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이런 아쉬움을 단번에 해소해줄 특별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하나로 진행된 ‘신선 프로젝트’였다. 보호 종료 당사자 캠페이너인 신선(26)씨가 다른 당사자 9명을 직접 인터뷰하는 기획이었다. 신 캠페이너는 만 여덟 살부터 아동양육시설에서 살았고, ‘대학생 보호 연장’으로 스물셋에 자립했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한 신씨는 현재 아동자립 전문가를 목표로 또래 친구와 후배를 돕는 다양한 봉사와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보호 종료 당사자를 심층 인터뷰하고 당사자 처지에서 사회적 인식과 자립 지원 제도의 개선점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최적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씨는 “보육원을 떠나 2~3년을 혼자 고생하면서 자립을 배우지만 그 과정에서 경험한 고민과 상황이 서로 공유되지 않아 갓 자립한 후배들도 선배들이 경험했던 어려움을 그대로 반복한다”며 “이 악순환을 해결하려고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보호대상아동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작은 목소리 중 하나다. 수가 많지 않고 뭉치기도 쉽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주는 언론과 정치인이 많지 않고, 스스로를 대변할 기회가 주어진 적도 거의 없다. 아름다운재단은 첫 기부자인 김군자 할머니의 기금을 통해 2001년부터 지속적으로 보호가 종료된 이들의 자립을 지원해왔다. 캠페인을 기획한 김성식 아름다운재단 1%나눔팀장은 “자립 지원을 시작한 지 18년이 지났지만 보호대상아동과 보호가 종료된 청년들을 향한 사회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이고, 퇴소 이후의 삶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김 팀장은 “이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캠페인을 통해 이들이 ‘홀로 살아낸 동정의 대상이나 역경을 이겨낸 신데렐라가 아닌, 우리 주변에 있는 보통 청년’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씨는 지난 5개월간 우직하게 전국을 돌며 보호 종료 당사자들을 만났다. 또래와 수다를 떨듯 편안하게, 그러나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며 인터뷰를 진행했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지면을 통해 신씨와 친구들이 자립 과정에서 부닥친 어려움과 편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많이, 깊이 소개한다. 9명의 인터뷰를 정리해보니 여덟 가지 공통된 주제가 나타났고, 이 주제에 맞춰 인터뷰를 종합해 구성했다. 주제별로 맨 앞에는 인터뷰어인 신씨(‘나’)의 경험과 소회를, 그 아래는 인터뷰이 9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신씨는 “알려진 게 없어 독자들이 알지 못했던 보호 종료 뒤 ‘우리의 삶’을 부디 동정과 편견 없이,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font size="2">(※아동복지법 제3조 4호에서 ‘보호대상아동’이란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로부터 이탈된 아동, 또는 보호자가 아동을 학대하는 경우 등 보호자가 아동을 양육하기에 적당하지 아니하거나 양육할 능력이 없는 경우의 아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보호대상아동의 보호 조처는 입양, 가정위탁, 시설입소로 나뉜다. 가정위탁은 조부모나 친인척, 혹은 다른 가정에서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며 보호하는 것이다. 시설입소는 쉼터 등 일시보호시설, 아동양육시설, 장애아동시설, 그룹홈 등의 보호를 말한다.)</font></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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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008ABD">① 학기 초 불안했던 호구조사
</font><font color="#008ABD">“우리 반에 보육원 사는 친구 있나요?”
아이들의 손가락이 말없이 나(신선)를 가리켰다. 누군가에게는 두근거리는 새 학급 첫 출석 체크, 매년 돌아오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고아 딱지’를 다시 한번 새기는 치욕의 순간이었다. 내가 자란 아동양육시설(이하 시설) 근처, 초등학교라곤 딱 하나였다. 나와 시설 친구들은 모두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보육원’에 산다는 사실을 숨기는 건 여간해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을 지키려고 학창 시절 내내 홀로 전쟁을 치렀다. 누가 언제 ‘집’에 대해 물어볼지 몰라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누군가 부모님에 대해 물을 땐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했다. “아빠 엄마가 함께 개인사업을 하신다”고. 옛날에 아빠가 화장품 사업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으니, 아예 지어낸 얘기는 아니었다. “없어 보일까봐, 그러다 시설에 사는 걸 들킬까봐” 친구들이 매점에 갈 땐 나도 따라갔다.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은 이런 ‘품위유지비’로만 쓰였다. 아무리 애써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은 항상 존재했다. 나만 무료로 마시는 우유급식도, 방학식 때 나한테만 무료로 나눠주는 교재도, 시설에 사는 나에게는 피하고 싶은 선물이었다. 화룡점정 기초생활수급자 학생만 따로 불러내는 선생님의 ‘표적 호출’까지…. 힘겹게 쌓아올린 나의 노력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물거품이 되곤 했다. 사회 전반에 인권 감수성이 부족했던 1970~80년대 경험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내 나이 스물여섯, 2000년대에도 보호대상아동에게 세상은, 학교는, 교실은 그랬다.</font>
한창 민감한 사춘기엔 그저 ‘친구들과 다른 집’에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냥 서럽고 싫다. 김요셉(22)에게 학창 시절 12년 중 ‘단 하나의 장면’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일로 남았다. 다른 친구들은 시험장으로 마중 나온 부모님에게 “고생했다”고 격려를 받고 있었다. 친구들과 요셉은 ‘갈 길’이 달랐다. 친구들이 부모님과 저녁 외식을 하러 시험장을 떠날 때, 요셉은 쓸쓸한 마음으로 아르바이트 가게로 향했다.
