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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를 넘어 기준을

부정적 여론이 컸던 비례대표, 후보자 선출 방식 제도화…

“어떤 명부를 만들 것인지 시민들에게 공표해야”
등록 2020-01-23 11:31 수정 2020-05-03 04:29
제19대 총선 뒤인 2012년 5월12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심상정 공동대표(가운데 앉은 이, 보라색 상의)와 유시민 공동대표(심 대표 바로 뒤), 조준호 공동대표(왼쪽 아래) 등이 당헌·당규 개정안을 처리하려다 당권파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제19대 총선 뒤인 2012년 5월12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심상정 공동대표(가운데 앉은 이, 보라색 상의)와 유시민 공동대표(심 대표 바로 뒤), 조준호 공동대표(왼쪽 아래) 등이 당헌·당규 개정안을 처리하려다 당권파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최근 인기를 끄는 SBS 드라마 는 프로야구팀이 시즌이 끝난 뒤 다음 시즌 개막 전까지 팀을 재정비하는 과정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프로야구단은 경기가 없는 겨울 동안 전력 보강을 위해 새로운 선수를 영입하고, 기존 선수들과 연봉을 협상한다. 4월 초 시즌 개막까지(올해 한국프로야구는 3월28일 개막) 팀 전력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강점을 극대화하는 데 힘을 쏟는다. 한정된 자원으로 최적의 팀을 구성하는 게 핵심이다. 구단이 선수와 ‘난로’(Stove)를 사이에 두고 연봉 협상을 하고, 팬들도 난롯가에 둘러앉아 구단과 선수 소식에 입씨름을 벌인다고 해서 ‘스토브리그’(Stove League)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회의원선거가 있는 해 겨울, 정당과 유권자의 모습도 스토브리그를 방불케 한다. 정당은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고, 기존에 보유한 전력을 재정비하며 4월에 치르는 선거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유권자는 정치권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자신이 가진 표를 어디에 던져야 할지 고민하고 주변과 입씨름을 벌이기도 한다.
4월15일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와 정당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달라진 선거 규칙으로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됐다. 유권자가 자신이 가진 2표(지역구 후보 투표 1표·비례대표 정당 투표 1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이전과 달리 국회 구성이 달라지고, 정치 지형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정당이 경쟁할 ‘리그1’(지역구 253석·비례대표 17석)과 상대적으로 작은 소수정당이 경쟁할 ‘리그2’(비례대표 30석·연동형 비례대표제 적용)는 유권자가 던지는 2표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거대정당과 군소정당은 각각 자신의 전력을 바탕으로 유권자 선택을 예상하며 선거 전략을 짜고 캠페인을 벌일 것이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의 변화는 국민의 삶을 좌우한다. 달라진 선거제도로 유권자와 정당은 어느 때보다 ‘뜨거운 겨울’을 보내게 됐다. 2표의 가치를, 2표의 ‘가성비’를 극대화하기 위한 스토브리그가 시작됐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올해 4월15일 치르는 제21대 국회의원선거부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다. 유권자의 의사를 의석수에 더욱 정확히 반영하고 소수정당의 의석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제도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출 방식만 바뀐 게 아니다. 각 정당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선거의 후보자(이하 비례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지난해 12월27일 국회를 통과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정당 내 비례후보 공천 방식을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2008년, 2012년 순번을 돈으로 매수하기도

개정 전 공직선거법은 정당이 비례후보를 뽑는 절차에 대해 자세히 규정하지 않았다. 여성을 절반 이상 추천하도록 한 조항과 “정당이 공직선거 후보자를 추천하는 때에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선언적인 문구뿐이었다. 그래서 비례후보 공천을 둘러싸고 공정성 시비와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2012년 제19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전문가·시민·당원 100명으로 이뤄진 국민공천배심원단(이하 배심원단)을 만들어 비례후보를 선발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구성된 배심원단은 32명뿐이었고, 전문가·시민·당원의 구분이 아닌 세대별 구분만 공표됐다. 새누리당(2012년 2월 당명 변경) 공천심사위원회는 배심원단이 심의하기도 전에 비례후보 명단을 언론에 발표했다. 새누리당은 2016년 제20대 총선 때도 배심원단을 엉터리로 운영해 당시 배심원단이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비민주적이고 독선적인 공천 작태를 규탄한다”며 기자회견을 열기에 이르렀다. 이런 파행 운영은 결국 계파 갈등의 불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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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비례후보 상위 순번을 돈으로 매수한 사례도 적지 않다.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로 당선한 양정례(비례 1순위)·김노식(비례 3순위) 의원, 창조한국당으로 당선한 이한정 의원(비례 2순위),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으로 당선한 김영주 의원(비례 2순위), 새누리당으로 당선한 현영희 의원(비례 23순위) 등이 공천 헌금을 냈다는 사실이 드러나 의원직을 잃었다.

