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주어로 놓아서는 보이지 않는, 지역에만 절체절명인 위기 앞에 군산은 당혹스럽다. 군산만의 일은 아니다. 쨍강대는 쇳소리, 굴뚝 연기가 성장의 전부인 도시는 국토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집적, 창의성, 4차 산업혁명, 슈퍼스타 도시의 부상 같은 세련된 단어들 앞에 내세울 것 마땅찮은 도시들은, 함께 초라하다.
이야기는 도시의 질서가 만들어져 정점에 이르고 해체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각 순간 그 질서 어느 자리엔가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을 모으고, 서문과 다섯 개 장으로 나눠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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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 1장 살아남자 : 2018년 2월
• 2장 하늘엔 애드벌룬 떠 있고 : 2008년 5월
• 3장 이제는 놓아야 한다 : 2016년 12월
• 4장 180만원 입금마저 끊기고 : 2019년 4월
• 5장 그래도 기계 다섯 대는 돈다 : 2019년 5월
2019년 5월30일 김광중 번영중공업 대표는 비응항에서도 맛집으로 소문난 ‘물고기자리’ 횟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탕 하나를 시켜도 반찬이며 회며 아낌없이 내준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사장님 하는 일 모두 번창하세요.” 둥글둥글한 인상을 지닌 김 대표 표정이 조금 어색해졌다. 조선소가 잘나갈 때만 해도, 김 대표에게 식당 사람들은 “사업 잘되시죠” 하며 물어봤다. 질문은 어느샌가 기원으로 바뀌었다. 물어봐야 기분 좋게 대답할 만한 사업가가 여기 없다는 것쯤은 노련한 가게 사람 모두 알아챘을 것이다. 그는 3년 전까지 배 앞과 뒤에 붙을 철판을 구부려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에 납품했다.
2016년 말 그는 울면서 이 횟집에 서 있었다. 사업 100%를 차지했던 현대중공업 일감은 군산 조선소가 멈추기(2017년 6월) 6개월 전에 모두 끊겼다. 정부의 고용 유지 지원금으로 임금을 주는 회사를 직원들은 하나둘 떠났다. 80명 직원 가운데 60명이 남았다. 거기서 다시 40명을 내보내기로 했다. 이 횟집에서 마지막 회식을 했다. 그해 송년회를 겸했다.
‘기계쟁이’가 모으고 잃은 사람들
누군가 건배사를 해야 했다. 모두가 우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조용한 적막이 횟집 방 안을 감쌌다. 힘겹게 김 대표가 말을 꺼냈다. “좋아지면 다시 같이 배우면서 일합시다.” 말하면서도 미안했다. 언제까지 우리만 바라보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1년, 길어도 2년 뒤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흘러간다. 올해 말이면 3년째다. 번영중공업은 현재 다른 회사에서 조금씩 일감을 받아 교각 구조물 만드는 일 등을 한다. 매출액은 80억원에서 8억원으로 줄었다.
김 대표는 자타 공인 ‘기계쟁이’다. 어릴 때부터 기계를 워낙 좋아했다. 뭉툭한 손으로 못 만지는 기계가 없었다. 기계가 적성이었다면, 사업은 모두에게 굽히는 일이라고 아버지에게 배웠다. 조선소에 들어가는 날이면 경비원 손에 박카스를 쥐여줬다. 그 사람이 누구라도 도움을 준다면 허리를 90도 굽혀 인사했다. 이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터에 뛰어든 공고 출신 이력은 자랑스럽다. “가방끈이 짧다”고 말해버리고 웃는다. 김광중과 인연 닿았던 군산 사람들은 그를 ‘쿨한 사장님’으로 기억한다.
2008년 현대중공업 조선소가 군산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공장 터 1만5867㎡(4800평)를 군산 조선소 근처에 마련하고 기계를 들였다. 프레스 같은 기계 몇 개는 김 대표가 직접 설계도를 그렸다. 직원들과 함께 철을 붙이고 조립했다. 기계쟁이였으니까. 아낀다고 아꼈는데도 초기 투자 자금은 80억원 가깝게 들었다.
투자와 설비도 중요하지만 관건은 사람 모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사무실 창고에 넣어둔 액자에는 2010~2016년 공장에 모여 있던 직원 80명의 얼굴이 빼곡하다. 그가 모으고 잃었던 사람들이다.
