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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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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 ② 파란만장한 과거

2008년 5월, 하늘엔 애드벌룬 떠 있고
등록 2019-07-04 09:55 수정 2020-05-07 16:16

4월23일부터 5월31일까지 약 6주동안 <한겨레 21>은 전북 군산에 머물렀다. 군산 사람 30명과 이야기했다. 모은 이야기들은 A4용지 170쪽 분량, 7만 단어 정도가 된다. ‘한국지엠과 현대중공업 공장이 떠나갔고 군산은 위기를 겪고 있다’는 한 문장을 풀어내는 데 그만한 단어가 필요했다. 야속하다고 말했다. 반성한다고 말했다. 고민한다고 말했다. 포기했다고 말했다. 바란다고 말했다. 서로 위로했다. 때로 불신했다.

‘국가’를 주어로 놓아서는 보이지 않는, 지역에만 절체절명인 위기 앞에 군산은 당혹스럽다. 군산만의 일은 아니다. 쨍강대는 쇳소리, 굴뚝 연기가 성장의 전부인 도시는 국토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집적, 창의성, 4차 산업혁명, 슈퍼스타 도시의 부상 같은 세련된 단어들 앞에 내세울 것 마땅찮은 도시들은, 함께 초라하다.

이야기는 도시의 질서가 만들어져 정점에 이르고 해체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각 순간 그 질서 어느 자리엔가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을 모으고, 서문과 다섯 개 장으로 나눠 정리했다.



• 서문

• 1장 살아남자 : 2018년 2월

• 2장 하늘엔 애드벌룬 떠 있고 : 2008년 5월

• 3장 이제는 놓아야 한다 : 2016년 12월

• 4장 180만원 입금마저 끊기고 : 2019년 4월

• 5장 그래도 기계 다섯 대는 돈다 : 2019년 5월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크레인 한 대가 멈춰 서 있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크레인 한 대가 멈춰 서 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군산시청 7급 공무원 백일성의 손을 맞잡았다. 손의 크기와 단단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백일성이었지만 대통령 손도 만만치 않았다. ‘테니스를 많이 해서 그런가?’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악수하는 그들 옆으로 시민 2천 명이 모여 있었다. 유난히 볕이 강한 날이었다. 사람들은 그늘 하나 없는 벌판에 꽃무늬 양산을 쓰거나 파란색 종이 모자를 쓰고 있다. 시선은 모두 무대를 향했다.

대우 그리고 조선소

‘경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기공식 축’.

무대에는 오로지 이날이 어떤 날인지를 알리는 데만 집중한 고딕체 글씨가 선명했다. 흰색, 파란색, 빨간색을 번갈아 섞은 애드벌룬이 날았다. 2008년 5월7일 현대중공업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첫 삽을 떴다. 군산의 부동산 가격은 4개월 연속 전국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새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며 거래량은 도시 역사상 처음 1만 건을 돌파(1만1346건)했다. 2007년(6129건)보다 두 배 가깝게 늘었다.

백일성은 모든 게 큼직해 보이는 사내다. 몸피가 크고 눈, 코, 입 모두 시원스럽다. 거칠고 강해 보이지만 목소리는 단정하다. 웃을 때 큰 코가 조금 들린다. 큰 체격은 무엇이든 될 때까지 내달리는 고집스러운 성격 그대로다. 백일성은 1991년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군산으로 건너왔다. 군산에서 동사무소 직원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돌아보면 30년 가까운 시간이다. 아이들을 군산에서 낳고, 학교 보내고, 키웠다. 워낙 토박이가 많은 도시라 내세울 거리는 못 된다.

그날 그와 군산과 청와대는 의심 없이 성공의 뜻을 정의했다. 대기업 공장 유치. 애초 있던 군산일반산업단지(564만1천㎡)에 대우차로 대표되는 군산국가산업단지(682만8천㎡)가 더해졌다. 이윽고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들어서게 될 군산2국가산업단지(1577만4천㎡)로 확장했다. 바다를 메우고, 땅을 고르고, 그 자리에 공장을 세우며 성장하는 방식에 도시는 익숙했다. 대기업 생산공장이 산단에 자리잡고, 그를 따라 협력업체들이 들어온다. 일자리 찾아 사람이 몰린다. 몰린 사람들 꼴에 맞춘 상권이 생겨난다. 이보다 명확한 성장 공식은 없어 보였다.