심지어 비례후보 부정선거 의혹으로 당이 쪼개진 사례도 있다. 제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당원을 대상으로 비례후보를 뽑는 온라인·현장 투표를 했다. 전체 당원의 의견을 반영해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은 다른 정당에 없던 민주적인 제도였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지켜온 진보정당만의 특색이기도 했다. 하지만 총선이 끝난 직후, 현장 투표에 부정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당이 격랑에 휩싸였다. 폭력 사태까지 겪은 끝에 심상정·노회찬·유시민 등이 탈당해 진보정의당(현재 정의당)을 만들었다.

비례후보 공천 과정의 비민주성은 결국 비례대표제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한국갤럽은 2019년 5월21~23일 전국 만 19살 이상 남녀 1001명에게 선거제별 선호도를 묻는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비례대표를 없애고 지역구를 270석으로 조정하자는 자유한국당의 안에 찬성하는 사람이 60%, 반대하는 사람이 25%로 나타났다. 같은 여론조사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찬성하는 비율은 37%에 불과했다. 그만큼 비례대표제에 부정적 여론이 컸다.

민주당·정의당·민중당, 시민선거인단 모집

이런 불신을 해결하기 위해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비례후보 선발 절차를 제도화했다. 제47조 2항을 신설해 정당이 다음 조항들을 지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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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정당은 민주적 심사 절차를 거쳐 대의원·당원 등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의 민주적 투표 절차에 따라 추천할 후보자를 결정한다.
② 정당은 ①에 따른 비례후보 추천 절차의 구체적인 사항을 당헌·당규 및 그 밖의 내부 규약 등으로 정한다. 이 경우 정당은 선거일 전 1년까지 비례후보 추천 절차의 구체적인 사항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서면으로 제출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정당별로 후보자 추천 절차의 제출 여부와 내용을 홈페이지에 게시해야 한다.
③ 정당은 후보자 등록을 할 때 비례후보 추천 과정을 기록한 회의록 등 ①과 ②에 따라 후보자가 추천됐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후보자 명부에 첨부해야 한다.

또한 이 절차를 지키지 않았을 때 상당한 불이익을 주도록 해 강제성을 부여했다. 정당이 ③의 서류를 갖추지 않으면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등록을 받지 않도록 했고(제49조 8항), 정당이 ① 또는 ②를 위반하고 비례후보를 추천할 경우 후보자 등록을 모두 무효로 하도록 했다(제52조 4항). 당 지도부나 공천관리위원장이 당헌·당규를 어기고 비민주적으로 비례후보를 공천하던 관행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다만 제21대 총선에서는 비례후보 추천 절차 등을 후보자 등록 신청기간 개시일(3월26일) 전 10일까지 제출하도록 특례조항을 넣었다. 각 정당은 늦어도 3월16일까지 선거관리위원회에 관련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올해 총선을 앞두고 비례후보 공천 기준을 가장 먼저 발표한 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온라인으로 국민공천심사단을 모집해 비례후보에 투표하도록 하겠다고 2019년 11월21일 밝혔다. 국민공천심사단 중 100~150명은 숙의심사단으로 뽑아 1박2일 합숙하며 후보자들의 정견 발표를 듣고 질의응답을 거쳐 투표하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숙의심사단의 의사를 전체 결과에 반영하는 비중은 결정되지 않았다. 국민공천심사단이 뽑은 사람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최종 투표를 거쳐 비례후보로 확정될 예정이다.

정의당은 2019년 11월24일 개방형 경선제를 도입해 진성당원 70%, 일반 시민 30% 비율로 비례후보를 공천하겠다고 밝혔다. 당원 투표로 비례후보를 결정하던 방식을 처음으로 바꾼 것이다. 정의당은 1월31일까지 시민선거인단을 모집할 예정이다. 민중당도 당원뿐 아니라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민중공천제’로 비례후보를 뽑는다. 민중당은 2월13일까지 시민선거인단을 모집할 예정이다. 녹색당은 당원 투표로 비례후보를 결정한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대안신당, 새로운보수당, 민주평화당은 1월15일 현재까지 비례후보 공천 방식을 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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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 수와 비율 사전에 결정해야 갈등 최소화

한발 더 나아가, 절차를 넘어 내용 측면에서도 비례후보 공천 과정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2019년 10월24일 국회에서 열린 ‘비례대표 공천제도,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토론회에서 각 정당이 “자기 당의 이념적·정책적 정체성에 비춰 어떤 명부를 만들 것인지 원칙을 합의하고 시민들에게 공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례후보를 선발하는 기준에 대해 유권자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정한 정책의 우선순위에 따라 “명부에 오르는 정책 담당 후보자의 수나 비율을 사전에 결정해놓는 것이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안”이라고 서 연구원은 설명했다. 비례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된 뒤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공천 과정에서부터 정당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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