골리앗에 한 발 더 가까이
현대중공업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는 노장들과 업계에서 날고 긴다는 유명 기술자들이 액자 속에서 퍽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들을 맞기 위해 울산으로, 통영으로, 거제로 갔다. 서너 번, 많게는 열 번을 찾았다. 공무원 백일성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업 기반이 없는 군산에서 몇 번씩 누군가를 찾아 전국을 떠도는 일은 당연했다. 낯선 땅에서 기술자들을 만나면 “현대중공업과 함께 조선업 불모지인 군산에서 제대로 일어서고 싶다. 내 회사가 아니라 모두의 회사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울산에서도 알아주던 현대중공업 퇴직 노동자 ‘어르신’ 한 분이 그 진심을 받아줬다. 어르신이 회사에 터 잡았다. 임금은 최소한만 받겠다고 했다. 어르신 소개로 유명한 기술자들이 따라왔다. 설계도에 맞게 철판을 불로 지지고 구부리는 장인들의 동작은 경이로웠다. 적당한 온도를 온도계로 재는 것보다 이들의 감이 더 정확할 정도였다. 여전히 사람의 감에 의존하는 조선업의 매력에 빠졌다.
뒤이어 군산 지역 젊은이를 모았다. 군산기계공고, 장항공고에서 졸업생들을 모집했다. 장항공고는 이름까지 충남 조선공업고등학교로 바꿔 단 참이었다. 노장이 젊은이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기술이 곧 밑천인 조선 바닥에서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어르신들이 퇴장한다고 해도 군산과, 다리(동백대교) 건너 충남 서천이 고향인 청년들이 뒤를 이어가준다면 공장은 더욱 단단해질 터였다. 그래 봐야 협력업체 사장일 뿐이지만, 그렇게 군산을 제2의 울산·거제·목포로 다지고 싶다는 큰 포부가 김광중에게 있었다.
모두의 기술이 늘어갈수록 제작 시간은 단축됐다. 2015년 배 뒷부분(선미)뿐만 아니라 앞부분까지 성형할 수 있는 코드(허가)가 현대중공업에서 떨어졌다. 우수 협력업체 표창도 받았다. 그때마다 직원 모두 소리치고 환호했다. 골리앗 크레인을 품은 조선소 곁에 한 발씩 다가가는 게 곧 행복이었다. 그럴수록 김광중과 번영중공업은 현대중공업에 점점 더 얽혀갔다.
버틴다는 것의 의미
하청 공장이 ‘버틴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5월2일 창원금속공업(창원금속) 총괄이사 이정권이 오식도동 순댓국집에 앉아 생각한다. 창원금속은 한국지엠 1차 협력사였다. 이런저런 협력업체 이름을 새긴 점퍼를 입고 노동자들이 각자 몫의 뚝배기에 조용히 집중하고 있다. 어딘가에서 버티고 있을 이들이다. 원래 줄 서서 먹던 집인데 정오에도 자리가 듬성듬성하다. 조용하고 기력 없는 순댓국집 분위기는 여전히 낯설다. 이랬던 가게가 아니다. 점심때 모든 탁자에 소주가 한 병씩 놓여 있었다. 본래 전주 사람인 이정권은 자주 놀랐다. 잘만 돌아가던 시절 낮술쯤은 눈감아줬다. 매운 고추를 한 입 깨물어본다. 이내 그도 자기 뚝배기에 코를 박는다. 선지가 엉긴 피순대가 푸짐하다.
지난해 공장이 떠날 때까지 창원금속은 버티는 일을 숙명으로 알고 23년을 이어왔다. 1995년 가을 대우차 공장을 바라보고 군산에 자리잡았다. 2000년 대우차가 무너지고, 버텼다. 2013년 한국지엠이 물량을 본격적으로 줄이기 시작한 뒤 또 버텼다. 버티기에 돌입하면, 일주일에 일하는 날은 2~3일로 줄어든다. 잔업과 특근으로 가득 채워졌던 때에 견줘 임금도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다. 누가 봐도 생활이 되지 않을 정도다. 위기가 감지되는 순간부터 다른 물량을 찾는 2~3차 협력사와 달리, 1차 협력사의 매출과 임금은 절대적으로 대공장 물량에 달려 있다. 임금이 줄면 자연스럽게 노동자가 떠난다.
