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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미투 극장전

한겨레21 르포작가 지원 공모제 당선작

'연희단 거리패: 예술은 어떻게 악이 되었는가'
등록 2020-04-05 15:44 수정 2020-05-03 04:29
2018년 2월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사과 기자회견.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18년 2월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사과 기자회견. 한겨레 김정효 기자

프롤로그

들판의 겨울은 스산했다. 화악산 자락 아래 7만여㎡ 단지엔 메마른 짚검불과 퍼석한 흙덩이들뿐, 수련의 선연한 색들로 넘실댄다는 여름을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늦은 오후의 탁한 햇살을 뚫고 간간이 차량이 오갔으나 인적은 없었고, 산책로에 드문드문한 카페들은 저마다 굳게 문을 닫아건 채였다. 텅 빈 마을 어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 두엇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제 키만 한 패널 앞에 서서 은밀히 어떤 말을 수군대고 있었다. “여기가 거 아이가. 이윤택씨, 그 미투.” 먼지 낀 패널 상단에는 ‘밀양연극촌 안내도’라는 표지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이런 길도 완전히 흙길이었어. 저 큰 도로(창밀로)도 아예 없었어. 비포장도로였지. 가로등도 하나 없이 깜깜했고… 다 우리 들어오고 나서 생긴 거야. 여기가 밀양에서도 외진 시골이라 우리가 ‘부북면’ 얘기하면 밀양 사람들이 ‘거기에 산다고요?’ 이랬다고. 나중엔 버스 정류장까지 생겨서 엄청 뿌듯했지.”

1999년, 이백재령은 이윤택을 주축으로 운영되던 우리극연구소의 겨울 연기 워크숍을 거쳐 연희단거리패에 정식 입단했다. 몸담은 지 8개월도 되지 않아 단체의 거점을 서울에서 경남 밀양으로 옮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합류와 탈단 사이의 갈림길에서 그는 망설임 없이 합류를 결정했다. 22살, “연극에 모든 인생을 던지기로 결심한” 나이였다.

운동장에는 잡풀이, 교실에는 쥐똥이 그득했던 버려진 학교를 단원 40여 명이 함께 숙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잘 곳이 마땅치 않아 상자를 깔고 자고, 씻을 데가 없어 화장실에서 호스를 대고 씻는 생활 속에서 단원들은 밤낮없이 작업과 공사에 동원됐다. 이듬해 6월, 마을의 애물단지였던 폐교는 대연습실·소품실·사무실·숙소·식당·자료실 등의 내부 시설과 중형급 야외극장을 갖춘 ‘밀양연극촌’으로 탈바꿈했다. “새벽 3시까지 양동이로 시멘트를 날랐던” 고생스러운 1년여 동안 이백재령이 받은 임금은 한 달 평균 15만원 정도였다.

그럼에도 연희단거리패와 연극촌은 그에게 늘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가 관리하는 인터넷 카페에는 연극촌 풍경을 담은 사진이 아직도 차곡했고, 책꽂이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때의 일기들이 가지런했다. 그런 시간의 흔적들이 2018년 후에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난 놀라웠다.

2018년, 이백재령은 22명의 여성들과 함께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인 이윤택을 검찰에 고소했다. 1989년부터 2016년까지 그가 저지른 성폭력을 처벌하기 위한 고발로, 초기 고소인 17명에 대한 경찰 조사 당시 파악된 피해 건수는 62건에 이르렀다. 검찰은 공소시효를 고려해 2010년 7월부터 2016년 12월 사이 여성 단원 9명을 25차례(2심 병합 사건 포함) 걸쳐 성추행·성폭행한 혐의(상습강제추행 및 유사강간치상)로 이윤택을 기소했다. 피고인 쪽의 잇따른 항소 끝에 2019년 7월24일, 대법원은 이윤택에게 징역 7년과 성폭력 프로그램 80시간 이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에 10년간의 취업 제한 등을 명령한 원심을 확정했다. 미투 운동 이후 확정된 첫 실형 판결이었다.

이백재령과 나의 인연은 소송 과정에서 시작됐다. 2008년 입단해 약 3년 동안 연희단거리패 일원이었던 나는, 그 시기에 직간접으로 겪었던 이윤택의 성추행에 관해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함으로써 미투 운동에 동참했다. 글을 게시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이백재령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내게 공동 고소인단의 참여를 조심스레 권했다.

난 법정이 아닌 일상을 택했다. 내 경험이 피해라 명명될 만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해서도, 지난한 송사가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내가 원한 것은 처벌보다 해답에 가까웠다. 어떻게 한 개인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몇십 명이 상주하는 집단 안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추악한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사건을 둘러싼 겹겹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며 그 불가해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올해 1월, 이백재령과 나는 밀양연극촌을 방문했다. 이백재령은 3년 만에, 나는 10년 만에 찾은 장소였다. 거친 모래가 날리던 운동장에는 800석 규모의 성벽극장이 압도적인 풍모로 들어서 있었고, 폐교의 낡은 외관을 간직하고 있던 본관은 성벽극장의 무대와 사무실, 대연습실, 단원 숙소를 아우르는 3층 높이의 세련된 건축물로 단장돼 있었다. 정갈히 깔린 진회색 자갈을 밟으며 연극촌 뒤편으로 향하니 그나마 옛 모습의 건물들이 남아 있었다. 그중 한 곳 앞에 이르러 우리의 발걸음이 문득 멈춰 섰다. 월산재라 불리던 독채에 딸린 아담한 별채, 황토방이었다.

