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계급… 2등 노동자, 대기업 노조를 통해 본 하청 노동자들의 현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4월23일, 울산 현대자동차 제2공장. 하늘색 작업복을 껴입는 노동자들이 너댓명씩 생산라인마다 달라붙어 한창 작업 중이다. 그런데 금방 눈길을 끄는 게 있다. 바로 작업복이다. 작업복 등에 붙은 줄이 생산라인에 뒤섞여 있는 노동자들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있었다. 흰 줄 하나인 노동자는 정규직인 직영이고, 그 아래로 붉은 줄이 하나 더 그어진 작업복은 사내하청 노동자다.
작업복에서부터 차별
“정규직 조합원들은 ‘현대자동차’라고 큼직하게 붙은 작업복을 늘 자랑처럼 입고 다니지만, 우리는 남세스러워서 바깥에 나갈 때는 벗어버리지. 식당에 갈 때도 벗고 가고….” 제2공장에서 일하던 ㄱ(50대)씨가 포옥, 한숨처럼 토해냈다. 등짝에 붉은 줄이 덧붙은 그는 20여년 가까이 현대자동차에서 일하고 있는 사내하청 노동자다. “직영들은 겉으로는 ‘노동자는 한길로 가야 한다’면서도 속은 아니야. 우리나라에서 가장 힘센 현대자동차노조가 우리 손을 잡아주면 같이 가겠지만….” 그는 말끝을 흐렸다.
비슷한 시각, 현대자동차노조 사무실 한쪽에 딸린 대회의실에서는 노조전임자 20여명이 모여 회의를 열고 있었다. 5월13일부터 떠날 조합원 해외연수 일정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현대자동차노조는 지난해 말 임단협 때 전 조합원한테 해마다 900명씩 1주일간 해외연수를 시켜주기로 회사 쪽과 합의했다. 하청 노동자들한테는 해외연수는커녕 ‘노동조합’도, 널찍하고 말끔한 노조 사무실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휴일특근 때 정규직이나 우리나 같이 밤새 일하는데, 우리는 1시급제만 적용돼 평상시의 1.5배만 받지만 직영은 2시급제가 적용돼 더 많이 받아가요. 우리가 더 힘든 일을 하면 했지, 일을 적게 하는 것도 아니고 임금은 절반도 안 된다 이겁니다.” 제2공장에서 만난 또 다른 하청 노동자 ㅇ(20대)씨의 말에는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갈등의 골이 깊게 패 있었다. 그는 “같은 노동자라는데 저쪽 직영들이 다 가져가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다 가져간다”고 한 건 지난해 말 현대자동차노조가 회사한테 받아낸 성과급을 두고 한 말이다. 1조원에 달한 순이익을 노사가 배분하면서 노조는 조합원 1인당 600만∼1천여만원의 성과급을 챙겨줬다. 회사의 막대한 순이익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물론 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산성 향상도 기여했지만, 하청 노동자들의 저임금에다가 부품업체 노동자들이 생산한 제품의 납품단가를 후려쳐서 나온 것이라는 게 더 정확하다. 정규직이 따낸 성과급은 비정규직의 희생 위에 가능했고, 그런 점에서 조합원들은 “정규직끼리 나눠먹으며 돈 잔치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노조는 “하청 노동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1차 하청 노동자한테도 60만∼120만원까지 성과급을 나눠주도록 회사 쪽과 다시 합의했다. 조합원은 파업기간 동안의 임금까지 받아내지만, 하청 노동자가 받은 성과급은 정규직의 파업으로 공장가동이 멈춘 데 따른 임금손실 부분을 메우는 데 불과했다. 그나마 2, 3차 하청업체 노동자는 성과급을 한푼도 만져볼 수 없었다.