손자영(23)은 “언제 시설에서 사는 아이라는 걸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고 학창 시절을 회상했다. 친구들이 알아챌까봐 귀가할 때는 주변을 한참 살핀 뒤 가까운 길을 놔두고 먼 길로 돌고 돌아 시설로 들어갔다. 보육원 친구들끼리 같은 도시락통을 쓴다는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도 자영은 잔뜩 예민해졌다. 도시락통을 꺼내놓는 게 불안해 차리리 굶어버릴 때가 많았다. 자영에게는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절실했다”고 했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아픈데,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는 아이의 여린 마음을 무신경하게 찌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유수빈(22·가명)도 나처럼 “학기 초 ‘부모님이랑 같이 살지 않는 학생’을 조사하는 순간이 가장 싫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학생 인권’ 차원에서 “엎드려서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감지 않는 친구들은 항상 있었다. ‘호구조사’가 끝나면 친구들은 수빈을 놀리고 무시했다. 수빈은 성인이 된 뒤에도 누군가 부모님에 대해 물으면 머릿속이 복잡해져 슬쩍 말을 돌리거나 자리를 피한다. 굳이 없는 부모님을 지어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모님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서다.
<font color="#008ABD">② 아무도 변호해주지 않는 편견
</font><font color="#008ABD">학창 시절부터 ‘우리’는 다름을, 그 다름이 초래한 편견을 경험했고, 참 일찍이도 사회를 알아버렸다. ‘보육원 아이’라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없던 학창 시절을 거친 우리, 사회에 나와서는 그 배경을 숨기기 위해 주로 ‘거짓말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얼마 전 극장에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다룬 한국 영화 을 봤다. 경찰도 조직폭력배 두목과 손잡아 겨우 잡을 정도의 극악무도한 살인범이 등장했다. 살인행위가 대담해질수록 그의 ‘배경’이 궁금해졌다. 영화가 끝나기 몇 분 전, 범죄행위의 원인이 짧게 소개됐다.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해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설명은 없었다. ‘보육원 출신이면 범죄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암시하고, 관객 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뿐 아니라 연극, 드라마에서 ‘보육원 출신 범죄자’는 흔하디흔한 클리셰(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 따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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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23)는 뮤지컬과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다. 직업 특성상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은혜는 “보육원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이들에게 미디어는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라고 본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시설·위탁가정 아이들의 삶이 오히려 편견을 조장하는 것 같아” 보고 나면 늘 속이 쓰리다. 꼭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부모 없는 아이들은 ‘조부모 손에 혹은 보육원에서 자라며, 지저분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사실이 아닌데도 기정사실인 양 고정적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특히 학교폭력을 다룬 드라마·영화·뮤지컬에서 너무 손쉽게 왕따 피해자를 ‘부모 없고 더럽고 냄새나는 이미지’로 묘사한다. 은혜는 “그런 사회적 인식 때문에 우리 같은 친구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고아라는 단어는 ‘외로운 아이’라는 뜻이다. 부모님이 ‘부모로서 삶’에 실패한 것이지 우리 삶이 실패한 것은 아닌데, 왜 우리가 ‘외로운 아이’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 편견까지 맞서 싸워야 하는지 억울할 뿐이다.