황토방은 입수한 22건의 피해진술서 중 8건에서 거론되는 곳으로, 공간이 지어진 2000년부터 그의 가족이 월산재에 입주한 2006년까지 이윤택이 집중적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대표적인 범행 장소다. 당시 연희단 단원들은 무대조·소품조 등 여러 파트로 나뉘어 업무를 진행했다. 안마조 역시 하나의 파트로서 막내뻘 기수 여성 단원들이 요일마다 2명씩 배치됐다. 일과가 끝난 밤, 안마조에 배정된 여성 단원들은 황토방으로 가 이윤택이 잠들 때까지 1시간30분에서 5시간가량 그의 몸을 안마했고, 그 과정에서 이윤택은 그들에게 수차례의 성추행과 성폭행을 자행했다. 이백재령은 그 범행의 피해 당사자이자, 그 범죄 공간을 손수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좋은 황토 구해야 한다고 ××랑 트럭 타고 얼마나 돌아다녔는데. 그렇게 흙 사 와서 볏짚이랑 섞어서 손으로 다 그걸 이겨서 벽에다 바르고… 불편해. 불편한 기억이지. 그런 일들이 벌어진 곳인데 내가 내 손으로 여길 지은 거 아니야.”

이백재령은 두어 걸음 떨어져 잠시 건물을 바라봤다. 회한일까 분노일까, 아니면 슬픔일까. 내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 그의 눈 속을 스쳐가고 있었다.

황토방은 집중적으로 성폭력이 저질러진 범행 장소다. 박승화 기자

황토방은 집중적으로 성폭력이 저질러진 범행 장소다. 박승화 기자

1장 급락

박정희 정부 시절 명맥이 끊겼던 한국의 지방자치제도는 1990년대 초·중반에 실시된 지방의회 구성과 4대 지방선거를 거치며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추진되던 정책을 지역 발전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확대됐고, 문화예술 분야 정책도 전과는 다른 프레임(틀)으로 재검토됐다. 빠르게 다양화·다각화하는 예술정책 환경에서 각 지자체는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더 자발적인 노력을 기울여줄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예술의 물적·인적 기반이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된 상황에서 그 요구에 부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밀양시는 연희단거리패에 운영을 위탁한 밀양연극촌과 그곳에서 매년 열리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그 난항을 타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밀양시가 공개한 밀양연극촌·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지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01년 2천만원에 불과했던 지원금은 2003년 1억1천만원(시비 6천만원·국비 5천만원), 2009년 4억8200만원(시비 3억4천만원·도비 8천만원·국비 6200만원), 2016년 11억8800만원(시비 7억1800만원·도비 3억7천만원·국비 1억원)으로 가파르게 올랐다. 시의 전폭적인 투자를 기반으로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는 전국에서 관객 4만여 명(2013년 기준)을 불러들일 만큼 밀양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밀양연극촌도 민관 역할 교류의 성공 사례로 손꼽히며 여러 언론과 지자체에 소개됐다.

밀양연극촌의 발전은 지역사회에도 활력을 가져왔다. 2007년 밀양시는 가산리 일대를 연극촌 중심 복합테마마을로 조성하는 계획을 세워 행정자치부의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사업에 선정돼, 3년간 64억원의 개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연극촌을 포함한 주변 가옥과 연꽃단지, 퇴로고가마을 등 36만여㎡ 지구가 새로이 정비됐고, 관광객뿐 아니라 실제 거주 인구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연극촌 입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고만우(가명)씨도 마을에 유입된 인구 중 한 명이다.

“상권이 많이 죽었죠. 거의 없다고 보면 돼요. 전에는 여름축제 있고, 연극촌에 젊은 사람들이 상주하고, 주말에도 연극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왔죠. 왕래도 잦았는데 지금은 전혀 없죠. (연극촌이) 텅 비었으니까. 안 그래도 약간 시골 쪽인데 썰렁하잖아요. 전엔 괜찮았어요, 사건 터지기 전엔.”

고만우씨는 7년 전 가족과 함께 가산리로 이주했다.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연극촌, 그러나 주변에 상점이라고는 할매집이라 불리는 낡디낡은 구멍가게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그를 자극했던 것일까. 그는 도로 옆 나대지에 2층짜리 건물을 짓고 1층에 편의점을 열었다. 고만우씨 가게는 연희단 젊은 단원들에게 일종의 쉼터와도 같았다. 자정까지 환하게 열려 있어 늦은 연습을 마치고도 들를 수 있는, 언제든 갓 튀긴 치킨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켤 수 있는 곳. 그곳이 그들에게는 고단한 생활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자그마한 위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윤택의 성범죄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안에 있는 얘기가 전혀 밖으로 안 새나왔으니까. 여기 와서 단원들이 얘기하는 불만은 ‘일이 고되다’ ‘쉬는 시간이 없다’ 그것만 이야기하지, 자기들끼리도 그런 얘기를 안 했을걸요? 내가 못 들었으니까. 뉴스 보고 나서야 알았어요. 엄청 놀랐죠. 7년 동안 가게를 했는데도 몰랐어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누리집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누리집

연희단거리패는 이윤택이 1986년 부산에서 창단한 연극단체로, 본래부터 공동체적 성격이 두드러진 집단이었다. (당시 이윤택이 남긴 A4용지 1장 남짓의 ‘연희단거리패 선언’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9번 나온다.) 단원들의 합숙 생활은 극단이 서울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겼고, 밀양연극촌 개소 이래 하나의 시스템으로 완전히 정착됐다.

연희단거리패의 공동 숙식 생활은 예술단체로서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였다. 이윤택을 포함한 전 단원은 밀양(연극촌), 김해(도요창작스튜디오), 서울(게릴라극장, 30스튜디오와 숙소), 부산(가마골소극장) 등 전국 각지의 거점 공간에서 24시간 함께 기거했다. 식사부터 무대 제작까지 모든 업무를 집단 안에서 직접 해결했다. 크게 오전(07:30~12:30), 오후(14:00~18:00), 저녁(19:30~22:00)으로 나뉜 일과 안에서 단원들은 개개인에게 배정된 공연 혹은 무대·의상·사무실 등 파트별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공식적인 일정은 밤 10시에 끝났으나, 많을 경우 1년에 100여 편을 공연하는 극단의 스케줄상 야근이 빈번했다. 적은 월급 외에 시간별 급여나 추가 근로수당 같은 임금체계는 없었다. 무급에 가까운 단원들의 노동은 연희단거리패와 밀양연극촌을 운영하는 데 핵심 동력이었다.

