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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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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사회 공황장애

입시→ 취업→ 직장생활→ 퇴직 생애주기마다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
공황장애는 ‘심약한 개인의 병’ 아닌 ‘불안사회의 질병’ 아닐까
등록 2020-02-15 16:11 수정 2020-05-03 04:29
어둡고 긴 터널 속을 걷는 한 사람의 모습. 연합뉴스

어둡고 긴 터널 속을 걷는 한 사람의 모습. 연합뉴스

“산 채로 땅에 묻히는 경험.” 주성완 서울 다나을한의원 원장이 공황(발작) 때 느낌을 표현한 말이다. 공황장애를 겪어본 적 없는 이조차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렬한 공포감이 와닿는다. 만성적인 불안이 일상적인 공포가 된 병, 절대 죽지 않는데 정말 죽을 것 같은 병, 공황장애다.
환자 본인은 죽을 것 같지만, 겉으론 멀쩡하니 ‘유난 떠는 사람’으로 비친다. 로셀리나(필명)의 부모도 처음엔 그랬다. 서른여덟이나 된 딸이 직장도 그만두고 집에만 누워 있자 아버지는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어머니는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여겼다. 로셀리나는 부모님께 조용히 복용 중인 약물의 처방전에 쓰인 ‘주의사항’을 내밀었다. 부모도 그제야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님’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허상의 공포’일지언정 살아서 죽음에 가닿는 ‘실재하는 감각’을 버텨내는, 그러나 ‘심약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를 분석해보니, 2015년 11만1109명이던 공황장애 환자 수가 2016년 12만7053명→2017년 14만4943명→2018년 16만8636명으로 3년간 51% 늘었다. 같은 기간 20대 환자는 101% 급증했다. 2019년 통계는 공식 집계 전인데, 상반기(1~6월)에만 13만771명에 이른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기록이 남지 않는 심리상담소나 한의원을 찾거나 진료받지 않은 환자를 포함하면 40만~60만 명에 이른다는 의료계 추산도 있다. 40년 전까지만 해도 공식 병명이 없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예인병’으로 취급되던 공황장애가 어느덧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일상의 질병’이 된 셈이다.
공황장애를 비롯한 신경정신과적 질환은 ‘개인적 취약성’을 탓하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사회적 원인이랄 수 있는 외부 요인은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결국은 개인이 관리해야 할 사적 영역으로 축소되곤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불안을 극도의 공포 상태로 이끄는 외부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최주연 강남 연정신과 원장은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 같은데 예측할 수 없을 때,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대처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상상의 나래를 펴며 극단적 공포에 빠져든다고 설명한다. 혹시 한국 사회의 어떤 특성이 그 예측 불가능성과 통제 불가능성을 높이고, 잠시의 불안으로 스쳐갈 상황을 극단적 공포로 내모는 건 아닐까? 이 의학적으로 설명되는 공황장애의 개인적 발병 원인 너머, 좀더 깊숙한 곳에 있을지 모를 ‘사회적 병인’을 들여다보려 한 이유다.
공황장애를 겪은 누구에게나 공황을 처음 만난 순간, 그 무렵의 힘든 이야기가 있다. 파편처럼 산만하던 그들의 구술을 한데 모으자 입시→ 취업→ 직장생활→ 퇴직이라는, 사회적 생애주기의 뼈대가 맞춰졌다. 각자의 고빗사위를 넘다가 불안에 걸려 넘어진 한국인들, 그러나 그들의 인생 지층 안에서 우리도 겪어본 어떤 살풍경의 흔적이 잘 보존된 화석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font size="2">*참고 문헌: (김태형, 위즈덤하우스, 2010) (김태형·양웅모, 세창출판사, 2014) (최주연, 시그마북스, 2017) (최주연, 소울메이트, 2016) (주성완·강수진, 매일경제신문사, 2016) (주성완, 가온해미디어, 2016)</font>
1월30일 밤 경기도 군포와 의정부, 서울 잠실 등으로 학생들을 실어나르는 학원 전세버스. 진명선 한겨레 미디어랩 기자

