이 지나가면 지붕과 기둥, 창문이 덜덜 떨린다. 12월11일 마을을 찾은 날에도 멀리 법원리쪽에서 포소리가 쿵쿵 들려왔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군 훈련차량에 의한 범죄는 부지기수다. 인근 파주시의 경우 이동 중인 미군 차에 깔려 죽거나 다치고, 지붕이 날아가고, 가축이 폐사되고, 농경지가 짓뭉개지는 일이 지난 3년 동안 30건이 넘게 일어났다. 올해만도 9건이다. 효순의 아빠 신현수씨는 “내 아이를 죽인 것은 미군이지만, 아비가 돼 왜 이를 진작에 막지 못했는지 한스럽다”고 가슴을 쳤다. “일곱살짜리가 훈련차량에 깔려 숨진 일도 있었는데, 그런 소식을 땅 파먹고 사는 우리들이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바람결에 흉흉한 소문이 들려와도 그러려니 하고 지냈다.”

일곱살짜리 아이가 깔려죽은 일은 효순과 미선이 태어나던 해인 지난 88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길을 가던 아이를 미군의 트럭이 덮쳤고, 아이는 흰 천이 덮인 채 길바닥에 1시간가량 방치됐다. 미군은 아무런 조처 없이 사고처리 차량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장한수(43)씨가 도착했을 때 아이에겐 숨이 붙어 있었다. 아이를 들처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고 시점에서 2시간이 지난 뒤였다. 아이는 끝내 숨을 거뒀다. 아이의 가족은 미군 당국으로부터 사과는커녕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했다. 공무수행 중이었다는 이유였다. 미군 당국을 상대로 한 6년여의 지루한 민사재판 끝에 보상을 받았지만 변호사 비용 대기에도 모자랄 액수였다. 미군 훈련차량으로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장파리 주민들은 탱크 앞에 드러눕기를 불사하고 싸워 훈련차량 통행금지 조처를 받아냈다. 아이가 죽은 지 14년 만인 지난 2월이었다.

부모의 바람은 추모공원과 교육기념관

효순이·미선이의 사고 현장에 달려와 사진을 찍은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소장은 “수레너미 길에서 아이들이 깔렸다는 소식을 듣고,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고가 난 지점은 파주에서 올라온 미군이 양주로 넘어가는 경계지점이었다. 이 소장은 “맞은편에서 오던 차를 피하려 갓길로 가다 아이들을 보고 급히 왼쪽으로 틀며 브레이크를 밟은 것은 틀림없다.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다. 뒤에서 오던 미선의 다리 살점이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밀려 있었다. 브레이크를 밟고도 바로 서지 못했던 것은 빨리 달려오고 있었다는 얘기다”라고 주장했다. 이 소장이 찍은 사진은 사건 당시의 생생한 증거지만 수사과정에서는 채택되지 않았다.

효순과 미선의 부모들은 두 아이의 유품을 아직 정리하지 못했다. 효순은 학교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운동을 잘하고 그림에 재능이 많았다. 사고 얼마 전에도 경기도 교육청에서 주최한 과학상상그리기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상장은 아이의 장례가 끝난 뒤 집으로 도착했다. 활달한 효순은 집안일도 척척 도왔다. 초등학교 3년 어느 날 농사일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밥을 지어놓기도 했다. 씩 웃으며 “밥이 좀 질어”라고 말하던 아이의 표정을 부모는 아직 잊지 못한다. 효순의 엄마 전명자(39)씨는 인터뷰 내내 “애가 손맵시가 매워 고추도 잘 따고 하우스 비닐도 잘 치우고 무슨 일을 해도 야무지게 뒤처리를 잘했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미선의 엄마 이옥자(45)씨는 아이에게 휴대용 카세트를 못 사준 게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지 오빠 거 빌려 듣다가 어느 날 ‘엄마 나도 하나 사줄 수 있어’라고 묻더라고. 엄마 부담될까봐 그랬는지, ‘꼭 가져야 하는 건 아니고’이렇게 말을 흐리더라고. 애가 어릴 때부터 속이 깊었어요. 가을걷이 끝나면 하나 사주마 그랬는데….” 할머니, 언니와 함께 쓰던 방에는 미선이 놓은 십자수가 걸려 있다. 힙합복장의 두 아이가 활짝 웃는 모양이다.

두 소녀의 부모는 추모집회에 참가해 이렇게 말한다. “제 자식도 지켜내지 못한 못난 부모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무고한 죽음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바람은 하나다. 두 아이와, 과거 미군에 의해 억울하게 숨진 넋들을 기리는 추모공원을 만들고 그곳에 미군에 의해 일어난 모든 사고를 자세히 알리는 교육기념관을 세우는 일이다.

12월14일 전국적으로 추모인파는 30만명을 넘어섰다. 서울·부산·광주 등 전국의 주요 도시는 물론 독일과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도 촛불이 밝혀졌다. 광화문을 가득 메운 촛불은 늦은 밤까지 꺼질 줄 몰랐다. 효순이·미선이는 시위인파 속에서 그렇게 살아 있었다.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