밀양시가 처한 어려움도 그 지점에서 비롯했다. 이윤택의 성범죄가 그 실상을 드러낸 뒤, 밀양시는 발 빠른 대처를 거쳐 연극촌을 직영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시는 20년간 연희단거리패에 금전적 지원만 했을 뿐, 연극촌과 축제 운영에 필요한 정보와 노하우, 인력 모두 보유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언론 일각에선 밀양연극촌 사태를 두고 ‘명사 마케팅의 역효과’ ‘셀럽 마케팅의 부작용’ 등 냉정한 평가를 했다.

밀양시 쪽은 ‘청년 K-스타 연극 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연극인들을 선발, 그들에게 급여를 주고 연극촌 상설 공연과 축제 운영 등의 업무를 맡기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10여 년 동안 연극촌 공연을 관람해왔던 밀양 시민 허영희(가명)씨는 시의 직영 뒤 상연된 작품들에 대해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퀄리티(질)가 낮고 결속력이 없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주말에 종종 공연을 챙겨본 고만우씨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연희단이 있을 땐, 젊은 사람들이 꿈을 안고 왔잖아요. 그때는 이윤택씨 밑에서 잘되면 그 길로 계속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어도 버텼던 거죠. 근데 연극촌이 무너졌으니, 여기는 뭐 희망이 없어요. 지금 밀양시에서 직영으로 하는 건 임시방편이지요. 길이 안 잡히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담배나 주전부리 따위를 사러 들어오는 발길들마저 뜸해질 무렵, 난 고만우씨에게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사에 써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너털웃음을 치며 간단히 답했다.

“다 써도 됩니다. 요샌 뭐 다 잊혔던데요.”

경남 밀양 부북면 폐교된 월산초등학교는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의 합숙소가 되었다. 연합뉴스

경남 밀양 부북면 폐교된 월산초등학교는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의 합숙소가 되었다. 연합뉴스

2장 뭔가 이상한 느낌

2018년, 서지현 검사를 필두로 들불처럼 번졌던 국내 미투 운동은 한국 여성 인권의 위상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거대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했으며, 어떠한 저변 위에서 형성됐을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을 찾아갔다. 이 소장은 “사실은 참 오래된 미투”라며 1990년대 초반의 일들을 들려주었다.

“1991년 한 여성이 21년 전의 강간범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어요. ‘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그 사건을 상담소도 함께 지원했어요. 그다음 해에 또 한 여성이 13년간 자신을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죠.”

당시 성폭력 범죄는 6개월 안에 피해자가 직접 신고해야 하는 친고죄에 속해 있었다. 아버지 같은 직계존속이 성폭력을 가했을 경우, 피해자는 고소조차 할 수 없었다. 법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잇따르면서 여성단체들은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 공동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12개 단체가 모여 성폭력특별법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의 노력은 1994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으로 열매를 맺었다. 변화의 바람은 1997년 가정폭력 방지법 제정, 2004년 성매매 방지법 제정 등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한국 여성 인권이 성장의 전기를 맞이하던 2000년대 초반, 김현태(가명)는 19살에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갔다. 대학 연극영화과 진학에 실패한 뒤, 그럼에도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놓을 수 없어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가지 않고 곧바로 밀양으로 향했다. 나이, 출신 학교, 전공 등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는 대부분의 극단과 달리, 연희단거리패는 매년 진행하는 우리극연구소 연기자 훈련과정만 이수하면 누구나 입단이 가능했다. 프로 무대에서의 경험을 갈망하던 김현태에게 연희단거리패 입단은 지극히 합당한 선택이었다.

훈련과정을 시작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함께 워크숍에 참여한 여성 동료가 일주일 만에 연극촌을 퇴소했고, 그 일을 이상히 여겼던 그의 귀에 ‘이윤택이 건드려서 떠났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이다. 수상히 떠도는 말들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제가 그때 되게 좋아하고 잘 따르던 여자 선배가 있었는데, 매일 저녁에 그 선배가 안마를 하러 갔어요. 그게 저는 이해가 안 됐어요. 그때 그분이 21살이었는데, 말이 안 되잖아요. 일과가 끝나면 씻고 여자들이 잠옷 차림으로 가서 이윤택이 잠들 때까지 주무르는 게…. 그래서 여자 선배에게 가지 말라고 그랬어요. 근데 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한테 티 내지 말라고.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봐 밖에서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고 그랬어요.”

얼마 후 그 선배는 김현태에게 안마 도중 성폭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토로했다. 끔찍했던 그때의 상황을 오히려 담담히 털어놓던 선배의 모습을 김현태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거의 반 미친 것 같은” “제정신이 아닌 듯한” 분노에 휩싸였고, 경찰서에 신고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신고할 수는 없어서, PC방 가서 경찰청 사이트에 있는 신고 페이지에 글을 썼어요. 연락이 엄청 늦게 왔어요. 한 달 뒤에 오더라고요. 그때 제 주소가 ××로 돼 있어서 그쪽 경찰서에서요. 그래서 ‘일어난 일이 밀양에서다’라고 했더니 또 한참 뒤에 밀양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피해자가 직접 진술해야 하니까 경찰서로 오라는 거예요. 친고죄라 피해자 신고가 들어와야 한다고. 제가 신고해도 진행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때 실명도 다 넣고 했는데… 제가 어떻게 그분을 데려가요. 때도 한참 지났고….”