1월30일 밤 경기도 군포와 의정부, 서울 잠실 등으로 학생들을 실어나르는 학원 전세버스. 진명선 한겨레 미디어랩 기자

공황장애 발병 원인에 대한 가설을 훑어본다. 카테콜아민설(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 카테콜아민-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에피네프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생성 이상), 청반론(불안 중추에 해당하는 청반 이상), 대사론(피로할 때 쌓이는 젖산이 공황 유발), 이산화탄소 과호흡 왜곡된 질식알람이론(이산화탄소에 민감한 부분이 뇌에 존재), GABA-벤조디아제핀설(신경전달물질 GABA 이상에 항불안제 벤조디아제핀 처방), 유전설(부모 유전), 인지행동이론에 입각한 가설(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감정과 행동의 이상) 등 수많은 가설이 존재한다. 가설이 많다는 건 공황장애의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는 뜻이다(강남 연정신과 최주연 원장 참조).

여기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다섯 사람이 있다. 이 인터뷰한 다양한 공황장애 환자들 가운데 생애주기별 특징이 도드라지는 이들이다. 공황장애의 병인(病人)이라는 미지의 전문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에 앞서, 이들이 들려주는 개인사를 함께 따라가보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저마다의 취약함이 한국 사회의 날카로운 부조리와 맞닿는 어떤 지점이 포착된다. 마치 그곳에서 칼에 베인 속살처럼 공황장애가 터져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무리가 절벽에서 밀려날 때 끝에 있는 사람부터 바닥으로 떨어진다. 기후가 나빠지면 기관지가 약한 사람부터 아픈 것과 같다. 공황장애도 한국 사회에서 심리적·육체적·환경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한테서 먼저 시작되지만 결국은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이 1월17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말에 한 번쯤 귀 기울여 ‘심약한 개인의 병’ 공황장애를 ‘불안사회의 질병’으로 고쳐부르는 사회적 고민이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입시(入試)가 입신(立身·入神)인 나라에서</font></font>

“약학대학 입시는 합격률이 10%지만, 약사국시(약사국가시험)는 합격률이 90%니까요.”

약대생 이도윤(29)씨가 1월20일 인터뷰에서 ‘공황장애를 관리하는 비결’이라며 무심코 언급한 숫자는 10 대 90이었다. 2 대 8을 지나 1 대 9 사회로 진입한 한국 사회에서 그 숫자가 가리키는 바가 자못 상징적이다. 이씨는 약대 입시를 준비하며 ‘10% 안에 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고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약대 졸업과 약사국시를 준비해야 하는 지금은 ‘90% 안에만 들면 된다’는 안도감 덕인지 공황으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이씨는 홀어머니의 외아들이다. 어머니는 회사일과 집안일을 홀로 떠맡고도 교육열이 여느 부모 못지않았다. 아들의 고교 진학을 앞두고 서울 노원구 중계동 학원가인 은행사거리로 맹모삼천지교를 단행했다. 이씨는 교육열 높은 새 동네에서 전교 20등대 성적으로 고교생활을 시작했지만, 낯선 환경과 수험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버거웠다. 신경이 곤두섰고 위염으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이 잦았다. 정신력과 체력 싸움에서 고전하며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선 이씨는 모의고사 때 받아본 적 없는 최악의 수능 성적표를 받았다. “인생 최초로 엄청난 시련” 앞에서 재수가 최선으로 보였다. 그러나 끔찍한 고3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때 찾아낸 묘수가 약대였다. 되는대로 대학에 입학해 시간을 벌고, 2년 뒤 약대에 합격하면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선택지”가 될 것 같았다. 군복무 문제를 해결하고 홀가분하게 약대 입시에 전념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자원 입대를 했으나, 군에서 아킬레스건을 다치는 큰 사고가 있었다. “두 번째 시련”이었다. 곧바로 희망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에 비해 이미 뒤처진 기분이었는데… 제대 뒤 다리 수술과 회복으로 또 시간을 허비했다. “빨리 합격해서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었는데” 수술과 치료 과정 내내 또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빨리 독립하고 싶다” “엄마 고생 그만 시켜드리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해질수록 마음은 조급해졌다.