은혜는 조부모위탁가정에서 자랐다. 사실 “부모님 손에 키워지지 않았을 뿐 예의를 중시하시는 좋은 할아버지께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양친부모 슬하’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예절·인성·삶의 방식에 문제가 생기는 건 결코 아니다. 미디어에서는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듯 보호종료아동을 범죄자 이미지로 함부로 다룬다. 은혜는 “이런 이미지들이 조금씩 쌓여 사회적 인식을 만드는 것”이라며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사람들이 내 배경만 보고 부정적 이미지로 나를 단정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힘들고 외로울 때 곁에서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성격이 비뚤어지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은혜는 “그건 일반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했다. 집에서 자랐건 시설에서 자랐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유독 ‘고아’라는 특정 집단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 같아 억울하다.
홍문영(22)은 전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통해 그 ‘편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경험했다. 어느 날 남자친구가 예고도 없이 부모님과 문영의 만남을 주선했다. 남자친구 부모님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문영의 부모님과 고향을 물었다. 문영이 “부모님을 뵌 적이 없고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솔직하게 답하자, 다짜고짜 막장 드라마 분위기가 재현됐다.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아들을 따로 불러내 “헤어지라”고 압박했다. 그 사건 이후 문영은 부모님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굳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마트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세요.” 어른이 된 문영이 언제든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놓고 다니는 ‘모범답안’이다.
전현경 아름다운재단 연구사업팀 전문위원이 10월29일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토론회’에서 한 말이 널리 공유됐으면 한다. “(미디어에서) 여성을, (특정) 인종을 그렇게 표현했으면 벌써 난리가 났을 텐데, 국가 지원을 받는 원생들을 그렇게 함부로 묘사하는데 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느냐.”
<font color="#008ABD">③ 또래들은 하지만, 나는 못하는
</font><font color="#008ABD">“부모님은 뭐 하세요? 군대는 어디로 다녀왔어요? 어떻게 본적을 몰라요?”
보육원을 나온 뒤 첫 몇 년간 ‘이런 질문’을 마주하면 이른바 ‘멘붕’에 빠지곤 했다. 나에게는 당연한 질문이 아닌데, 대답 못하는 내가 너무 이상하다는 듯 몰아가는 상대방에게 뾰족이 대꾸할 말이 없었다. 보육원 안에서는 부끄러울 것도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를 관통하는, 부모가 함께 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원생들과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고, 내 이야기를 하고,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자립 후 만난 ‘보육원 밖’ 사람들은 너무 달랐다. 그들 대부분은 부모님이 계시고, 살면서 본 것과 들은 것이 나와는 전혀 달랐다. 서로 다른데, 그들은 나에게 적응할 필요가 없고 나는 늘 그들에게 적응해야만 했다. </font>
윤재근(28)은 보육원을 퇴소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사회에서 또래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고, 대화 주제에 끼지 못해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라고 했다. 재근은 시설 퇴소 뒤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20~30살 많은 어른들과 오로지 일만 하면서 살았다. 스펙을 쌓거나 여행을 가는 것 같은 흔한 ‘또래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면 “혹시 내가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게 아닐까? 실수하는 건 아닐까? 걱정부터 앞선다”고 했다. 유독 ‘경계심’이 강한 성격도 사회 적응을 더욱 어렵게 했다. 다섯 살에 보육원에 입소해 시설 형들과 학교 친구들에게 안팎으로 괴롭힘을 당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발달한, 갑옷 같기도 하고 가시 같기도 한 감각이다.
홍문영(22)은 초·중·고까지 갖춘 대형 보육원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살았다. 성인이 되어 취업을 하고 나서야 처음 세상에 나와 일반 가정에서 자란 또래 친구들을 만났다. 문영은 “특별한 내용이라곤 없는 흔한 20대의 수다일 뿐인데 전혀 공감이 안 되고 ‘나랑 다른 사람들 이야기’인 것 같아서 너무 무섭고 낯설었다”고 했다. ‘보육원을 나오면 모든 것이 다 잘될 줄 알았는데….’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문영은 늘 혼자다.