이윤택의 성폭력을 경찰 혹은 언론에 알렸다는 증언이나 그와 관련된 발언을 들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D사이트를 통해 본인의 피해 사실을 발화했던 김보리(가명) 글에는 2001년, 이윤택에게 입은 피해에 관해 “몇 기수 위의 선배”와 상담하던 중 그 선배로부터 “자신 또한 몇 년 전에 안마 사실을 폭로하고자 P일보에 제보했지만, 기자 출신인 이윤택에게 오히려 ‘이런 제보가 있었다’고 연락이 와 흐지부지 무마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공동 고소인단의 신뢰관계인으로 공판을 직접 방청했던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산 상담활동가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나 2000년대에도 신고나 언론 제보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며 “피해자들이 두 번 정도 진술을 했다”고 밝혔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생활 속에 김현태는 점점 “이상해졌다”. 연극촌 안의 장비를 이용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을 하는 등 정신이 불안한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그해 겨울, 대학 진학을 핑계로 극단을 나왔다. 이후 바라던 대로 연극영화과에 입학했고, 지금은 극단 소속 배우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연희단거리패에서의 시간은 아직도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극단에 다시 가는 꿈을 많이 꿨어요. 나이 먹은 상태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던 일이나, 그때의 어떤 상황을 바꾸려고 애쓰는 행동을 계속해요. 노가다며, 사람들과의 관계며, 공연이며 그걸 더 열심히 하는 거예요. 잘못된 일이 또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2~3년 전까지 그런 꿈을 1년에 한두 번씩 꿨어요.”

다음날, 그와의 인터뷰를 녹취하던 중 무심코 검색창을 열었다. 성폭력 범죄에 관한 친고죄 조항이 완전히 폐지된 해는 2013년, 김현태가 신고한 때로부터 12년이 지난 후였다. 난 서가에 꽂힌 를 꺼내 뒤편에 수록된 단원 명부를 펼쳤다. 그 12년 동안 극단을 거쳐간 여성 단원은 모두 116명이었다.

(왼쪽부터) 2008년 밀양연극축제 폐막작 <오구>. 연합뉴스

(왼쪽부터) 2008년 밀양연극축제 폐막작 <오구>. 연합뉴스

3장 안마

“저는 법정에서 완전히 분리돼 있을 줄 알았는데 (이윤택이) 바로 뒤에 앉아 있더라고요, 천막 하나만 쳐놓고. 계속 그 헛기침, 헛기침을 계속하시는데… 근데 제가 그때(성추행을 당했을 당시)의 상황도 아니고, 처음 몇 분 정도만 떨렸지 그 뒤부터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어요. 할 말은 다 하고 나왔어요.”

박윤영(가명)은 그 116명 중 한 명으로, 2010년대 초반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연희단거리패에 입단했다. 그는 나보다 두어 기수 밑의 단원이자 검찰의 기소장에 적시된 25건의 범죄사실 중 3건의 피해를 당한 당사자였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직접 법정에 출두해 이윤택의 범행에 관해 증언했다. 대다수 피해 발화자가 그러했듯, 그의 피해 또한 안마와 공연 연습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윤택이 행했던 가해 방법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안마 도중에 상대의 손을 강제로 잡아당겨 성기 등의 부위를 만지게 하고, 연기를 지도하는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여성 배우의 몸을 추행하는 방식이었다.

이윤택의 성폭력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을까. 어떤 요소가 그 장기간의 범행을 가능하게 했을까. 지글대는 통화 잡음 너머로 박윤영의 서글서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도 연희단에 있어봐서 아시잖아요. 그곳 생활은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지 않나요?” 나도 모르게 허공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 안에서 겪었던 온갖 일과, 만나온 이들에게서 들었던 수많은 말이 뇌리를 부유했다.

“중학생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어. 친언니가 예대 출신인데, 대학에서 이윤택이 하는 극작 수업을 들은 거야. 당시는 이윤택이 한창 핫했을 때야. 1998년, 99년. , 상이라는 상 모조리 휩쓸고…. 언니가 ‘거기서 한번 배워볼래?’ 그래서 수능 끝나자마자 바로 언니랑 손잡고 갔지. 혜화초등학교 맞은편 지하 1층에 연습실이 있었는데, 입구부터 포스터가 좍 붙어 있었어. 보는데 엄청 짱짱한 배우들이 다 있는 거야. 전도연, 신구, 강부자, 손숙…. ‘와, 여기 잘하는 데구나. 여기서 배우고 싶다.’ 그렇게 들어가게 됐지.” -김우리(가명, 연극인, 1990년대 말 극단 생활, 입단시 20대 초반)

“2005년엔가 연희단 을 봤는데, 그때 어떤 예술적 체험을 한 것 같아. 너무 좋은 거야. 1막 마지막에 배우들이 막 풍물을 몰아치며 나오다 햄릿이 손가락 딱 들고 ‘연극 만세’ 암전 탁 되는 장면을 보는데, 소름이 좍 끼치면서 전율이 느껴졌어. 몇 년 뒤 우리극연구소 워크숍 공고를 보았는데 여기서 배워야겠다, 싶었지.” -박철용(가명, 배우, 2000년대 후반 극단 생활, 입단시 20대 중반)

박윤영의 입단 계기 또한 배우로서의 열망이었다. 연희단거리패의 대표 레퍼토리인 을 보며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에 “한눈에 꽂혔던” 그는, 연희단에서 연기를 배울 수 있다면 그곳의 단원들처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품고 극단행을 결심했다.