이씨에게 ‘신의 한 수’였던 약대 입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삼수’로 치달았다. 그때 찾아온 “세 번째 시련”이 공황장애였다. 극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첫 공황발작을 경험했다. “우주에서 숨을 쉬는데 산소통이 비어 있고 숨의 효율이 0인 것 같은 느낌”에 숨이 막혔다. “5분 뒤 난 죽어 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병명도 모른 채 한 달 넘게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응급실도 서너 번 더 실려갔다. 너무 불안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공황장애 판정을 받은 뒤엔 차라리 홀가분했다.

이씨는 약대 입학을 위해 20대에 또 ‘입시’를 겪었지만, 한국의 보통 입시생은 10대다. 10대 공황장애 환자는 2015년 2110명→ 2016년 2397명→ 2017년 2808명→ 2018년 3619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이씨가 개인사를 설명하면서 선택한 단어들, 가령 “외아들” “교육열”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선택지”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었는데” 같은 말들은 보통의 한국 학생들이 부모에게 갖는 사랑과 의무감, 죄책감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대입이라는 통과의례를 치르는 학생들이 공통분모처럼 가지고 있을 법한 정서다.

심리학에서는 현대인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부모 문제’를 꼽는다. 특히 한국에서 부모 문제는 입시라는 리트머스시험지를 통과하며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 자녀를 몰아넣고 사교육과 진로 간섭으로 채찍질하는 “부모가 문제”라는 지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김태형 소장은 “부모는 자녀에게 사회의 대리인이고, 부모 문제는 본질적으로 사회문제”라며 주류 심리학이 들여다보지 않는 ‘부모 문제 이면의 사회문제’를 지적했다.

“한국은 좋은 대학 못 나오고 돈을 못 벌면 존중받을 수 없다는 ‘존중 불안’이 큰 사회다. 부모들이 ‘내 자식이 무시당하면서 사는 건 못 본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부모도 너무 불안하니까,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냉대한다. 심리학에선 공부 잘해야 사랑받는 조건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조건부 사랑을 받는 아이들은 부모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유기공포를 떠안게 된다. 여기에 더해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실패하면 버려진다’는 2차적인 유기공포까지 갖게 돼 이중의 유기공포에 시달린다. 인생의 첫 시험대인 입시에서 실패하면 ‘인생이 끝장’이라는 두려움이 큰 이유다.”

베리타스 닷 패닉(29·필명)은 대학 때 첫 공황을 경험하고 구직 중 본격적인 공황장애를 겪었다. 하지만 ‘불안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입시와 관련해 좀더 적나라한 부모 문제와 맞닥뜨린다. 그는 서울에서 이른바 명문대로 평가받는 한 사립대에 편입했다. 엄마는 딸이 서울의 또 다른 유명 대학 문헌정보학과에 복수 합격했을 때 “거기는 ‘안전빵’(안전지원)이지 영어과가 아니라 축하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가 원하던 영문과에 합격하자 이번엔 “거긴 ‘스카이’가 아니”라고 시큰둥했다. 아버지는 밖에서 “딸이 연세대에 다닌다”고 거짓말하고 다니다 딸에게 들켰다. 베리타스는 “웃픈(웃기고 슬픈) 사실은 부모님이 두 분 다 고졸”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딸만큼은 나보다 더 잘살게 하고 싶다’는 부모님의 강렬한 열망이 투영된 과도한 교육열”이었다는 것이다.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고 싶었던 그는, 대학에서 줄곧 A+를 받고도 ‘과톱’(과 수석) 하는 친구에 대한 경쟁심 때문에 잠을 못 자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만족할 줄 몰랐고, 나를 그렇게 만든 부모님도 지금은 후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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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4"><font color="#008ABD">부모 사랑이 ‘성적조건부’인 나라에서</font></font>

백민주(29·가명)씨는 2018년 10월 극도의 무기력증을 겪다가 불현듯 “숨 쉬는 방법을 까먹은 것처럼” 호흡곤란을 느꼈다. 공황발작이라고 부르는 첫 공황이었다. 그 아득했던 순간의 연원을 특정해보려고, 그는 2014년부터 기억을 되짚었다.

