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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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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 ④ 진짜 위기의 시작

2019년 4월, 180만원 입금마저 끊기고
등록 2019-07-04 10:14 수정 2020-05-07 16:16

4월23일부터 5월31일까지 약 6주동안 <한겨레 21>은 전북 군산에 머물렀다. 군산 사람 30명과 이야기했다. 모은 이야기들은 A4용지 170쪽 분량, 7만 단어 정도가 된다. ‘한국지엠과 현대중공업 공장이 떠나갔고 군산은 위기를 겪고 있다’는 한 문장을 풀어내는 데 그만한 단어가 필요했다. 야속하다고 말했다. 반성한다고 말했다. 고민한다고 말했다. 포기했다고 말했다. 바란다고 말했다. 서로 위로했다. 때로 불신했다.

‘국가’를 주어로 놓아서는 보이지 않는, 지역에만 절체절명인 위기 앞에 군산은 당혹스럽다. 군산만의 일은 아니다. 쨍강대는 쇳소리, 굴뚝 연기가 성장의 전부인 도시는 국토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집적, 창의성, 4차 산업혁명, 슈퍼스타 도시의 부상 같은 세련된 단어들 앞에 내세울 것 마땅찮은 도시들은, 함께 초라하다.

이야기는 도시의 질서가 만들어져 정점에 이르고 해체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각 순간 그 질서 어느 자리엔가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을 모으고, 서문과 다섯 개 장으로 나눠 정리했다.



• 서문

• 1장 살아남자 : 2018년 2월

• 2장 하늘엔 애드벌룬 떠 있고 : 2008년 5월

• 3장 이제는 놓아야 한다 : 2016년 12월

• 4장 180만원 입금마저 끊기고 : 2019년 4월

• 5장 그래도 기계 다섯 대는 돈다 : 2019년 5월

“이 집도 그래?” 이웃한 족발집 사장이 정순철(47·가명)의 치킨집으로 찾아왔다. 4월부터 매출이 급감했다고 했다. 낌새는 3월부터 있었다. “여기도 그래.” 정순철이 맞장구쳤다. 모두가 그렇다는 게, 족발집 사장에게 얼마나 위로가 됐을지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이유를 따져본다. 실업급여 지급 마감이 유력한 이유로 떠오른다. “2월까지 한국지엠 실직자들 실업급여 대부분 끝났잖아. 그 와중에 새 학기 시작했으니까 돈 들 데는 생겼을 테고.” 정순철도 지난해 5월31일 한국지엠을 나온 희망퇴직자다. 두 달 뒤 치킨집을 차렸다. 4월로 10개월차 사장님이 됐다. 이제 정순철은 한때 동료였던 지엠 정규직 실직자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주시한다. 그들, 도시 중산층의 심리가 가게 매출과 직결된다.

정순철이 치킨집을 차린 수송동 롯데마트 주변은 도시 중산층을 위해 만들어진 신도심이다. 김성우가 내 집을 마련하고, 백일성이 축제의 시간을 보냈던 10여 년 전 동네가 움텄다. 롯데마트가 2007년 들어왔고, 수송동·나운동·미룡동 일대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도시의 성장을 가늠하고 몰려온 투자금도 도시의 변화 속도를 채찍질했다.

재취업을 희망했지만 치킨집 차려

안전하게 군산 중산층에 속했던 한국지엠 정규직 노동자 정순철의 삶도 자라나는 도시의 수혜를 누렸다. 행정구역으로는 수송동에 속하는 지곡동의 브랜드 아파트에 살았다. 쉬는 날이면 구태여 ‘각시’라고 부르는 아내와 은파호수공원을 산책하고 커피를 홀짝였다. 일주일에 한 번쯤, 탁구클럽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낙이었다.

희망퇴직을 결정하던 순간까지도 정순철은 자영업을 생각해본 적 없다. 지난해 4월 한국지엠 희망퇴직 신청자 190명에게 물으니 창업을 희망한 이는 7.4%(14명)에 그쳤다. 90.5%(172명)가 다시 임금 받는 노동자가 되길(재취업) 원했다.(2018년 군산 자동차 위기업종 대상 상시 수요조사 결과보고서, 전북 인적자원개발위원회) 그 역시, 그때는 재취업에 손들었던 평범한 희망퇴직자였다. 그런데 귀가 좀 얇았다. 좋은 가게 자리를 주변 사람에게 소개받았다. 손에 들어온 목돈, 군산에 머물 수 있다는 장점 정도까지 생각한 뒤 큰 고민 없이 가게를 냈다. 사실 달리 갈 만한 일자리도 없었다. 임대료는 시세에 견줘 다소 비쌌다.

준비 없는 창업에, 군산의 위기까지 겹쳤다. 그런데 지난 2월까지 벌이가 이전보다 크게 줄지 않았다. 의아했다.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우선은 변화한 삶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었다. 4월까지 지난 10개월 동안 가게를 쉰 날은 단 하루다. 아프다고 병가를 써낼 직장도, 아내와 휴가 계획을 짜고 연가를 써낼 직장도 이제는 없다.