입단 뒤, 밀양과 김해 도요창작스튜디오를 오가는 1년여 동안 그는 어떤 배역도 맡지 못했다. “아침마다 이쌤(이윤택) 식사랑 선배들 식사 챙기고, 오후에는 밀양(연극촌)으로 넘어가 무대랑 의상을 정리하”는 일로 매일을 보냈다. “내가 여기 밥하러 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좋은 배우가 되려면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밥을 잘해야 연기를 잘한다’ ‘하기 싫은 일도 해야 좋은 배우가 된다’ 신입 단원들의 연기 훈련을 도맡은 수뇌부 단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극단 업무와 연극 작업을 긴밀히 연결하는 논리는 연희단거리패의 주요 메소드, 즉 연기방법론 중 하나였다. 이 논리는 이윤택을 제외한 모든 단원에게 동일하게 적용됐다. 나 역시 연출부로 입단했음에도 극장 관리·기획·홍보 등의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연극은 자신의 에고를 부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연극은 일대 다수를 상대하는 것이고, 다양한 변화를 가지고 다른 인간의 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배우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가장 중요한 고비가 바로 여러분들의 에고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미 고정화되어버린 여러분들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뿌리 뽑고 가장 자유스러운 원시공동체적인 의식구조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이윤택의 중

2010년 완공된 성벽극장에서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폐막식이 열렸다. 연합뉴스

2010년 완공된 성벽극장에서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폐막식이 열렸다. 연합뉴스

김혜연(가명)은 2010년대 중반, 5개월간 밀양연극촌에 머물며 연희단거리패의 일상생활과 단원들의 의식 사이 영향 관계를 연구했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그러한 메소드가 극단의 자급자족적 시스템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밝혔다. 공동 숙식을 하며 일상 업무와 연극 작업을 함께 해나가야 하는 환경 안에서, 연희단의 특수한 메소드는 단원들의 목적의식을 자극해 극단 업무가 무리 없이 돌아가게끔 하는 윤활유 구실을 했다.

김혜연은 나와 한 인터뷰에서 연희단거리패 특유의 집단주의-개인성을 극도로 폄하하며 연극 혹은 극단 등 개인을 넘어서는 ‘더 큰 것’에 배우 자신을 복속시킬 것을 요구하는-가 여러 면에서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연희단이 원하는 ‘개인’은 윗사람 말을 잘 따르는 존재였으며, 극단 내 위계 피라미드로 보았을 때 그 윗사람이란 결국 이윤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에서 안마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식사 당번이나 청소처럼 때를 맞춰 수행해야 하는 업무와 다름없었다.

“도요건 밀양이건 서울 게릴라극장이건 계속 이윤택은 안마를 받았잖아요. 새벽이건 어느 때건 일어나서 헛기침을 한다거나, ‘누구 있냐?’ 부르기도 하고. …아무리 남녀 구분으로서의 성적인 부분을 빼고 생각한다고 해도, 여성으로서 중년 남성 몸을 안마하는 게 어느 누가 좋겠어요? 그래도 그냥 하는 분위기였으니까. 극단에 있으려면 ‘그래, 할 수도 있지. 할아버지나 내 아빠 같은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지. 정말 밤마다 다크 나이트였죠.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아요. 무슨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냥 업무죠.” -정유선(가명, 2010년대 초반 극단 생활, 입단시 20대 후반)

박윤영은 정식 입단하기 전, 서울 숙소에서 지내던 동료로부터 안마에 대한 고충을 들은 적이 있다. 밀양에 내려와서야 그는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안마는 단순한 안마가 아니었다. 연극 비전공자, 10~20대 어린 단원, 직속 제자, 고졸 혹은 지방대 출신 등 이윤택이 판단하기에 취약한 대상을 골라 행하는 성추행이었고, 성착취였다. 그러나 극단 내부의 누구도 그 단어들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피해를 입은 자 중 몇몇은 한밤중에 콜택시를 불러 그저 조용히 그곳을 떠났고, 남은 자들 사이에선 “선생님(이윤택)이 걔한테 그랬대” 따위의 말들만이 쉬쉬 떠돌았다.

“안마조 배정돼서 안마하러 들어가면 1단계가 ‘손아귀 힘이 좋다’면서 이윤택이 칭찬을 해. 그러면 처음에는 열심히 안마만 하고 나와. 그러다 안마하는 시간이 1시간30분에서 점점 길어져, 부르는 시간이 달라지고. 점점 더 밤늦게 부르는 거야. 웃통 다 벗고 팬티 한 장만 입고서 이불 덮고 있고… ‘사타구니에 혈이 있다고!’ 하면서 내 손을 막 가져가. 그러면서 거기를 주무르라고 하는데….” -이백재령(연극인, 1999~2001년 극단 생활, 입단시 22살)

2016년은 연희단거리패가 창단 30년을 맞는 해였다.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서 <탈선 춘향전>을 보는 관객들. 한겨레 자료

2016년은 연희단거리패가 창단 30년을 맞는 해였다.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서 <탈선 춘향전>을 보는 관객들. 한겨레 자료

입단 1년6개월 만에 박윤영은 한 공연의 조연을 맡게 되었다. 이윤택과의 대면이 잦아지면서 연기 지도를 빙자한 추행이 시작됐다. 박윤영은 쉽사리 저항할 수 없었다. 그에게 이윤택은 캐스팅 권한을 틀어쥔 집단 내 최고 권력자이자, 관객과 평단에서 ‘한국 연극계 거장’이라 불리는 탁월한 예술가였다.

“저희 기수 위에 ××× 선배라고 있었어요. 그분이 쌤(이윤택)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고 아파했어요. 되게 연기를 하고 싶어 했던 선배인데 무슨 이유인지 1~2년 동안 계속 캐스팅이 안 되고 다른 일만 했어요. 그러다 한 배역에 캐스팅됐는데, 쌤이 ‘소리가 안 난다’고 몸을 막 그렇게 하는데… 당하는 사람은 너무 힘들었을 거 같아요. 쌤 때문에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그 에너지가 아팠죠.” -문지연(가명, 연극인, 1990년대 말 극단 생활, 입단시 20대 초반)

“ 작품 준비할 때 4개 팀이 있었는데, 매일 경연 아닌 경연을 하면서 집착하게 되더라고. 그 팁(이윤택이 연기 부분에 대해 주는 조언)에 집착하게 되는 거야. 연기라는 게 정답이 모호한 세계인데, 이윤택이나 선배들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것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러다 호흡을 하면서 이윤택이 몸을 터치하는데,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뭐라고 말하기 모호하게 이뤄져. 그러면 ‘이건 그냥 메소드인가?’ 하면서 나 스스로 ‘이건 메소드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자꾸 이렇게 되는 거야. 그렇게 하나씩 나를 몰아갔던 것 같아. 이윤택이 나한테 손대도 ‘이건 진짜 발성을 위한 거다’라고, 계속 그렇게 연관되게 만들었던 거 같아.” -최수인(가명, 2000년대 중반 극단 생활, 입단시 20대 후반)