손자영(23)은 조기 취업으로 고3 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초, 일이 손에 익지 않아 크고 작은 실수가 많았다. 회사에서 ‘실수의 책임’을 물을 때마다 자영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저 아닌데요?” 일단 시치미를 뗐지만, 공정을 되짚어보면 결국 자영의 실수가 드러났다. 문제가 생기면 회사에서는 가장 먼저 자영을 찾았다. 자영은 ‘왜 나한테만 이러지? 부모가 없다고 무시하는 건가?’라는 생각에 상사의 질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자신의 행동은 “자기방어 기제”였던 것 같다. 자영은 “시설 퇴소 직후이기도 하고, 사회적 지지 체계도 없으니까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증폭된 시기였던 것 같다. 출근할 때나 샤워할 때 매일 거울을 보면서 ‘나는 강해져야 해’라고 외치곤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장 호적만 아버지인데</font></font>
<font color="#008ABD">④ 자립 지원까진 곳곳에 구멍
</font><font color="#008ABD">보육원에 살면서 간간이 만 18살 전에 중도 퇴소하는 친구와 선후배를 봤다. 원가정으로 복귀하거나 스스로 독립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시설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나간 경우다. 만 18살에 퇴소하면 자립정착금 500만원과 디딤씨앗통장(아동발달지원계좌·CDA, 후원자가 최대 4만원을 저축하면 정부에서 일대일로 매칭해 같은 금액만큼 저축해주는 자산형성 지원제도), 한국토지주택공사(LH)주거지원(이하 LH주택) 등 정부 지원을 받는다. 어쩐 일인지 더 어린 나이에 ‘탈시설’을 선택한 이른바 ‘중간보호종료자’에겐 자립정착금도 LH주택도 없었다. 한번 퇴소하면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조차 없다. 그들은 시설과 등지고 정부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됐고, 오갈 데 없는 처지에서 쉽게 범죄의 길로 들어섰다. 이런 친구들은 ‘나만 못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컸다.</font>
사실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자립 지원은 ‘사각지대’라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구멍’이 많다. 유수빈(22·가명)은 부모님이 이혼한 뒤 친조부모, 일명 ‘조부모위탁가정’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동네 밭일을 도와주고 받은 일당으로 수빈을 먹이고 입히고 대학까지 보냈다. 부모님에게는 정서적, 물질적으로 어떤 지원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호적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부채 600만원이 수빈에게 전가됐다. 수빈과 교류 없이 살며 월 500만원을 버는 ‘호적만 아버지’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지원 대상에서도 탈락했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생활비는 물론 학비·교복·급식비 등을 국가에서 지원받을 수 있다. 수빈 같은 상황에서 수급자가 되려면 부녀 간 교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증명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핏줄인데 법적으로 남이 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수빈을 꾸짖으며 서명을 거부했다. 대신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수빈에게 절박했던 이 약속마저 끝내 지키지 않았다.
기숙사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수빈은 기숙사에서 짐을 뺀 뒤 한동안 대학 도서관에서 살았다. 잠은 소파에서 잤고, 학교 샤워실에서 씻었다. 빨래는 기숙사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했다. ‘보호종료 5년 이내’면 지원받을 수 있는 LH주택도 ‘호적만 아버지의 소득’ 때문에 거절당했다. ‘2016 보호종결아동 자립실태 및 욕구조사’를 보면 보호종료 5년 이내 아동 중 LH주택 거주 비율은 33.9% 수준이다. 수빈은 최근 부양의무자 기준이 완화됐다는 기사를 읽고 다시 동사무소에 연락했다. 이번엔 “대학 휴학 중이라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이 어렵고, 복학하더라도 완화 대상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모든 걸 체념한 수빈은 “처음에는 자립 지원제도에 사각지대가 많은 현실이 원망스러웠지만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걸 욕심내고 화내면 뭐 하나’ 생각한다”고 자기 탓을 했다.
현행법상 보호종료아동이 대학에 진학하면 ‘15학점 이상 이수’ 조건으로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인정된다. 휴학하면 3개월까지만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을 수 있다. 스물두 해를 꼬박 치열하게 달려왔던 김요셉(22)은 4학년을 앞둔 상황에서 대학 휴학을 신청했다.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찌든 삶에서 잠깐 쉬어가고 싶었다. 잠시 학업을 내려놓고 장래희망인 국제간호사 준비를 하겠다는 목표도 있었다. 희망에 부풀어 휴학 처리를 다 마친 뒤에야 ‘수급비 중단’ 사실을 통보받았다. 요셉은 “휴학 뒤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하면서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수급비를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것만 못하더라”며 “국가 지원을 받는 대학생은 잠깐 쉬어갈 자격조차 없는 것이냐”며 야속함을 토로했다. 부모 지원을 받지 못하는 요셉에게는 휴학마저도 부려서는 안 되는 ‘사치’였던 셈이다.