그 놀라운 성장의 첫 경험은 물론 대우였다. 대우는 꽤 넓은 면적의 바다를 메워 산단 땅을 다졌다. 돈 대신 받은 땅(대토)에 1996년 자동차 공장을 세웠다. 산단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자유로를 기준으로 위쪽에 대공장들이 자리잡고 아래쪽에는 수많은 협력업체가 들어찼다. 부품이 산단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지고 합쳐져 자동차가 되면, 그보다 더 위쪽에 있는 자동차 전용 부두에서 배에 실려 유럽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하청업체와 대공장의 분업과 질서는 물 샐 틈 없이 견고했다. 도시는 ‘현대의 울산’처럼 ‘대우의 군산’이 될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IMF 외환위기로 2000년 대우차가 무너졌다. 2002년부터 대우차 땅을 한국 지엠과 타타대우 상용차, 두산인프라코어가 나누어 차례로 채웠다. 고난의 시간을 버텨낸 협력업체, 새로 들어온 협력업체와 함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새로운 대공장들은 생산을 이어갔다. 겉보기엔 그랬다. 이 견고한 질서 속에서 대기업 본사에 군산의 생산공장이 어떤 의미일지, 위쪽 대공장과 아래쪽 협력업체가 어떤 관계를 맺을지, 그 안에서 노동자들은 각자 어떤 마음으로 일하게 될지를 백일성은 묻지 않았다. 그의 업무가 아니었다. 그때, 군산 사람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질문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을 유치하기 위해 군산시와 전북도 공무원들이 60번이나 기업을 찾아가는 ‘60고 초려’를 했다고 합니다.” 어느새 무대에 올라 연설하는 대통령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백일성도 30번 정도 서울과 울산 동구(현대중공업 본사)를 찾았다. 목적은 명확했지만, 그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그가 조선소 유치에 목매기 시작한 건 2006년부터다. 세계 최고 조선업체 순위를 한국이 싹쓸이하던 때다. 바다를 끼고도 그 호황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2년 동안 숱한 실패를 겪었다. 눈치 보며 중앙정부 자료를 받아다 업체로 나르고, 밤새워 필요한 인프라를 검토했다. 간을 보던 업체들이 각자 사정을 대며 발을 뺄 때마다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그때마다 오기가 생겼다. ‘안 돼? 두고 봐.’ 속으로 되뇌며 또다시 기업을 찾아나섰다. 백일성은 그런 사람이었다.

새로운 질서

현대중공업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미리 조선소가 들어설 만한 땅을 살폈다고 했다. 대기업은 역시 준비성부터 달랐다. 백일성과 동료들은 조선소가 들어서야 할 땅을 차지하고 있던 기업과 협상을 중재해 현대중공업에 땅을 넘겼다. 보조금 200억원을 시와 도가 나눠 지원하는 데도 발 벗고 나섰다. 도로와 주차장을 새로 지었다. 군산대학교와 군산기계공업고등학교, 장항공업고등학교를 돌며 조선업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과정을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공로로 그는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주로 과장이나 국장급에게 주던 훈장을 7급 주사보인 그에게 준 건, 규제를 풀어 기업을 이롭게 한 이라면 그게 누구라도 치하하는 실용 정부의 바뀐 태도 때문이라고들 했다. 의외였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차분하게 소감을 말했다. “‘군산에서 살기 싫다’는 자녀의 말에 충격받아 군산이 잘살 수 있도록 기업을 유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깨가 무겁지만 아이들에게 면목이 섰습니다.”

그렇다. 이것은 하나의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를 구현하는 일이다. 자동차 공장이 그래 왔던 것처럼 새 질서가 이 땅에 생겨난다. 서쪽 바다에 붙은 조선소를 향해 남동쪽에 자리잡을 협력업체들이 부품을 만들고 몇 개 부품을 모아 블록을 만든다. 블록을 가져다가 독 위에서 거대한 배를 짓는다. 그사이 공고와 지역 대학 출신 노동자가 탄생하고 거제에서, 울산에서, 통영에서 노동자가 몰린다. 그들은 산단 한가운데 자리잡은 원룸촌에 모여 살 것이다. 한 척씩 배가 완성되는 날이면 진수식을 벌이고, 노동자들은 참았던 갈증을 풀러 산단 한가운데 오식도동 술집들로 몰려갈 것이다. 엉기고 망가지며 소음으로 도시를 가득 채울 것이다. 정말 운이 좋다면, 대기업과 협력업체들에 필요한 지원을 노리고 금융·법률 서비스가 군산에 자리잡을지도 모른다. 전북의 중심이 전주가 아닌 군산이 될 날도 멀지 않게 느껴졌다. 대통령 손을 맞잡고 훈장을 받으면서도 별다른 동요 없던 백일성이, 그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벅찼다.