“숙소에 돌아오면 하루에 있었던 그런 일(연습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윤택의 신체 접촉)들에 관해 얘기가 나오는데, 동기 중 한 명이 이쌤 제자인데 너무 무섭게 화내는 거야.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데 그걸 어떻게 만졌다고 표현할 수 있느냐’ 하고. 선생님이 우리를 만져도 이건 만지는 게 아니다, 성적인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메커니즘이 이미 짜인 상태로 훈련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만지시는 건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가르침인 거예요. 기분 나빠하면 안 되고. 설사 불쾌한 생각이 들어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3개 극단 중 하나잖아요. 입단할 때는 ‘한국에서 월급 주는 극단 둘 중의 하나다’ 이런 얘기도 들었고. 그렇게 제일 많이 지원받고, 연극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곳이라면 견뎌야 하는 곳인 거지. 내가 감히 이들(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면 안 되는 거죠.” -이진아(가명, 2010년대 초반 극단 생활, 입단시 20대 후반)

박윤영에 대한 이윤택의 추행은 점점 더 심해졌다. 박윤영은 극단의 수뇌부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고발해서 만천하에 알리는 것보다 선생님을 막고, 대화하여” 해결하는 길이 더 나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극단을 사랑했다. 노동 착취라 생각될 만큼 고된 생활이었으나 단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다. 필요한 의상과 조명을 언제든 가져다 쓸 수 있는 곳, 연극이 무대에 올라갔을 때 그동안의 고생을 싹 잊게 하는 관객의 호응이 있는 곳. 박윤영에게 연희단거리패는 연극이라는 “설레고도 벅찬, 황홀한 꿈”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었다.

수뇌부 단원들은 박윤영을 대신해 이윤택에게 항의했다. 종종 벌어졌던 일이었다. 때로는 이윤택과 수뇌부 사이에 고성이 오갔고, 어떤 단원은 ‘칼 들고 죽겠다’며 이윤택 앞에서 강하게 분노하기도 했다.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의 표현대로, 수뇌부의 그런 대처는 “뿌리부터 썩은 나무를 이파리 하나 따는 일로 고쳐보겠다는 식”의 미력한 행위에 불과했다. 공고한 1인 지배 체제, 집단성과 비일상성을 강요하는 단체 고유의 메소드, 협소한 공간에서의 공동 숙식, 빡빡한 공연 일정 등이 만들어낸 고착화된 구조 속에서 이윤택이 저지른 ‘그 일’은 쉽게 잊혔다. 박윤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안마에 불려갔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을 보낸 뒤, 그는 휴식을 이유로 서울로 올라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박윤영은 이윤택의 범죄에 공소시효가 있다는 말을 들은 뒤 소송 참여를 결정했다. 이윤택에게 맞서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후회도 결심의 또 다른 이유였다. 재판 과정에서 이윤택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끈질기게 항변했다. 1심 판결 뒤 이윤택 쪽 변호인이 제출한 항소이유서에 따르면 피고인 쪽은 연기 훈련 중에 박윤영에게 저지른 추행에 대해 발성 훈련의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안마 중 자행한 범행에 대해서는 “차근차근히 신체에 필요한 맥점을 짚어 나가던” 행위가 추행으로 오인된 것이라고 강변했다.

검사 피고인의 진술에 의하면 ‘피해자와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이다’라고 하였는데, 어떤가요.

이윤택 예, 이름에 씨라고 붙이며 존댓말을 써주었고 검찰 조사에서 나온 것과 같이 피해자는 굉장히 불우한 친구입니다. 아주 불우한 친구라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불우한 친구를 제가 같이 작업하자고 작업자로 이끈 것입니다.

검사 그렇게 인격적이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인데 왜 피해자에게 그러한 행위를 시킨 것인가요.

이윤택 저는 그러한 행위가 만일 서로가 인격적이고 존중하며 아껴주는 관계라면 나쁜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미투 운동이 일어나서 그것이 어떠한 죄가 된다고 하지만, 지난 시절에 서로가 합의에 의하면….

검사 그것이 합의에 의한 것인가요.

이윤택 제가 말도 안 했는데 알아서 하는데 그것이 합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2018년 12월10일, 이경미(가명, 예술인, 1990년대 중반 입단, 입단시 30대 중반)의 피해에 대한 피고인신문 녹취서 중

1시간20분 남짓의 통화를 마칠 때쯤, 난 박윤영에게 미투 운동과 소송에 동참하며 무엇을 얻었는지 물었다. 응당한 처벌로 인한 ‘후련함’, 응당하지 않은 처벌로 인한 ‘분노’, 과거의 고통을 이겨낸 자신에 대한 ‘자긍심’… 그런 단어들이 내가 짐작했던 그의 대답이었다.

“저는 얻은 게 없죠. 전 이제 연극을 안 하니까… 극단이 해체된다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도 더 평등한 환경이 돼서 앞으로 연극하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경남 밀양연극촌 간판. 박승화 기자

경남 밀양연극촌 간판. 박승화 기자

4장 이상적인 예술 공동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7년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 사건’을 다룬 두 번째 논픽션 를 발표한다. 전작 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증언을 담아냈던 그는, 8개월 뒤 사건의 가해자로 통칭되는 옴진리교 신자 9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목소리를 활자화했다. 책 말미에 수록된 심리치료사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에서 하루키는 의 집필 뒤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음을 고백한다. 그는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악이 개인적인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 단위적인 것인가의 문제부터 규명해야 한다’며 악에 관한 사견을 얼마간 밝히고, 하야오 또한 그간 품고 있던 자신의 견해를 풀어놓는다. 그러나 악의 실체와 실상에 대한 두 사람의 논의는 명확한 지점에 닿지 못한다.