<font color="#008ABD">⑤ 세상에 던져진 18살
</font><font color="#008ABD">요즘 자주 ‘자전거 배우기’를 떠올려본다. 처음에는 보조바퀴에 의지해 자전거를 탄다. 누군가(주로 부모님이) 뒤에서 밀어주고, 넘어지려 할 때 잡아주면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진다. 보조바퀴를 떼고, 뒤에서 잡아주는 손과 서서히 멀어지면서 마침내 혼자서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다. 보호종료아동의 자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만 18살 이전 거의 ‘평생’을 학교와 시설이라는 울타리 안에 속해 있던 ‘요보호아동’들이다. 태어난 지 6570일(365×18)이 됐다고 하루아침에 “혼자 살라”고 등 떠미는 건,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아이에게 “자전거 사줬으니 결승점까지 혼자 가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에겐, 우리에겐 조금씩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보조’해주는 사람과 제도가 필요하다.</font>
손지원(24)은 LH주택 지원으로 구한 첫 집이 “너무 끔찍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보육원을 퇴소하니 딱히 조언을 구할 사람도 없고, 바쁜 세상에 주변에 꼬치꼬치 캐묻기도 미안했다. 집 구할 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부동산 사장님’ 말만 철석같이 믿고 계약을 해버렸다. 꿈의 보금자리는 한 달 만에 난장판이 됐다. 물이 새 곰팡이가 피고, 벌레가 너무 많아 친구 집으로 대피해야 할 정도였다. 지원은 “곰팡이를 제거하려고 락스를 너무 많이 써서 곰팡이도 죽고 저도 죽을 뻔했다”고 말했다. ‘덥석 계약한’ 대가를 2년간 톡톡히 치른 덕에 지원은 이제 ‘살 만한 집’을 구하는 비법을 알게 됐지만, 이사는 여전히 고역이다. 그는 “제한된 지원금 안에서 집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아, 두 번째 집으로 이사 갈 때는 서울 끝에서 끝으로 가게 됐다”며 “이사 업체를 부르기엔 예산이 부담이고,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딱히 없어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로 왕복 다섯 번을 오갔다”고 말했다.
전형범(21)은 2년제 대학 졸업 후 시설을 퇴소한 지 이제 1년이다. 자립정착금 500만원, 디딤씨앗통장 700만원을 합해 1200만원을 손에 쥐고 나왔다. 디딤씨앗통장은 대학 입학금을 내려고 깼다가 남은 돈마저 금세 다 써버렸다. 스무 살에 처음으로 ‘큰돈’이 생기니 쓰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육원에서는 용돈이라고 해봐야 한 달 3만원이 전부였다. 백반 1인분이 7천~8천원인 요즘 3만원은 ‘관리’라고 할 것도 없는 금액이다. 용돈 관리라기보단 그냥 무조건 참는 법을 배운 셈이다. 만 18살까지 소비를 극도로 통제하다가 갑자기 큰돈을 쥐고 나니 눈이 뒤집혔다. 형범은 “저축하는 법도 몰랐고, 저축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들 난생처음 큰돈을 만져보는데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지금은 월급으로 200만원을 받는데, 저축이나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한 달을 200만원으로 버틴다’고 생각하며 쓴다”고 말했다.
정부가 만 18살 보호종료자에게 LH주택 자금과 자립정착금 등을 지원해주는 것은 꼭 필요하고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지원과 형범의 경험을 보면, 예산 지원에만 초점을 맞춘 정부의 자립 지원 개념 자체가 바뀌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산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보호종료아동의 자립 이후 삶을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관리해주는 지원 체계가 절실하다. 지금도 시설마다 자립전담관이 있지만 1인당 많게는 30~40명을 ‘케어’(돌봄)하면서 시설 행정 업무까지 맡아야 한다. 어렵게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도 공부 습관이 잡히지 않은데다 당장 자립 교육이 절박하지 않은 아이들은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올해 처음 자립지원통합서비스(보건복지부와 LH의 협업)가 시행돼 주거 지원과 함께 개별 맞춤형 사례 관리사 지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사회에 나와 시설과도 연락이 끊긴 보호종료아동도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전문 지원 체계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font color="#008ABD">⑥ 연고자 없어 행려병자와 묻힌 내 친구
</font><font color="#008ABD">‘부모님이 없는 게 별거냐’ 호기로 사회에 나왔지만 ‘우리의 다름’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가정 행사’인 관혼상제 때 특히 그렇다. 나는 20대 중반이 돼서야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결혼식을 직접 가볼 기회가 생겼다. 보육원에 살면서 가족·친척의 결혼식에 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객으로 가서 보는 것도 이렇게 낯선데, 부모형제의 도움 없이 혼자 식을 치러야 하는 시설 자립생은 오죽할까. 남들은 마음껏 웃고 우는 관혼상제라지만 우리에겐 맘껏 웃지도 맘껏 슬퍼할 수도 없는 고된 통과의례다.</font>
한 대기업 장학생 모임에서 만난 친구 허진이(24)의 결혼식에서도 나는 ‘우리의 다름’을 생각했다. 결혼을 앞둔 시설 자립생들은 보통 양가 상견례나 혼수 등 ‘배우자 가족 예우’ 절차로 고민한다. ‘혼주석 채우기’도 빼놓을 수 없는 걱정거리인데, 시설 원장님이나 선생님을 앉혔다가 ‘성’이 달라 설명하기 난감한 상황에 처하는 일도 흔하다. 같은 시설 선배와 결혼한 진이는 다행히 ‘시가 고민’을 건너뛸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후원자 부부가 혼주석에 앉아주기로 해 또 다른 큰 걱정도 덜었다. 예식장 예약, ‘스드메’(스튜디오 촬영+드레스+메이크업) 준비 역시 아무런 문제 없이 착착 진행됐다. 진이는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혼주 한복 준비부터 지방 결혼식 차량 준비, 멀리서 온 하객의 숙소 예약까지 보고 들은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준비 절차가 뒤늦게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진이는 결혼 준비 과정에서 “곁에서 코치해주는 가족·친지가 없는 어려움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진이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혼자 유목민처럼 살았는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생겨 좋다”니, 결혼식은 ‘행복한 고민’이었던 셈이다.