총파업을 그저 멀찌감치 지켜볼 뿐…

5월 임단협 때가 다가올수록 비정규직은 더욱 서럽다. 해마다 회사한테 당당하게 요구하는 정규직 노동자가 부럽고, 그 대열에 끼지 못하는 자기의 처지가 제풀에 생각해도 안쓰럽다못해 서글프다. 노조를 가진 정규직이 총파업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가도 하청 노동자들은 멀찌감치 지켜보며 한쪽 귀퉁이에서 묵묵히 일하거나 집에서 쉬어야 한다.
우리 곁을 둘러보면 숨죽여 일하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 특히 대공장 하청 노동자의 생애에는 ‘노동의 그늘’이 더욱 짙게 드리운다.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조합원은 3만6천여명, 사내하청 노동자는 8600여명. 비록 같은 생산라인에서 정규직과 어깨를 부딪치며 일하지만 비정규직은 ‘동지’로 인정받지 못하는 ‘또 다른 노동자’다. 한국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는 대공장 노조로서 현대자동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벽은 대기업 노조의 집단이기주의와 우리 노동운동이 안고 있는 고민을 서글픈 풍경으로 보여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높은 벽과 차별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노동자를 분할통제하려는 사용자 쪽이 전략적으로 갈라놓은 결과다. 그럼에도 거기에서 비롯된 비정규직의 희생과 차별이 가져다주는 기득권을 정규직 노조가 언제부터인가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여기에는 ‘공장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채 기업별 노조체제가 주는 당근에 안주한 대기업 노조의 ‘경제적 전투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다. 조합원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는 조합주의에 멍들어 사회적 이슈인 비정규직 차별에 대해 외면으로 일관해온 것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노동자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또다시 적극 활용하는 게 사용자다. 2등 노동자로 취급받는 비정규직은 ‘노동자 안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다. 울산 방어진에 있는 INP중공업 사내하청노조 김형기 위원장은 “사내하청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가 가장 첨예하게 맞서는 지점”이라며 “정규직이 하청 노동자 문제를 깊이,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않은 채 방치하는 건 노동자 사이의 이해 대립을 꾀하는 자본에 되레 힘을 실어주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고용안정협약서? 정리해고통보서!

2000년 초 현대자동차노조 정갑득 위원장은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청 노동자를 받아들이겠다. 하청 노동자는 정규직의 방패막이다”면서 16.9%의 하청 노동자 비율을 유지하도록 회사 쪽과 합의했다. 인력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이 닥치면 정규직 대신 목이 잘려줄 만큼의 충분한 하청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른바 ‘고용안정협약서’였다. 정규직의 고용안정협약서가 곧 비정규직의 ‘정리해고통보서’인 셈이다. 정리해고 때 비정규직이 자동차의 범퍼 노릇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작업현장마다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다. 부서별 작업인원을 회사 쪽과 협의하는 현대자동차노조 대의원들이 정리해고에 대비해 여유인력을 일부러 정규직이 아닌 하청 노동자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에 투입된 하청 노동자들은 대부분 하청업체가 아닌 현대자동차 소속 조·반장의 감독을 받아가며 일하는 ‘불법파견’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데도 노조가 이를 고발조처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왜 그럴까. 한 노동조합 활동가는 “정규직이 겉으로는 하청노동자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하청은 나의 고용과 임금을 보장해주는 안전판’이라거나 ‘하청노동자가 정규직화하면 내가 불안해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해 싸울 수 있느냐고 물으면 대기업 노조는 ‘조합원의 정서’를 줄곧 내세운다. 