서재석(가명)을 만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난 하루키의 질문을 떠올렸다. 전 연희단거리패 단원인 그는 1990년대 중반에 입단해 극단이 해체될 때까지 20여 년간 그곳에 몸담았다. 이윤택이 연출한 다수의 작품에서 주요 배역을 맡아 열연했으며,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극단의 주축 단원으로서 많은 후배를 지도하고 감독했다. 이윤택의 성범죄 사태가 터졌을 무렵 그는 극단 수뇌부급에 있었고, 내부에서 벌어진 수십 년간의 성폭력을 방치하고 방조했다는 세간의 힐난과 질타가 그에게 쏟아졌다. 나 역시 피해 발화자들의 인터뷰 과정에서 수뇌부였던 단원들을 향한 날 선 말들을 자주 접했다. “기생충들” “이윤택을 왕으로 만든 자들” “이윤택보다 더 죽이고 싶었다”…. 서재석은 악한 인간일까, 이윤택이라는 악인이 구축한 시스템의 일부였을까, 그 둘 모두일까.

서재석과 나는 번잡한 대학가에 있는 한 중국집에 자리를 잡았다. 어림잡아 7년 만의 만남이었다. 꺼칠한 낯빛과 덥수룩한 수염, 꾹 눌러쓴 후줄근한 야구모자가 시선을 잡았다. 명멸하는 조명 아래서 그의 몸이 만들어냈던 특별한 찰나들이 기억났다. 극단 해체 뒤 그는 배우 활동을 그만두었고, 현재는 주 6일 48시간가량 청소 용역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난 그를 만나고자 했던 연유를 두서없이 꺼내놓았다. 그제야 그는 모자를 벗고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내부 고발자가 이런 기분이구나.” 그사이 내가 놓아둔 녹음기를 보며 서재석은 특유의 너스레를 부렸다. 그는 “오래전부터 연극 안 하는 삶을 꿈꿨다”고, 연극과 멀어진 지금이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는 이윤택을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깊이 곪은 상처가 이미 내부적으로 많았어. 너무 많은 작업,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많은 일…. 이윤택은 일을 계속 만들기만 하지, 우리는 더 이상 커버가 안 되지, 팀은 (서울·기장·밀양·도요 등으로) 막 쪼개져서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지, 남들 보기엔 번지르르한데 다 빚더미지…. 이건 아니다, 제발 좀 쉬자고 3년 전부터 그랬거든. 실제로 운영난이 있었고. 2016~2017년 중에는 월급도 50%만 주거나, 아예 어떤 달은 못 주고 그랬어. 왜냐면 일을 너무 많이 펼치니까 돈이 들어갈 데가 많은 거야. 근데 이 양반(이윤택)은 일해야 돈이 들어온다고 일을 펼치기만 하는데…. 예를 들어 수유리 숙소 샀을 때부터, 그 돈을 왜 대출을 받냐고. 30스튜디오(극장 부지 매입), 못 말렸지. 기장(현 가마골소극장 부지 매입), 못 말렸지.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진짜 상상도 못할걸. 곪을 대로 곪았어. 이윤택이 여자 단원들한테 그렇게 하는 거 말고도, 운영상에서.”

연희단거리패는 단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극단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연희단의 급여제는 단체가 밀양연극촌에 정착한 뒤 생겨난 시스템으로, 입단 뒤 6개월이 지난 막내 기수부터 이윤택에 이르기까지 50만~200만원의 금액이 급수별로 차등 지급되는 방식이었다. 예술인이 예술 행위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한국 연극계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연희단거리패는 숙식과 생활비와 작업이 보장되는, 그야말로 연극만 하며 먹고살 수 있는 곳이었다. 2011년 도요창작스튜디오를 방문했던 일본 도쿄대학 문화자원학과 학도들은 연희단을 ‘이상주의 예술 공동체’라 불렀다.

단원 수는 점점 늘어 80여 명(2017년 기준)에 육박했고, 단원들의 급여와 생활비 등에 필요한 5억~7억원의 운영비를 매해 확보해야 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서울과 경남 일대 거점마다 소속 단원을 대표로 내세워 사업자 명의를 등록, 이를 기반으로 극단의 운영 자금을 마련했다. 산하 사업체로 연희단거리패, 우리극연구소, 게릴라극장, (사)밀양연극촌, (주)월산프로젝트, 극단 가마골, 가마골소극장, 도요창작스튜디오 등이 있었다. 연희단거리패는 이 사업체들을 이용해 작품 상연과 공간 운영의 명목으로 해당 지역의 각종 지원금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서울문화재단·경상남도·밀양시·김해시·부산문화재단·부산 기장군이 공개한 자료(2004년 이후)에 따르면, 연희단거리패 관련 사업체들이 이들 기관에서 받은 금액은 한 해에 최소 약 2억4천만원(2004년), 최대 약 21억원(2010년)에 이르렀다. (지역 축제와 행사 등 정부기관 외 수혜 건까지 포함하면 더욱 상당한 금액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한다.) “반쯤 허물어져가는 건물의 지하실을 빌려” 시작한 변방의 무명 극단이 수십억원대 자본을 굴리는 ‘연극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서울문화재단·경상남도·밀양시·김해시·부산문화재단·부산 기장군 정보공개 청구해 필자가 종합

*한국문화예술위원회·서울문화재단·경상남도·밀양시·김해시·부산문화재단·부산 기장군 정보공개 청구해 필자가 종합

이윤택은 기업의 오너로서 집단 운영과 자금 운용에 대해 계획하고 결정했다. 수뇌부급 단원들은 그 계획과 결정의 실제적인 수행자였다. 극단이 존속한 33년 동안 수뇌부 단원들은 수시로 바뀌었다. 이들은 이윤택의 지시에 따라 서울·밀양·부산 등의 거점별 혹은 회계·기획·무대 등 파트별 업무를 맡았다. 극단 규모가 커질수록 이윤택의 계획은 점점 방대하고 방만해졌다. 수뇌부 단원들은 휘하의 단원들을 이끌며 어떻게든 그 업무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간 500여 회의 공연을 해야 하는 스케줄 속에 서재석 또한 탈단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주인공도 많이 하고” “주목도 많이 받았던” 배우로서의 만족감 때문이기도 했으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갖고 있던 연극에 대한 비정상적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은 극단 내에서 일어난 이윤택의 성폭력마저 묵과하게 한 “단 하나의” 어떤 강력한 무엇이었다.