법적으로 ‘무연고자’로 분류되는 ‘고아’들의 장례식은 슬픔보다 차라리 분노에 가깝다. 진이는 보육원 자립 1년 만에 함께 퇴소한 친구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을 당했다. 먼저 간 친구는 중환자실로 들어오면서 입원 절차상 필요한 탓에 시설 선생님이 보호자 등록을 해야 했다. 다행히도 지자체 담당자가 보호자를 연고자로 인정해줘서 장례식을 치르고 주검을 화장해 납골당에 봉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숨진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된 다른 친구는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로 죽어서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주검 안치실에 방치됐다. 시설에서는 후배 원생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 입원 절차가 필요 없는 이 친구에겐 보호자 등록을 해주지 않았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설 동기 40여 명이 “19년 동안 함께 생활한 우리가 가족인데 도대체 어떤 가족이 와야 주검을 내줄 수 있느냐”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진이와 친구들은 법적으로 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무력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경험 많은 보육원 선배들이 찾아와 병원 쪽을 설득한 뒤에야 가까스로 빈소를 빌려 조문객을 받을 수 있었다. 동기들이 온몸으로 상을 치르고도 장례 비용을 1천만원이나 지급했지만, 화장과 봉안 등 정작 죽은 친구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장례’는 치르지 못했다. 끝내 화장을 허락받지 못한 친구의 주검은 무연고 행려병자들과 함께 ‘분류 번호’만 표기된 비석 아래 누웠다. 진이에게는 친구가 이름도 없이 묻힌 그곳이 마치 “버려진 땅”처럼 느껴졌다.
현행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은 “장사를 치를 수 있는 권리와 의무는 ‘연고자’에게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적으로 혈연관계나 부부관계, 혹은 ‘사망 전 치료·보호·관리하고 있던 행정기관 또는 치료·보호기관의 장’이 아니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뜻이다. 박진옥 나눔과나눔 상임이사는 10월30일 과 한 전화 통화에서 “지자체에 따라 장사법 제2조 16항의 아목에 규정된 ‘시신이나 유골을 사실상 관리하는 자’를 담당자 재량으로 연고자로 판단해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시설 자립생은 연고자 인정을 받지 못해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된다”고 설명했다. 진이의 두 번째 친구가 숨진 지자체에서는 그런 ‘적극적 판단’을 해주지 않은 셈이다. 진이는 “부모님이 없다고 뭐 이렇게 안 되는 게 많은 건지 정말 비참하고 화가 났다”고 했다.