백씨는 서울의 유명 대학 졸업생이다. 대학 내내 열심히 공부했다. 피디(PD)가 되고 싶었다. 될 줄 알았다. 처음엔 운이 좀 나빴다. 하필 입사 지원 첫해 지상파 방송사들이 잇따라 파업했다. 신입 피디 모집 공고가 뜨지 않았다. 그해를 통틀어 백씨가 지망한 피디 부문에 신입공채 자리는 “딱 세 개”였다. ‘실력이 부족한가?’ ‘꿈이 너무 컸나?’ 자성도 해봤다. 하지만 서류전형을 통과한 수백 명의 응시생 중 수십 명의 극소수만 통과하는 필기시험에 떨어진 적이 없다. 기자직으로 지원한 한 언론사 논술·작문 시험에서는 1등이었다. 한 남성 합격자는 겸연쩍게 “왜 네가 아니라 내가 붙었는지 나도 모르겠다”는 서글픈 위로를 건넸다.

그러고 나니 ‘2’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의심스러웠다. 백씨가 지망한 피디 부문 자리는 그해 “딱 세 개”로 줄기 전에도 으레 남자들 차지였다. 실력이 출중한 여성이 이 구멍을 뚫는 ‘사건’의 빈도가 높아지고는 있다. 하지만 백씨 같은 외모, 정확하게는 정체성을 가진 여성 지원자한테 그 미세한 틈이 허락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백씨는 퀴어(성소수자)다. 자기소개서에 굳이 정체성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여성 지원자 중 한 명으로 면접장에 들어갔다. 길어야 5분 안팎 경직된 상태에서 보여주는 첫인상으로 평가받는 면접 시간, 중년의 남성 면접관들에게 백씨는 “도무지 레이블링을 할 수 없는(규정할 수 없는)” 지원자였다. 백씨가 느끼기에 한국 사회에서 정상성에 편입하는 여성 지원자의 선택지가 몇 가지 있다. 백씨처럼 “머리가 짧고 머스마(사내아이) 같은데 말할 땐 섬세하고 까칠해 보이는” 여성 지원자는 선택지에 없다. 자신이 면접관에게 너무 헷갈리는, 솔직하게는 꺼려지는 이방인으로 비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취업시장에선 ‘마른 사람이 빠릿빠릿 일을 잘한다’는 편견이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가혹하게 작용한다. 백씨는 “뚱뚱한 여성이 방송사에 입사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백씨는 어느 방송사에 가나 “중년의 남성 면접관들이 당혹스러워하는” 지원자였다.

방송사에 다니는 친한 선배들은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하는 백씨에게 “머리라도, 단발로 길러보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머리 기르라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셀 수도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피디가 소원이라면, 까짓것 면접 때만이라도 제도권 문법에 몸을 욱여넣을 수 있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 있다. 백씨도 해보긴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고유함은 바꿀 수 없었다”고 했다. “머리를 기르고 화장하고 치마를 입는 것 같은 여성적인 이미지로 나를 ‘포장’했을 때, 스스로 너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는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불일치)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첫술에 배부를 욕심을 내려놓지 그랬느냐고 물을 수 있다. 외주 제작사 피디로 경력을 쌓아 방송사 피디가 되는 길 말이다. 그러나 “힘들게 노력하고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만큼 번듯한 정규직으로 입사해 ‘안정권’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나한테도 있었”고 “정치적 올바름이 중요한 내가 제도권 밖 ‘남자들의 험한 판’에서 온갖 불합리를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방송사 면접이 거듭될수록 불안한 가운데 선명해지는 슬픈 예감이 있었다. “피디는 올해 실패했지만 열심히 해서 내년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무렵, 대학 언론고시 준비반에서 밀려났다. 졸업한 지 2년 넘은 ‘장수생’에게는 가까스로 희망을 벼려볼 비좁은 책상 한 자리도 더는 허락되지 않았다. 백씨는 고립됐다. 생활 형태가 급속도로 무너졌다. 취업 준비 4년차에 접어든 2018년, 오후 3시까지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는 날이 늘었다. “숨 쉬는 방법을 까먹은 것 같은” 그날은 그렇게 찾아왔다.