그러고 나면 회사 대표와 가족들이 직접 나와 기계를 돌리기 시작한다. 밥값을 아껴보겠다고 사모님이 직접 도시락을 싼다.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 직원이 “먹고살 수 없어, 쉬는 날 인력사무소에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대표와 함께 임원인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버티는 일은 이런 것이다. 2012년 180명에 이르던 창원금속 노동자는 이런 과정을 거쳐 어느새 38명으로 줄었다. 번영중공업처럼 눈물콧물로 얼룩진 이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고통을 보고, 이해한다. 떠나는 노동자도 떠나보내는 회사도 “조금만 더 같이 일하고 싶다”고 차마 입 떼지 못한 채 멀어진다.
우리 스스로 할 만한 것
버티기가 끝나면 새로운 고난이 닥친다. 인력난이다. 2000년대 중반 갑자기 한국지엠이 물량을 쏟아냈을 때 그랬다. 불황에 한껏 줄여놓은 덩치를 갑자기 늘려야 했다. 산업단지 질서 속에서 협력업체의 역할은 대공장 물량이 때로는 너무 적어서, 때로는 갑자기 너무 많아져서 허덕이는 일이었다. 창원금속도 불황에 말랐고, 마른 몸으로 맞은 호황에 허덕였다. 긴 꿈에서 깨듯, 이정권이 지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의 모습을 깨친 건 공장이 폐쇄를 공식 발표하던 ‘그날’에 이르러서다. 이제 버텨본댔자 다시 물량을 늘려줄 대공장은 완전히 문을 닫았다. 대우 땅을 지엠이 접수했듯 그 땅에 다시 대규모 자동차 공장이 들어서리란 희망도 없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동안 해온 일이 결국 대공장이 주는 물량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명료해졌다. 처음, 그 깨달음은 낯설고 참담했다. 모진 불황과 호황을 겪어왔던 회사 대표조차 “이제 정말 공장을 접어야 할까?” 고민했다. 그가 답했다. “두 달만 시간 주시면 뭐든 우리 스스로 할 만한 걸 찾아보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할 만한 것. 어절을 발음하는 데 참담함이 잦아들고 의외의 후련함이 깃들었다. 질서의 회복을 기다리는 대신 우리 스스로 할 만한 것, 대공장에 잘 보이겠다며 갑질을 참아내는 대신 우리 스스로 할 만한 것, 줄어드는 물량을 원망스럽게 셈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 할 만한 것. 이제 창원금속과 산단 협력업체에 주어진 질문은 이전과 전혀 다른 것임을 이정권은 알았다. ‘버틸 것이냐 포기할 것이냐’는 질문은 2019년 산단에서 의미 없다.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질문을 들고 이정권은 다른 협력업체를 찾아다녔다. “우리끼리 같이 뭔가 해보자. 혼자서는 규모 있는 사업을 만들 수가 없다”고 말했다. 대부분 회사가 고개를 떨궜다. 공단을 지배한 무기력의 크기가 생각보다 컸다. 많은 회사가 “연구개발 인력부터 구조조정했다”고 했다. 새로운 뭔가를 시도할 여력부터 잘라낸 셈이다. 아직 조금 남아 있는 한국지엠 애프터서비스(AS) 부품 생산을 이어가며 버티기를 시도하는 회사가 그나마 생기 있는 곳이었다. ‘이제는 놓아버려야 한다’는 체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질서의 관성은 절체절명의 순간에조차 질기고 견고했다.
‘희망고문’은 그만
조선소는 가동을 멈췄다. 사외 협력업체에는 특별한 보상 없이 잔치가 끝났다. 한식구라고 생각한 것은 김광중뿐이었다. 그사이 충남 조선공업고등학교는 장항공고로 다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지역 사양산업인 조선산업 인력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심는다’고 학부모와 동문들 사이 여론이 비등했다.
종종 현대중공업 본사에서 골리앗 크레인을 정비하러 나왔다는 소문이 산단에 돈다. 그런 날, 김광중도 다른 협력업체 사장들처럼 밤잠을 설친다. 정비한다면 재가동할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기대를 쉽게 떨치지 못한다. 역시나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희망고문은 이쯤 하고 그냥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김광중이 고개를 돌린다.
글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만화 이윤희
그래픽 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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