정규직의 임금과 고용불안을 비정규직이 대신 보호해주는 ‘구조’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 비정규직 문제를 정규직이 적극 받아안는다는 건 이 구조에 금이 가는 것을 뜻한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을 위해 싸워줄 수 없다는 정서가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노조 이상도 교육선전실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거치면서 ‘나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식이 조합원들한테 퍼져 있다”며 “지금 노조가 하청 노동자 조직화에 나서면 조합원들이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곤혹스러워했다. 그는 비정규직이 사내하청노조를 결성하자 정규직이 구사대로 등장해 하청 노동자를 탄압한 광주 캐리어 사태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이 폭력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해 12월 현대자동차 제2공장에서 인력이 넘친다는 이유로 정리해고된 하청노동자 이경희(32)씨는 ‘하청은 쓰고 나면 버리는 부품이 아니다’는 피켓을 들고 석달 가까이 출근투쟁을 벌였다. 이씨는 “인력이 남으면 정규직은 다른 자리로 전환배치되지만 하청은 즉각 계약해지로 ‘들려나간다’”며 “직영은 ‘하청 너희는 왜 안 싸우고 끽소리 못하냐’며 한심해할지 모르지만 자기네 월급이 깎이면 절대 하청과 같이 싸울 수 없다는 우월의식을 갖고 있는 게 정규직”이라고 말했다. “나의 출근투쟁 같은 불씨가 생겼을 때 정규직 노조가 하청 노동자 문제를 적극 끌어당겨주면 기어다니는 데 불과한 하청 노동자들이 일어나 걸음마를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울산 방어진에 자리잡은 현대중공업의 노조 조합원은 2만여명, 사내하청은 8100여명으로 추산된다. 현대중공업노조의 단협은 ‘회사는 인원정리가 불가피한 경우 사내외 외주금지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조합원 고용안정조항을 담고 있다. 이 역시 현대자동차처럼 고용불안이 닥쳤을 때 하청 노동자들을 우선 정리해고 한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노조는 올 단협개정안에서 하청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해 작업복, 안전장구 등을 직영 노동자와 동일하게 지급한다는 안을 내놓고 있지만 ‘사내외 외주금지’ 조항은 손대지 않고 있다. 현대중공업노조 조맹현 제도개선위원은 “유사시에 정규직을 놔두고 하청부터 자른다는 조항을 조합원들이 기득권쯤으로 여기고 있다”며 “하청 노동자들이 어떤 설움을 받고 있는지 잘 모르고 알려고도 않는 게 조합원의 의식”이라고 털어놓았다.
'조합원 정서’ 뒤에 숨는 정규직

INP중공업 사내하청노조 김형기 위원장에 따르면 정규직 노조가 하청 노동자들을 위한 유인물을 찍어 뿌리면 “왜 우리가 낸 조합비로 하청 노동자들을 위한 유인물을 만드냐”는 정규직의 항의가 당장 쏟아지는 게 울산지역 대공장의 현실이다. 하청 노동자한테도 성과급을 나눠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라쳐도 “하청은 근속연수도 짧은데 돈이 썩어났냐”고 조합원들이 반발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는 선박의 발판인 족장이나 용접, 도장작업 등 정규직이 꺼리는 일에 이른바 ‘때려먹기’로 투입된다. 양준석 편집위원장은 “하청 노동자도 일한 만큼의 성과를 나눠가져야 하는데 되레 정규직한테 빼앗기고 있는 판”이라며 “노조에서 정규직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는 이른바 ‘조합원의 정서’ 뒤에 숨고 마는 게 노조”라고 말했다. 정규직 노조는 “하청 노동자는 원청회사 소속이 아니고 따라서 정규직 노조가 개입하기 어렵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나 하청 노동자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정규직이 성과급을 챙기고, 하청 노동자를 고용불안의 안전판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정규직 노조의 항변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비정규직도 임금 받아 먹고살기는 정규직과 똑같다. 남들 세끼 먹을 때 비정규직이라고 한끼만 먹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철밥통을 지키려는 정규직의 외면 속에서 비정규 노동자는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고, 이는 한국통신 계약직노조처럼 외로운 장기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조진원 국장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맛이 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며 “배부른 정규직 노조가 배고픈 비정규직 편에 서서 싸우지 않은 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현실타령만 한다면 그것이 무슨 노동조합 ‘운동’이냐”고 되물었다.
울산=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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