1년 넘게 공황장애 치료를 받는 백씨는 “어떤 면에서는 많은 걸 포기했다”고 했다. “앞으로는 면접장에서 자기소개할 때 ‘저는 걸크러시입니다’라고 해야 할까봐요.” 자신을 규정할 사회적 언어가 없는 사회에서, ‘걸크러시’는 백씨가 노려볼 수 있는, 마지막 남은 한 자리인 것만 같아서다.

백씨의 아버지 역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때 공황장애를 겪었다. 미국 성인의 경우 공황장애 환자의 직계가족은 공황장애를 경험할 확률이 일반인보다 15~20% 높다는 통계가 있다. 그래도 10명 중 8명은 유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씨는 운 나쁘게 부계 유전 영향을 받은 10명 중 2명인 걸까? IMF 사태라는 국가적 공황 상황에서 공황장애를 개인의 취약성 탓으로만 돌리는 것이 국가의 책임 회피인 것처럼, 백씨 역시 그가 발 디딘 한국적 상황 때문에 사회구조적 질병의 피해자가 됐다고 보는 건 과도한 해석일까. 백씨는 말했다. “사회가 퀴어 차별을 안 하고, 여성 차별을 안 하고, 노력하고 능력 있는 만큼 살 수 있다면, 내가 발 딛고 선 지반이 안정적이면 왜 아프겠어요? 공황장애는 사회불안을 개인이 몸으로 체현하는, 완전한 사회적 질병이라고 생각해요.”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이 1월17일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이 1월17일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font size="4"><font color="#008ABD">나의 자리가 없는 나라에서</font></font>

‘한국의 취업 문제’로 보기엔, 백씨가 너무 특이한 사례일 수도 있지 않은가. 백씨는 반문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특히나 면접장에서, 개인의 다양성 자체를 인정 안 하는 사회잖아요. 청년실업 시대에 (피디 지망생이, 퀴어가 아니더라도) 여성이, 뚱뚱한 여성이, 고졸자가, 비스카이대 청년이 저 같은 일을 안 겪어봤을까요?”

백씨에 비하면 베리타스는 한국 사회에서 좀더 ‘정상 범주’에 편입된 여성이다. 베리타스는 학부생이던 2012년 처음 공황을 경험했다. 평소 예민하고 불안도가 높기는 했지만, 발표 수업을 앞둔 그날은 좀 이상했다. 뭔가 ‘팡’ 터지기 직전 ‘싸한 느낌’이 감돌았다. 발표 순서가 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난생처음 ‘화이트아웃’을 경험했다. 정신은 깨어 있는데, 눈앞이 새하얗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인 공황장애가 나타난 건 대학원생 때였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취업이 안 돼 대학원에 갔다. “내가 생산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공황이 심해졌다. 대학원에서 순수학문을 전공했는데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을 하는 나 자신이 싫고, 돈을 벌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고 했다.

대학원 졸업 뒤엔 교수가 추천해준 국가 프로젝트에서 일했다. 회의비 편법 사용 문제를 지적하다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일하면서 자존감이 높아져 대학원 때보다 불안도가 낮았고 공황도 잘 관리했다”고 했다. 취직이 안 될 땐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 공황장애에서 벗어나 몸과 정신이 온전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회사에 다니고 공황 증상이 호전되면서 “내 인생 망하지 않았네?”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공황장애 환자 수가 3년 만에 51% 급증한 가운데, 특히 20대 환자 증가세는 우려스러우리만치 가파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통계를 보면, 20대 공황장애 환자는 2015년 1만512명에서 2016년 1만3238명, 2017년 1만6580명, 2018년 2만1204명으로 3년 새 101% 늘었다.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청년층 실업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2018년 한국 전체 실업자 가운데 25~29살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1.6%였다. 한국의 15살 이상 인구 가운데 20대 후반이 차지하는 비중은 7.8%지만, 실업자는 5명 중 1명이 20대 후반인 셈이다.

