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3일 오후 4시께 세종~포천 고속도로 가운데 경기도 광주를 통과하는 안성~구리 구간 제10공구 공사장. 산 밑을 뚫어 터널을 만드는 작업이 막바지였다. 한낮이었지만 터널 안은 어두웠고 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터널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 테두리에 밝고 선명한 파란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를 빼면 전체 노동자의 30∼40%에 이르는 고령 노동자의 시력을 고려해 작업환경을 개선한 조처였다.
터널 속 색색깔 LED 조명, 이중 위험 경보기터널 깊숙이 들어가자 LED 조명이 색깔별로 설치돼 있었다. 질식 사고와 유해가스 중독 사고를 막기 위해 터널 안 복합가스 농도를 실시간 측정해 모바일, 전광 게시판 등에 표시하는 측정기 테두리에는 노란색 LED 조명이, 작업차 뒤에는 흰색 LED 조명이 있었다. 잠시 뒤 화물차가 터널 안 모퉁이를 돌자 빨간 표시등과 비상벨이 동시에 작동했다. 이중 위험 경보기를 보고 들은 고령 노동자들은 화물차를 피해 작업을 다시 이어갔다.
한화건설이 2016년 11월 착공한 안성~구리 구간 제10공구는 지난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선정한 ‘고령 노동자 친화적 작업환경 우수 사례’로 꼽혔다. 지금까지 안전사고가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기 기억력이 감퇴한 고령 노동자를 고려해 지시 문구나 표지판을 제작할 때는 ‘위험 경보기’처럼 간결하고 단순한 문구를 큰 글씨로 써서 붙였다. 표지판을 설치하기 어려운 장소에는 공사장 중 처음으로 범죄 예상 구역이나 홍보 구역에 주로 쓰는 로고 라이트 조명을 접목했다.
이 공사장에서 지난해부터 일한 유승철(55)씨는 인터뷰에서 “공사판에서 그나마 젊은 동료들이 40대다. 70살 넘은 동료도 있었다. 일이 고되니까 젊은 사람이 꺼린다. 대신 생활비나 용돈을 벌러 온 나이 든 사람이 많다. 보건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 혈압을 재러 온다. 처음에는 혈압이 높으면 일을 안 시킬까봐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꾸준히 건강관리를 받으니까 늙어서도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실제 유씨의 말처럼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서 ‘고령자’로 정의한 55살 이상 노동자들은 주로 건설업, 기계 기구·비금속 광물 제품·금속제품 제조업 또는 가공업, 건물 등의 종합관리사업, 도·소매와 소비자용품 수리업, 보건과 사회복지사업 등에서 일한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신체·인지 능력이 떨어지면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쉽게 넘어지고, 떨어지고, 끼이는 산업재해를 입기 쉽다. 게다가 한번 다치면 회복이 더뎌 젊은 노동자보다 긴 시간 병가를 내거나 치료 시기를 놓쳐 병이 재발하거나 만성화를 겪기도 한다.
안전보건공단이 지난 3년간(2015∼2017년) 집계한 50살 이상 장년 노동자의 재해 형태 현황을 살펴보면, 넘어짐 21.8%, 떨어짐 18.6%, 끼임 11.8%, 절단·베임·찔림 8.5%, 물체에 맞음 8.1%, 부딪힘 7.3% 등으로 나타났다(표 참조). 나이와 상관없이 같은 기간 전체 노동자의 넘어짐(17.7%), 떨어짐(15.9%) 등과 비교해 고령 노동자가 넘어지고 떨어지는 비율이 더 높았다.
이 결과를 종합하면 나이 들어 다리 근력과 시력, 평형감각이 낮아진 노동자일수록 일하다가 쉽게 넘어지거나 미끄러지고, 떨어졌다. 또 근육이 약해지고 관절이 뻣뻣할수록 긴 시간 무리한 자세로 일하거나 물건을 들고 움직일 때 골절 등 근골격계 질환이 잦았다. 젊은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더라도 쉽게 다치고 병드는 고령 노동자의 특성을 고려해 노동환경 개선이 시급하다.
2006년 65살 이상 인구가 20%에 이른 초고령사회가 된 일본은 이미 2007년 고령 노동자 친화적인 직장 개선 매뉴얼인 을 발간했다. (도쿄 노동국, 2009) 등 교육 자료를 통해 신체 기능이 떨어진 고령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입지 않도록 문턱 제거, 난간 설치, 조명 확보 등 예방 조처를 교육했다. 이 밖에 건설 현장 등에서 노동자가 작업 전 스스로 건강 상태를 점검해 기저질환이 있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상태로 일하지 않게 했다.
미국은 아예 ‘생산적인 고령화와 일을 위한 국가센터’(NCPAW)를 새로 설치해 국가적 차원에서 고령 노동자의 특성을 고려한 직종별 가이드라인과 교육 자료를 발간했다. 유럽연합(EU) 산업안전보건청(OSHA)은 노동력의 고령화에 대비한 고령 친화적인 작업환경 조성과 작업 관리를 제시했다. 심한 육체노동과 교대제 근무, 온열·한랭과 소음 작업을 할 때 업무 순환, 빈번한 짧은 휴식, 교대근무 개선, 적절한 조도와 소음 관리 등을 고려하게 했다. 특히 작업 복귀 정책을 통해 긴 시간 병가 후 고령 노동자가 작업에 순조롭게 복귀할 수 있게 지원했다.
2026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예정인 한국에서도 고령 노동자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안전보건공단은 2016년 고령 노동자가 적어도 1만8천 명 이상 일하고, 직업적 유해 위험도가 높은 15개 직종을 선정해 직종별 고령 친화적인 작업환경 기준을 만들었다. 다만 사업자에게 구체적인 조치 의무를 부과하지는 않았다. 환경미화원, 아파트 단지 경비원, 버스·택시 운전원, 주방보조, 요양보호사, 건설 단순 종사원, 가사도우미, 조리사, 제조 단순 종사자, 형틀 목공, 매장 판매원, 건축도장, 배달원, 섬유 및 가죽 관련 기능 종사자, 용접원 등 15개 직종이 여기에 해당한다.
2018년 5월에는 노동현장에서 고령 노동자의 산업재해 사망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한 산업안전보건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이 개정안은 고용노동부 장관이 기술상 지침과 작업환경 표준을 정할 때 고령 노동자의 안전에 관한 사항을 고려하고, 사업주가 고령 근로자의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해 노동자를 배치하도록 노력할 의무를 부여했다. 고령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였지만, 이 개정안은 1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이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고령 근로자 친화적 작업환경 가이드라인 개발연구’ 연구 책임자였던 김양호 울산대 교수는 과의 통화에서 “위탁이나 사내하청 고령 노동자의 경우 원청업체가 일차적으로 작업환경을 개선하지 않으면 작업환경 개선에 한계가 있다. 노동인구가 줄면서 노동력의 양적·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만큼 국가적 차원에서 건강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민관 협력을 유도하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광주(경기)=글 조윤영 기자 jyy@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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