“××아트홀에 모여서 이윤택이 (자신이 저지른 성추행에 대해) 공개 사과를 한 적이 있어. … 공연할 때도 배우한테 소리 얘기하면서 만졌다는 얘기도 들었고. …근데 그냥… 정당화를 계속했던 거 같아.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맞아, 좀 부당한 일이 있어도 연극을 하기 위해선 이게 맞아.’ 그 생각에 약간 의심이 들어도. 나는 교회랑 똑같다고 생각해. 교회에서 의심하지 말라 그러잖아. 예수님이 있나? 의심하지 말라고 하잖아. 똑같아.”

그는 자신에게 향했던 비난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이상주의 따위의 개념에 “거의 세뇌당했던” 지난날을 상기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비판적 사고가 없었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럼에도 극단의 해체 결정에는 유감을 표했다. “이윤택이 그랬다고 해서 남아 있는 후배들이 연극을 못할” 이유는 없다며, 대법원 판결 후에도 기장의 가마골소극장에 남아 있는 단원들에게 일면 동조하는 기색이었다. 여전히 이윤택의 명의로 되어 있는 공간에서 연극 작업을 지속하는 그들의 선택이 내겐 기이하게만 느껴졌으나, 서재석에게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선택이었다. 소송 진행 과정에서 서재석은 경찰에 출석해 사건의 참고인 조사에 임했다.

“한참 동안 답변하고, 확인 다 하고, 조서 작성이 다 끝났어. 근데 형사가 물어보는 거야. ‘이윤택은 대체 어떤 인간입니까?’ 많은 참고인한테 증언 듣고 조서 꾸미면서 궁금해진 거겠지. 딱 한마디 했어. ‘연극 잘 만드는 인간요.’ 그 이상은 아니야. …이윤택에 대해서는… 용서? 몰라. 용서할 필요가 있나?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도 아니고.”

서재석은 극단이 해체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때 남기로 한 결정이) 큰 실수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진짜로.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엄청 후회되지. 그때 박차고 나왔어야 했는데… 또 속았지, 뭐.”

그는 왜 잔류를 선택했을까. 무엇에 속았다는 것일까.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 연극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갖가지 의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서재석은 눈길을 떨군 채 식은 맥주잔을 말없이 매만지고 있었다.

그날 밤, 난 침대에 누워 익숙한 영상을 불러냈다. 날짜를 기억할 수 없는 어느 새벽, 난 동료 단원들 틈에서 그리 깊지 않은 잠에 빠져 있다. 어디선가 탁하고도 분명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정신이 또렷해지며 숨이 멎는다. 한 번, 또 한 번, 또 한 번의 기침 소리. 마침내 방 안의 누군가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의 발걸음은 계단을 지나 이윤택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이어진다.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베개를 고쳐 베자 금세 잠에 젖어든다. 어젯밤에 그러했듯이.

어떻게 한 개인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몇십 명이 상주하는 집단 안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추악한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무수한 목소리와 활자를 지나왔음에도 그 답은 아직 내게 겹겹의 안개에 싸여 있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들춰내야 할 또 하나의 겹은 내가 그곳에서 보냈던 숱한 밤들, 그 태연했던 일상이 아닐까.

모니터에 흰 페이지를 띄우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물어야만 할 질문들을, 들어야만 할 대답들을.

2018년 해체가 선언된 서울시 창경궁로 연희단거리패의 ‘30스튜디오’.  연합뉴스

2018년 해체가 선언된 서울시 창경궁로 연희단거리패의 ‘30스튜디오’. 연합뉴스

에필로그

김현태가 그러했듯, 이백재령이 그러했듯, 기사 속 많은 이가 그러했듯 연희단거리패에서의 시간은 날 아주 오랫동안, 끈덕지게 따라다녔다. 술로, 망각으로, 궤변으로 그 시간을 잊으려 했던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지난해 8월, 트위터에서 르포작가 지원 공모 소식을 접했던 순간 내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대면’이었다. 온갖 핑계로 하염없이 미뤄왔던 과거와의 대면, 그 시도를 이제는 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그 실체 없던 감각은 6개월이라는 시간과 28명의 인터뷰이, 10.8기가의 녹음파일을 통해 2만493자의 기사로 현실화되었다.

의미 있는 판을 만들어준 쪽에 감사하다. 기사문은 처음인 내게 그들은 아낌없는 조언과 지원을 해주었다. 물론 우여곡절도 있었다. 르포작가 공모는 본래 당선 작가와 출판사를 연결해, 신인 작가의 기획안이 단행본 출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돕겠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동반 당선된 두 작가와 달리,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 등에 대한 우려로 나의 기획은 출판사와 매칭되지 못했다. 내가 애초에 구상한 기획은 이 기사보다 훨씬 방대하고 야심 차다. 좋은 기회를 만나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 또한 매우 기쁠 것이다.

발화의 고통을 감내하며 기꺼이 이야기를 내어준 인터뷰이들에게 깊은 존경을 표한다. 아직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피해 당사자들에게 하루빨리 평안의 시간이 깃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끝끝내 발화하지 못한,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꿋꿋이 삶을 꾸려가는 피해 당사자들이 있음을 기억한다.

우리는 분명 함께 걸어가고 있다. 두려움은 오롯이 가해자의 몫인 세상을 향해.

류운정 작가*이 글은 지난해 9월 과 출판사가 공동 주최한 르포작가 지원 공모제 당선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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