자립 지원 체계가 ‘표준화’돼 있지 않아 어느 지역 어떤 시설에서 자립했느냐에 따라 지원이 달라지는 것처럼, 어느 지역에서 죽었느냐에 따라 ‘주검 처리’마저 달라지는 차별적이고 모멸적인 현실이 ‘우리’의 인생이다. 자립 지원을 잘해주는 지자체를 찾아 이사를 가기도 하는 것처럼, 지인을 연고자로 인정해주는 지자체로 ‘죽을 자리’마저 찾아봐야 한다는 것일까. ‘자립해서 살다가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삶의 의지를 내려놓은 건데 마지막 가는 길도 이렇게 비참하구나’ ‘우리는 이런 삶, 이런 결말을 가지고 태어났구나’라는 서글픈 현실을, 진이는 새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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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008ABD">⑦ “엄마 없는 거 흠 아냐, 기죽지 마”
</font><font color="#008ABD">내 배경으로 나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배경만으로 나를 손쉽게 평가한다. 그때마다 “나에게도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 큰소리로 말하고 싶어진다. 나는 주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시설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보통의 시설이라면 “버스 타고 오라”고 할 법도 한데, 담당 선생님과 원장님은 3년 내내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11시에 나를 태우러 학교까지 오셨다. 대학 친구들은 난생처음 나를 편하게 대해준 ‘시설 밖 친구’였다. ‘고백’ 2주 전부터 벼르고 벼른 어느 날, 술을 진탕 마시고 친구들에게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말해버렸다. 친구들은 무덤덤하게 내 얘기를 듣는 듯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친구들은 내 생일이면 어김없이 “같이 놀자”며 말없이 곁을 지켜준다. 학교 밖 인문학 수업에서 만난 친구들은 스스로 소심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성격을 “센스 있다”고 추어올렸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 존재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font>
허진이(24)는 자립정착금을 다 쓰고 기숙사 입실마저 탈락해 방황하던 때 기적처럼 ‘후원자님’을 만났다. 개인사업을 하면서 후배 지원에 꾸준히 힘을 쏟고 있던 ‘시설 선배’였다. 진이는 지하철에서 만난 후원자의 도움으로 주거 고민을 해결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진이 너도 그런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지금 주는 나의 마음을 충분히 다 받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진심이 묻어나는 말과 따뜻한 관심은 처음이었다. 후원자의 말과 조건 없는 도움은 진이를 울렸고, 항상 결핍감에 시달렸던 진이를 사랑으로 충만케 했다.
홍문영(22)은 가족에 대해 캐묻는 어른들이 싫었다. 싫어서, 귀찮아서 부모님에 대해 거짓말을 지어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이모’한테만은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유독 나를 좋아해주고, 진심으로 대해준다는 게 느껴지는 이모님께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이모에게 “나 엄마 없다”고,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털어놓았다. 이모는 예상한 대로 문영을 응원했다. “괜찮아, 엄마 없는 게 흠이 아니니까 기죽지 마라.” 이모의 응원은 이후 문영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문영은 자격증 시험을 보러 갈 때마다, 부모님이 시험장까지 태워다주는 지원자들이 부러웠다. 지금은 “너는 잘할 거야. 널 믿는다”는 이모의 얘기로 힘을 얻는다. 진이는 “절 믿어주는 이모님을 위해서라도 빨리 합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여성인권중앙지원센터의 의 한 대목이다. “쉼터 청소년 자립에 대한 질적 연구물들을 보면, 등장한 사례의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함께 살 사람, 대화할 사람, 정서적 관계를 맺을 사람을 필요로 하며 자립에 있어서도 고립되는 것이나 물어보고 상의할 사람이 없는 것을 가장 걱정하는 것, 힘든 것으로 꼽는다. 곰곰이 ‘사람이 굉장한 자원’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안정적인 관계망 속에서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을수록 자립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 수 있다.”
<font color="#008ABD">⑧ 자립을 넘어 꿈으로
</font><font color="#008ABD">나는 만 8살에 시설에 들어갔다. 선생님 한 분이 열댓 명 아이들을 돌보는 그곳에서 ‘예쁨’을 받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부’였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예쁨 받고 싶다는 생각에 공부만 했다. 그렇게 나는 보육원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아이, 다시 말해 가장 예쁨 받는 아이가 되었다. 잠시 전학과 자퇴를 고민할 정도로 ‘삐끗’한 적이 있었지만 선생님과 원장님이 나를 붙들어주셨고, 수능까지 잘 버텨냈다. 그러나 ‘자유’가 주어진 대학에서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됐다. 국어 교사가 되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 틈에서 나는 홀로 ‘대학을 왜 다니나’ 회의에 빠졌다. 학사 경고를 받을 정도로 수업 출석을 안 했고, 각종 국제영화제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남들은 “자원봉사가 무슨 방황”이냐며 웃지만 나는 자못 심각했다.