최주연 원장은 1월9일 인터뷰에서 “불안과 스트레스, 체력 저하가 20대 공황장애 급증의 이유”라고 짚었다. “요즘 20대는 옛날에 비해 대학 가기도 힘들고, 대학 가서 취업하기도 힘들고,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것을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도 얻는 게 별로 없는 세대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태형 소장은 ‘취업 실패에 따른 공황장애’를 설명할 때 “인간이 굶어죽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건 ‘관계로부터의 배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입사경쟁에서 실패하면 일차적으로 ‘육체적 생명’에 대한 원초적인 위협을 받지만, 이차적으론 사회집단에서 배제되거나 사회적 가치를 상실할지 모른다는 ‘사회적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증폭된다”는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안전지대가 없는 나라에서</font></font>

김현도(45)씨는 2015년 본사가 큰 기대를 갖고 출범시킨 자회사로 파견됐다. 매출은 물론 회계·인사·총무까지 경영 부문을 총괄하는 팀장을 맡았다. 파견 직원이 두세 명인 작은 팀이었지만 기대 이상의 실적을 냈다. 그 공을 인정받았는지 경영대학원 사내 연수자로 선발됐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1년 만에 52학점을 이수하는 강행군이었다. 어문학 전공자인 김씨에게 빽빽한 통계 숫자도 큰 스트레스였다. 더욱 충격이었던 건, 한참 어린 동기들은 사회 경력이 자신보다 짧은데도 생각과 경험치가 저만치 앞서 있었다. ‘나는 뭐 하고 살았나’ 자괴감이 밀려왔다. 사려 깊은 동기들은 조별 프로젝트 때마다 ‘형’을 배려했다. 그는 배려에 감사하기보다 민폐를 미안해하는 성격이었다.

김씨의 모든 활동은 바로바로 ‘점수’가 됐다. 1년 내내 큰 심리적 압박 속에 교육과정을 마쳤다. 쉬고 싶었으나 쉴 새 없이 복직 날짜가 들이닥쳤다. 김씨가 학업에 집중하던 1년 사이, 업계 환경이 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연수 전 근무했던 자회사만은 피하고 싶었다. 얄궂게도 다시 그곳으로 발령이 났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전만큼 흑자를 내는 건 불가능한 구조였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만 스스로 “나와 다른 사람이 비교되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마음속은 온통 ‘회사가 연수도 보내줬는데… 더 잘해야 하는데…’ 부담감뿐이었다. 대학원에서 힘들게 배운 내용도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았다. 회사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줄일 수 있는 건 수면 시간뿐이었다. 하루 서너 시간씩 자면서 미련할 정도로 앞만 보고 뛰었다.

지난해 7월 초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조문을 가는 길이었다. 비행기 탑승 줄에서 평소와 달리 ‘탈까 말까 탈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마지막 승객으로 비행기에 올랐지만 “생각보다 작은” 내부를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식은땀과 현기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 문이 닫히면 내 숨도 멎겠구나…’ 비행기 문이 닫힐 찰나, 오로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급하게 승무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비행공포증이 생겼구나’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주일 뒤 아내와 아이를 차에 태우고 자동세차장에 갔다가 사달이 났다. 차가 자동세차기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패닉이 왔다. 옆에 가족이 없었다면 문을 열고 뛰쳐나갈 뻔했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아 동네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다. 3시간가량 검사를 마친 뒤 의사는 “자동세차장에서 물벼락 맞는 사람 많다”며 광장공포증을 동반한 공황장애 진단을 내렸다.

