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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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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범유행이 시작됐다

‘유럽 진원지’ 된 이탈리아, 지역 감염 우려하는 미국… WHO, 국제적 공중보건 위기 선포
등록 2020-02-29 15:55 수정 2020-05-03 04:29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26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코로나19 TF’ 실무진과 함께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26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코로나19 TF’ 실무진과 함께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기원전 430년.
역사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역병이 돌아 인구의 25%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쓰고 있다. 정확한 원인이 드러나지 않았던 역병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장티푸스’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감염병의 공포에 질린 그리스 사람들은 ‘나도 언젠가 걸릴 것이고, 결국엔 모두가 역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감염병의 세계적 범유행을 의미하는 단어 ‘팬데믹’의 어원은 그리스어 ‘판’(모든)과 ‘데모스’(사람)다. ‘모든 사람’.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바라보는 우리의 공포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 너도, 나도, 그리고 모든 사람이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 공포 앞에서 “전파력이 강하긴 하지만 치명률이 높지 않기 때문에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개인적인 건강 수칙만 잘 지키면 된다”고 설명하는 전문가의 조언은 들리지 않는다. 공포 앞에 이성은 힘을 잃는다.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중국인 입국 차단론’과 각종 ‘뜬소문’이 횡행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3년 사스(급성호흡기증후군) 이후 ‘팬데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지나친 공포를 준다는 이유였다. 국제사회는 대신 ‘국제적 공중보건 위기’(PHEIC)로 지칭하기로 했다.
그런데 왜 한국 언론은 아직 ‘팬데믹’을 언급할까? 우리가 느끼는 공포가 2450년 전 그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일까?

‘411 2월25일은 국제사회에서 코로나19와 관련해 중요한 변곡점이다. 중국 밖(37개국)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신규 감염자 수(427명)가 중국 내에서 확인된 신규 확진자 수(411명)를 넘어섰다. 코로나19 사태가 촉발된 뒤 처음이었다. 지난해 12월 첫 환자가 발생한 뒤 급속도로 전파됐던 중국 내 감염은 확산세가 주춤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대로 중국 밖 국제사회에서 감염이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2월27일 오후 현재 중국을 제외한 48개국(한국 포함)에서 4085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중국발 비행기의 입국을 선제적으로 차단했지만, 2월27일까지 528명의 감염환자가 발생했다. 코로나19가 전세계에서 유행하면서 각국은 대응 방식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탈리아, 중국 왕래 차단했으나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인적·물적 교류가 많은 한국과 일본에선 지역사회 감염이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한국과 일본의 보건 당국은 감염경로를 차단하고 추가 감염을 막는 ‘봉쇄’ 전략이 아닌 감염환자를 빠르게 찾아 치료하는 ‘완화’ 전략을 채택했다. 7월 ‘도쿄 여름올림픽’ 개최를 앞둔 일본의 속내는 더욱 복잡하다. 추가 감염을 막으려면 적극적인 검사로 환자를 찾아야 하지만, 감염환자 수가 너무 많으면 올림픽 개최가 취소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일각에선 “일부러 환자 검사를 지연하고 있다”는 의심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유행하자, 유럽에서 가장 먼저 중국과 왕래를 차단한 것은 이탈리아였다. 1월31일 로마를 여행 중이던 중국인 관광객 2명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자 보건 당국은 바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정부 내부에서도 “지나친 조치”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중국을 오가는 비행편을 모두 취소했다.

그럼에도 북부 롬바르디아주에서 본격적인 지역사회 감염이 일어났다. 이탈리아인 A(38)씨는 1월21일 중국에서 돌아온 친구를 만났다. 일상생활을 하다 2월14일부터 몸상태가 좋지 않아 지역병원을 찾았지만 의료진은 독감약만 처방해 돌려보냈다. A씨는 상태가 악화해 이틀 뒤인 16일, 코도뇨 종합병원을 찾았으나 이때도 코로나19 검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A씨가 의료기관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의료진에게 코로나19를 전파했으나, 이때까지 보건 당국은 A씨의 감염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시간이 더 흘러 임신부인 A씨의 아내와 친구들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뒤에야 ‘다수 전파 환자’인 A씨의 존재를 파악하면서 이탈리아 방역망에 큰 구멍이 뚫렸다. 13일 만에 환자 528명과 사망자 14명이 발생한 이탈리아는 중국, 한국, 일본에 이어 가장 많은 확진환자가 나왔다.

이탈리아 보건 당국은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막았으나, 이미 늦은 조처였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확진자의 90%가 몰린 롬바르디아주와 베네토주에 주민 이동 제한 명령을 내렸지만 코로나19 감염자는 속출하고 있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잇따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이탈리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페인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 확진자가 나왔다.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제2의 코로나19 진원지’로 자리잡는 모양새다.

미국 내에서도 ‘대유행’ 긴장감

미국은 2월 초부터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2주 이내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 입국 금지라는 강수를 뒀다. 보수 진영에선 미국이 한국처럼 확진환자가 빠르게 늘지 않는 것을 언급하면서 “지금이라도 중국 전역에서 입국하는 중국인과 중국을 경유하는 외국인을 차단해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감염경로가 확인되지 않은 감염자가 나오면서 ‘지역사회 감염’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가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2월26일 발표를 정리해 보도한 내용을 보면, 캘리포니아주에서 감염경로를 파악할 수 없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이 환자는 코로나19 유행 국가를 방문한 적도 없고, 미 보건 당국이 파악하는 코로나19 감염자를 접촉한 적도 없다. 미국 내 ‘대유행’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감염경로가 파악되지 않은 29번째 환자가 2월16일 확진 판정을 받은 뒤 일주일 만에 감염환자가 600명으로 빠르게 늘었다. 이를 돌이켜보면 미국도 언제 지역사회 감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CDC 산하 국립면역호흡기질환센터 낸시 메소니에 국장은 “시간이 흐르면 미국에서 지역사회 감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날지가 문제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코로나19에 감염될지의 문제”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사회에서 코로나19의 위험은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며 안심시키기에 나섰지만 정치권의 반응은 냉랭하다. 의회에선 여야 모두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이 엉성하고, 정보 공개도 투명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지역사회 환자 빨리 찾아 치료해야”

세계보건기구(WHO)는 1월30일 이미 코로나19에 대해 최고 수준의 경보인 ‘국제적 공중보건 위기’(PHEIC)를 선포했다. 국제적인 범유행은 이미 시작됐다. 일부 언론에선 감염병의 국제적 유행을 ‘팬데믹’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하지만 그리스어 어원인 ‘판데모스’는 ‘모든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나친 공포감을 준다. 이 때문에 WHO는 2003년 사스(급성호흡기증후군) 이후 ‘팬데믹’이란 단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 ‘국제적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선 시기의 문제일 뿐 어느 나라에서나 대규모 확산이 일어날 수 있다.

감염병이 국경을 넘어 전세계에 유행하면 역설적으로 감염병 대응은 지역사회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기모란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학교 교수(대한예방의학회 코로나19 위원장)는 과 한 통화에서 “추가 확진자를 차단하기 위해 감염경로를 파악하는 것보다 지역사회에 있는 환자를 빨리 찾아 치료하는 게 중요하다”며 “젊거나 건강한 사람에게 코로나19는 크게 위험하지 않지만, 기저질환이 있는 고령 인구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도 2월25일 브리핑에서 “많은 국가의 입국자를 다 검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국내 감염 관리와 고위험군 관리 쪽으로 전환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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