시설 선배들은 고교를 졸업하면 당장 돈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에 급급했다. 꿈이라는 것을 꿀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시설에서 퇴소한 선배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눈앞에 보이는 몇 안 되는 선택지 안에서 진로를 결정했다. 나 역시 시설에서 보고 들은 직업의 개수가 열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한다. 공장 취업, 요리사,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정도가 내가 시설에서 보고 들은 전부였다. 한 대기업에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연사 특강 인문학 수업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됐고, 다른 시설에서 온 아이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자립을 앞두고 집 구하는 걸 어려워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미 시행착오를 겪은 나는 어렵지 않게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 ‘아무 쓸모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나’의 경험뿐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후배들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개인 블로그에 글을 쓰고 서포터스로 활동하다가 아름다운재단의 ‘열여덟 어른’ 캠페인에 참여하게 됐다. 지금은 아동양육시설 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멘토와 멘티를 연결해주는 아동자립 전문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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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근(28)은 보육원을 나와 딱 ‘공장 부품’처럼 일했다. 공장 과장도 재근이 보육원 퇴소생인 걸 알고 있었다. 과장은 “너는 설에 갈 곳도 없으니까 일이나 하라”는 막말을 했다. 참았던 설움이 북받친 재근은 ‘사람대접’ 안 해주는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지난 추석, 재근은 같은 시설 선배인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가 주최한 ‘가족 모임’에 참석했다. 김 대표는 보호종료아동에게 일자리를 지원하는 사회사업가가 됐고, 명절마다 자립생들을 모아 음식을 만들고 나눠먹는 행사를 열고 있다. 재근은 행사 참석 이후 시설 자립생을 우대하는 브라더스키퍼에 취직했다. 재근처럼 시설에서 자란 김 대표와 동료들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꿈이 생겼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가정, 그곳에서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재근의 새로운 목표다.
홍문영(22)이 자란 시설에는 거부하기 힘든 ‘방침’이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면 빨리 취업해서 돈이라도 모으라’는 것이었다. 공부 이외에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고, 공부를 못했던 문영과 시설 친구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공장으로 갔다. 몸이 약한 문영은 공장의 근무환경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툭하면 응급실로 실려갔다. 자립 뒤 4년을 하루하루 버티는 마음으로 살던 중 시설 동기를 통해 국비지원사업이라는 걸 접하게 됐다. 뒤늦게 미용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건강도 회복되고 있다. 문영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니까 ‘지금까지 왜 나에게 맞지 않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나’ 싶다”며 “후배들을 만나면 나처럼 불행한 시간을 겪지 않도록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형범(21)은 옷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보육원에 살 때는 용돈이 적어 초저예산으로 옷을 사야만 했다. 용돈을 모으고 모아 큰맘 먹고 옷을 사더라도 단박에 ‘좋은 옷’을 알아보는 형들에게 빼앗기기 일쑤였다.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옷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한창 먹고 마시고 놀 나이지만 지출 목록 대부분이 의류였다. 큰 키와 옷에 대한 관심을 살려 모델학과에도 지원했다. 하지만 지원해주는 부모도 없이 무작정 꿈만 좇기엔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컸다.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면 지레 겁부터 올라왔다. 결국 형범은 자립정착금에서 매달 빠져나가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꿈을 내려둔 채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했다. 생계유지를 위해 샌드위치가게 직원으로 몸이 묶여 있지만, 마음은 늘 ‘옷’을 향해 있다. 형범은 “최근 자립수당(보호종료 2년 이내의 아동에게 지난 4월부터 매달 30만원 수당 지급)을 받으면서 생활비에 여유가 생겨 재봉틀을 살 계획을 세웠다”며 “언젠가는 직접 만든 옷을 사람들에게 입혀주고 싶고, 세상에 단 한 벌밖에 없는 유일한 옷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손자영(23)은 먼저 퇴소한 선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인이 숨졌다는 사실만큼이나 시설 선생님의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오랜 세월 한솥밥을 먹던 사람이 세상을 등졌는데, 선생님은 개인의 성실성 문제와 성격 결함으로 치부해버렸다.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도움을 요청할 곳은 없었는지’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자영의 생각은 선생님과 달랐다. 벼랑 끝에 몰려 선택한 비극이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설의 부적절한 양육 방식 그리고 퇴소 뒤 방치된 삶과 연결되는 ‘아동복지 구조’의 문제였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이 만 18살이 되면 또다시 시설 밖으로 버려지는 ‘보호종료아동 처우 문제’에 대해 누군가는 개선의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됐다. 자영은 그길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스스로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지금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꿈은 만 18살이 됐다고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시설에서 나오기 전 ‘단기 교육’이 아니라, 아동기 시절부터 스스로 선택하며 실패와 성취를 맛볼 수 있는 ‘자기주도적 자립 교육’이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시설에 사는 아이들이 시설 밖 다양한 삶의 모습을 알아갈 수 있도록 교육·체험 프로그램도 늘려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보호종료아동이 ‘건강한 의존’을 하며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든든한 사회적 관계망’을 세워주는 지지 체계가 절실하다.
<font color="#008ABD">인터뷰·글</font> 신선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 캠페이너 tlstjs1023@naver.com
<font color="#008ABD">정리</font>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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