김씨 말처럼 그의 공황장애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고, 민폐 끼치는 걸 싫어하고, 남의 눈을 의식하고, 비교당하는 걸 두려워하는” 성격 탓일까? 공교롭게도 김씨 회사에서 공황장애는 예사로운 병이다. 공황장애 진단 전, 회사 동료들과 “육아휴직·연수휴직 다녀왔으니 이제 공황장애로 병가휴직만 가면 그랜드슬램”이라는 농담을 나눴을 정도다. 김씨뿐만 아니라, 자회사의 간부급 직원 3명 전원이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공황장애 환자 증가율은 20대가 가장 높지만, 절대적인 수는 매년 40대가 가장 많다. 심평원 국민관심질병통계를 보면, 40대 공황장애 환자는 2015년 3만194명에서 2018년 4만3328명으로 43% 늘었다. 김태형 소장은 “40대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가장 짐이 무겁고, 대인관계나 일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도 심하다”며 “일이 잘 안 풀릴 거라 예상할 때 심리적으로 확 무너져 공황장애가 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어려서 ‘공부 못하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심리를 갖게 된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일을 잘 못하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큰데, 이런 두려움이 결국 공황장애로 이어질 위험을 높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성완 다나을한의원 원장은 1월8일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현상 하나를 소개했다. “진료실 컴퓨터에 (공황장애 환자에게서 흔한) 발표공포증 차트가 뜨면 거의 예외 없이, 최소 90% 이상은 45~50살 남성 환자”라는 것이다. “비록 개인적인 가설이긴 하지만 40대 중반이 회사에서 샌드위치로 끼어 있는 고스트레스 연령대인데다, 남성호르몬이 저하되는 시기여서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체감하는 공포가 유달리 큰 것 같다”는 해석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은퇴하면 ‘퇴물’ 되는 나라에서</font></font>

박진명(59)씨는 2018년 12월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생활고까지 걱정할 정도의 형편은 아니어서 홀가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출근한 뒤, 혼자 노는 시간이 좋았던 건 딱 두 달이다. 그 후론 “산과 헬스장·수영장을 쳇바퀴 도는 일상”에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퇴직 3개월 뒤부터 “하는 일 없이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몸에 이상이 생긴 줄 알고 검진을 받았지만 오히려 건강했다. 얼마 뒤 다시 주저앉을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꼈다. 평소 이명이 있었던 그는 ‘뇌가 문제’라고 생각해 부랴부랴 MRI를 찍었다. 전혀 이상이 없었다.

여섯 군데 병원을 헤매다 찾은 한 내과에서 처음으로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이 뭐예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재밌는 게 없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권했다. 그렇게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서도 약 없이 4개월을 버텼다. 아내가 “정신과 약물은 끊지를 못한다”고 약 복용을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질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삶의 질이 아예 없어져” 약을 먹기 시작한 지 반년이 됐다.

박씨는 1월15일 인터뷰에서 “집에 혼자 있는 것도 힘들고, ‘가장’으로서 남자가 집에 있는 데서 오는 중압감이 컸던 것 같다”고 공황장애의 이유를 돌아봤다. 결국 아내가 다니는 작은 회사에서 소일거리를 찾은 뒤에야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벌이는 예전의 반도 안 되지만, 경제활동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돈을 떠나 정신적으로 위안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꼼꼼하고 내성적이고 안전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데, 나같이 예민한 성격은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팔자인가보다”라며 본인의 성격 문제를 곱씹었다.

심평원 통계를 보면, 60대 공황장애 환자는 2015년 1만4384명에서 2016년 1만6826명, 2017년 1만9076명, 2018년 2만1984명으로 3년간 52%가량 증가했다. 최주연 원장은 “수명이 많이 늘어 60대가 ‘노인 같지 않은 노인’인데 체력적인 저하가 있으니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고 했다. 또 “예전처럼 은퇴해서 자식 돌봄을 받으며 편하게 쉴 수 있는 세대도 아니고, 연금만으로 생활하기도 충분치 않기 때문에 은퇴 뒤 미래에 대해 불안감이 더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김태형 소장은 한국에서 은퇴 이후 가장 큰 문제를 ‘자기 가치 하락’이라고 본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이고, 현재 노인 세대는 자신의 가치를 돈 버는 능력으로 떠받쳐온 사람들인데 사회생활에서 물러나고 경제적으로 무능해지면 스스로 무가치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특히 “노인을 ‘퇴물’ 혹은 ‘짐’으로 취급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는 ‘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무가치감을 심화”한다. 한국 사회에 노인이 당당하게 낄 자리가 없는데 의학의 발달로 죽어지지도 않는 것, 그것이 노인 공황장애의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불안의 임계치 넘은 사회에서</font></font>