참을 수 없이 배가 아리고 토가 쏠렸던 지난겨울 어느 날, 그는 별생각 없이 시작한 창업이 실은 과거와 결별하는 굵은 선을 자기 삶에 그어놓는 일이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새벽 1시까지 장사를 마치고 응급실 침대에 쓰러졌다. 회복 못한 몸으로 다음날 가게로 나갔다. 하루 치 장사를 준비하려고 미련스럽게 양파를 썰었다. ‘이제 한국지엠 정규직 정순철은 없다. 그런 과거는 잊어야 한다.’ 생각하자 눈물이 터졌다. 희망퇴직 이후 정순철은 부쩍 자주 운다.

직장 잃은 남편 대신 아내들이 구직

과거를 잘 잊고 적응하는 일에만 마음을 쏟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3월부터 매출 감소가 겹쳤다. 애써 다잡은 마음이 또 약해진다. 실직 뒤 난생처음 찾아간 점집에서 “5년 동안은 안 좋다”고 했던 우울한 점괘가 머리에 맴돈다. “정말이지 안 좋긴 안 좋아. 힘든 일이 계속 새로 나타나.” 2019년 1분기(1~3월) 전북의 음식·숙박업 생산지수는 91.7(2015년 100)로 전 분기보다 9.8% 줄었다. 정순철 치킨집 양옆 가게에도 어느새 ‘임대’를 알리는 펼침막이 나붙었다.

“중산층 위기의 유예기간이 이제는 끝나는 것일지도 몰라요.” 김선화 군산 여성인력개발센터 관장도 뒤늦은 변화에 촉각을 세운다. 180만원씩 주던 한국지엠 정규직 실직자들의 실업급여가 올해 초 끝났다. 자산이 있어도 들어오는 돈은 없다. 미뤄져온 실직자들의 불안이 물 위로 떠오를 때가 됐다는 얘기다.

올해 들어 남편이 한국지엠 실직자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며 일자리를 구하는 여성이 나타나고 있다. 다급해진 재취업 욕구는 본격화한 위기의 이면이다. “통계 수치는 없지만 셀프빨래방같이 작고 손쉽게 창업할 만한 가게가 갑자기 늘고, 가족 문제라며 어린이집을 관두는 원아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하고요.” 군산 토박이인 김 관장 귀에 걸리는 소문은 온통 ‘이제부터가 진짜 위기’임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들뿐이다.

줄어드는 매출과 잃어버린 과거가 정순철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무심코 휴대전화를 들었다. 오랜만에 사진을 꺼내봤다. 동료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옷을 입고 모여 헤벌쭉 웃고 있다. 재작년 동네에서 영화 촬영을 한다길래 구경 갔다가 엑스트라로 분했다. “근데 영화가 망한 거여. 망했어 망했어.”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다. 웃음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득 재미있는 농담이 떠올라도 고개 돌려 말 건넬 사람이 없다. 부평공장으로, 창원공장으로 친한 동료들이 떠나갔다. 떠나간 동료는 가장 잊히지 않는 과거다. “다 그만둬버리고 싶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봐, 요새. 거기 나오는 사람들처럼 사라지고 싶어서.” 그가 다시 주방으로 향한다. 생각해보면, 그 역시 지난 10개월 가족과 둘러앉아 외식하거나 쇼핑한 적이 없다.

군산 신도심 수송동 건물에 임대를 알리는 표지들이 붙어있다.

군산 신도심 수송동 건물에 임대를 알리는 표지들이 붙어있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떠받친 원룸촌은 황량

산업단지 가운데 오식도동 상권을 마주한 이들은 그 황량함에 아연해진다. 원룸 건물 대부분 임대 표지를 내걸고 있다. 상가 세 집 건너 하나쯤 영업하지 않는다. 갓 문을 연 듯 개업 축하 화분이 놓인 가게조차 며칠째 문이 닫혔다. 동네 서북쪽 끝자락 오식공원에도, 숫자로만 이름 붙은 원룸촌 사이 소공원(제51호 공원, 제52호 공원 등)에도 사람은 없다. 외국인 노동자 몇몇이 편의점 앞에 점점이 모여 있을 뿐이다. “아무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어도 공장 두 곳이 사라진 거로 어떻게 한 동네가 이렇게까지….” 당황한 사람들이 당연히 이르게 되는 의문이다.