이제 다섯 사람이 들려준 공황장애 이야기는 끝났다. 이들의 발병 원인을 좇아 올라가다보면 여러 차례 ‘그랬더라면’ 싶은 고비가 나타난다. 한국 사회의 입시와 취업 ‘난’(難)이 ‘난’(亂) 수준이 아니었다면, 취직된 뒤라도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된다면, 실직해도 일상생활을 할 정도의 실업급여가 보장되고 재취업이 쉽다면, 퇴직해도 퇴직금과 연금을 충분히 받고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안정적인 노후가 보장된다면… 그랬더라면 백민주씨가 이도윤씨가 베리타스가 김현도씨가 박진명씨가 공황장애를 겪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다. 그랬더라면, 불안이라는 일상적 감정이 공포라는 망망대해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기 전 ‘사회안전망’이라는 그물에 먼저 걸렸을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

김태형 소장은 2010년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인의 마음에 대한 최초의 심리학 보고서’임을 표방한 에서 “한국인의 핵심 감정은 불안”이라고 진단했다. IMF 사태 이후 한국인들이 “두 가지 뼈저린 교훈”을 체득했는데, 하나는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냉혹한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경제의 미래가 너무나 불확실하다는 신념”이라고 했다. 책이 나온 지 10년이 흘렀다. “옛날얘기”라고 치부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김 소장은 “더 나빠졌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10년 사이 입시경쟁·취업경쟁·실직불안·노후불안 등 한국 사회의 불안도가 낮아졌다는 사회지표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2018년 기준 OECD 36개국 중 압도적인 1위인 자살률과 압도적으로 꼴찌인 출산율은 한국인들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는 강력한 지표로 보인다. 한국 사회가 “IMF라는 국가적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연대를 강화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대신,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길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았다”는 김 소장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급증하는 공황장애는, 그 위태로운 속도감을 견디지 못한 개인들이 ‘불안의 임계치’를 넘어선 한국 사회를 향해 보내는 경고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font color="#A6CA37">에필로그</font>


TV 뉴스를 보다가


생애주기의 변곡점에서 삐쭉 솟아오른 무한경쟁·각자도생·사회안전망이라는 거대 담론이 여전히 개인의 병인으로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소소한 일상의 한 국면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주성완 다나을한의원 원장은 집에서 뉴스를 보다가 세월호 참사 같은 큰 사건이나 유명인의 자살 소식이 전해지면 “바짝 긴장하고 출근한다”고 했다. 공황장애 등 불안장애 환자들이 ‘사회적 시그널’에 너무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뉴스가 있을 땐 “일주일 정도 확연하게 그 여파”를 느낀다. 불안장애 증상이 호전되다가도 뉴스 탓에 급격히 악화되는 환자가 굉장히 많다. 큰 사건·사고가 아니더라도 날씨가 흐리거나 미세먼지가 많거나, 혹은 경제가 어렵다거나 세금이 많이 오른다는 뉴스 하나에도 “불안하다”는 환자는 급증한다.
주 원장은 “스트레스를 계속 받으면 이완돼야 할 시기에 더 긴장하기 때문에 긴장을 야기하는 교감신경이 늘 흥분 상태에 놓이는데, 그 최종 목적지가 바로 불안장애”라고 설명했다. 그는 “불안장애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치열한 경쟁과 지속되는 경쟁 속에서 우리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보여준다”며 “우리는 지금 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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