지난 4월30일 오식도동 원룸 건물 1층에 모여 원룸 건물주 3명이 대화한다. 동네의 황당한 모습에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애초 동네 자체가 뜨내기 노동자만 바라보고 지었으니까.” 정순철의 치킨집이 있는 군산 도심 상권이 중산층 노동자의 삶을 책임졌다면, 오식도동 원룸촌과 상가는 그보다 불안정한 조선소 물량팀, 건설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젊은 류관영(56)은 어딘가에서 마주친 듯 낯익은 인상이다. 비슷한 나이대 중년들에 견줘 키가 크다. 선배 건물주들의 말을 눈을 맞추고 귀 기울여 들어뒀다가, 그 말을 찬찬한 말투로 논리적으로 정리해주는 역할을 대화 속에서 주로 맡는다. 그는 젊은 시절 고향 김제를 떠났다. 국내 조선업 본산 격인 울산 동구에 자리잡았다. 거기서 30년 넘게 살았다. 형제들과 창틀 사업을 벌였다. 사업은 무탈했다. “처음 울산 갔을 때는 시장에서 아주머니들이 뭐라 하는데 그 말을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그래도 적응해 나름대로 성공했다. 울산 동구에 원룸까지 한 채 샀다. 막내를 대학 보내고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울산 원룸을 팔고 은행 대출을 보태 2015년 군산에 왔다. 오식도동에 원룸 건물 두 채, 작은 상가 건물 두 채를 지었다. 고향 김제와는 자동차로 20분 거리다. 멋진 귀향이라고 믿었다. 긴 경상도 생활에도 그의 말씨 중간중간 전라도 사투리가 묻어 있다.

월세 투룸 44만원이 30만원으로

늘그막을 제대로 맞겠다는 순진한 바람만으로 류관영이 군산에 왔을 리는 없다. 합리적 판단과 자신감도 있었다. 울산 동구에서 살아온 세월이 30년이다. 조선업의 생리쯤은 간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업 노동자들은 어차피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혼자 사는 경우가 많다. 실제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중은 80%를 웃돌았다. 이들이 도심 지역인 수송동이나 나운동에 아파트를 구해 가족과 살 가능성은 작다. 그렇다면 원룸이 잔뜩 필요해질 건 분명하다. 그런데 오식도동에 주거 용도 땅은 한정돼 있다. 그렇다면 투자 가치가 충분하다. 생각은 흠잡을 데 없어 보였다.

투룸은 44만원, 원룸은 33만원씩 받아도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막 군산에 터 잡았을 무렵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원룸촌과 상가가 불야성을 이뤘다. 주말이면 가족을 찾아간 노동자들이 빠져 고요했다. 그래도 건물주 입장에서야 임대료만 끊기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애써 눈감아 넘겼던 불길한 일이, 사실 군산으로 넘어오자마자 있긴 했다. 2015년 말 원룸 건물 한 채를 사기로 했던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가 돌연 계약을 취소했다. “계약금 3천만원을 고스란히 날린다”는 데도 개의치 않았다. “여기 살 줄 알았는데 울산으로 다시 발령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조선소가 떠나는 것인가?’ 짐작은 했지만 명확한 정보를 얻을 길은 없었다.

그래도 한동안 괜찮았다. 조선소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산업단지의 또 다른 대표 기업인 오시아이(OCI)가 산단에 열병합발전소를 짓고 있었다. 발전소를 짓기 위해 건설 노동자가 들어와 방을 채웠다. 발전소 공사가 마무리되고 조선소 가동이 멈추자 급격한 위기가 몰려왔다. 방값을 내리고 또 내려 이제 투룸 30만원, 원룸 20만원씩 받는다. 그래도 방 절반은 비어 있다. 인터넷 요금이며 대출이자는 꼬박꼬박 나간다. 손해는 막심한데 별다른 정부 지원은 받지 못한다. 동네 풍경은 날마다 그 괜찮던 시절의 주말 같다.

일자리가 사라지자 사람도 사라졌다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는 도시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래도 사람 대부분은 도시에 남았다. 군산 토박이가 많은 공장이었고, 노동자 대부분이 중산층으로 지내며 아파트를 마련해 자산에 발이 묶이기도 했다. 반면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가동 중단은 도시에서 사람을 내보냈다. 도심에 비해서도 오식도동의 적막이 한층 눈에 띄는 이유다. 사람이 없다. 일을 보고 몰려왔다가 일이 사라지자 도시를 떠났다. 2012년 조선업에 속한 군산시 고용보험 가입자(피보험자) 가운데 2018년 6월에도 계속 고용보험에 가입된 이들 중 27.8%(346명)만 군산에서 일했다.(‘고용위기지역 산업의 일자리이동 지도 구축 기초연구’, 노동연구원) 많은 노동자가 울산 동구(190명), 전남 영암(58명) 같은 다른 조선업 도시로 이동했다.

언제든 떠나버릴 수 있는 노동자 역시, 조선업의 생리다. 류관영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몇 년 치씩 수주 물량이 쌓여 있다던 조선업의 맨모습이 이렇게 야리야리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조선소가 버려진다는 것 역시 상상 못했던 일이다. “내 탓이지. 그래도 이건 너무 황당하고 괴롭다.” 멋진 귀향과 편안한 노후의 꿈이 걱정으로 뒤덮였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만화 이윤희
그래픽 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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