공장이 멈추면 들리던 환호 소리

그즈음, 군산 산업 질서의 정점에 군림했던 한국지엠 군산공장에서 김성우는 나이 마흔을 코앞에 뒀다. 온종일 지겹도록 보는 동료들과는 부동산 얘기를 했다. 노동자 대부분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 또래였다. “딱 내 집을 마련해야 할 시점”에 도시의 부동산이 들떴다. 수송동, 나운동, 미룡동에 지은 아파트들이 며칠 새 몇천만원 올랐다는 소문에 귀가 쏠렸다. 오식도동에도 투자 수익을 노리고 원룸 건물이 속속 들어찼다. 200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생산량이 늘어 너무 바빴던 한국지엠 공장 남성 노동자들이, 가족의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그런 집값 소문을 들어다가 아내에게 전해주는 정도였다. 김성우도 2007년 말 새 아파트를 마련했다. 동료들을 따라 도시의 성장에 안전하게 올라탔다.

2008~2009년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군산에도 영향을 주었다. 김성우가 집을 장만한 직후다. 지엠 본사는 2009년 6월 미국에서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북미에 있는 47개 공장 가운데 14개를 폐쇄하기로 했다. 지엠은 ‘나쁜 지엠’(Bad GM)으로 묶인 공장을 잘라내고 ‘좋은 지엠’(Good GM)만 모아 ‘뉴 지엠’(New GM)으로 다시 태어났다. 김성우나 동료들은 한국지엠을 잘라낼 거라고 보지 않았다. 군산의 불안감도 미미했다. 군산공장은 여전히 한 해 22만4천 대(2008년 기준)를 생산했다. 비싼 휘발유 가격 덕에 한국에서 나오는 마티즈나 라세티 같은 작은 차가 잘 팔렸다.

예상대로 군산공장은 살아남았다. 한국지엠은 ‘좋은 지엠’이었다. 그사이 떨어져나가고 폐쇄된 다른 나라의 나쁜 지엠들과, 그 안의 사람들 이야기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대우 파산을 버틴 데 이어 지엠 구조조정까지 비켜갔다. 대공장에 대한 군산의 믿음은 한층 강해졌다. 2011년에 이르자 군산공장은 26만9천 대까지 생산량을 늘렸다. 공장이 생산할 수 있는 최대치(약 30만 대)에 가깝다.

대공장에 잔업과 특근이 꽉 들어찼다. 김성우는 아침 8시 공장에 들어서면 밤 9시는 돼야 공장을 나왔다. 저녁 7시에 들어가면 다음날 아침 7시에 일터를 벗어났다. 집에서는 잠자느라 바빴다. 공장 기계를 최대치로 돌리지 못하는 일도 생겼다. 협력업체에서 불이 나 자재가 들어오지 못한 날도 있었다. 이 소식이 공장에 전해지면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때는 그렇게라도 돼야 일 좀 쉴 수 있었으니까.” 김성우가 몸은 회사에 매이고, 돈은 잘 벌리고, 그래서 일과 잠이 전부였지만 덕분에 중산층이 됐던 시절을 떠올렸다. 좋았는지 나빴는지, 판단하기 좀 애매한 시간이다.

위기대응 특별지역

2019년, 돌아보면 거짓말 같은 11년 전 흔적이 여전히 도시 곳곳과 백일성의 일상에 남아 있다. 흔적과 정반대되는 현실이 묘하다.

백일성은 대통령이 직접 건넨 옥조근정훈장을 집에 있는 함 안에 고이 넣어뒀다. 다시 꺼내보는 일은 없다. 현대중공업 자리에 서 있는 1650톤 크레인도 그대로다. 다만 멈춰 서서 묵묵하다. 산단 곳곳을 도는 7번 버스는 세아베스틸 다음 정류장을 한국지엠 정류장으로 안내한다. 안내된 한국지엠 군산공장은 외부인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50만 국제 관광기업도시 군산 건설’이라는 그 시절 도시의 구호도 낡은 버스 정류장 곳곳에 새겨 있다. 국제적으로, 관광도 하고, 기업도 하고, 그래서 인구는 두 배 늘리겠다는 야심만만한 문장을 이제 모두가 웃어넘긴다.

조선소 가동 중단에 이어 ‘자동차 공장이 아예 문을 닫았다’는 얘기를, 백일성은 관광 부서에서 들었다. ‘근대로의 시간여행’을 주제로 군산 옛 도심을 손질하던 때다. “어떻게 들여와서 어떻게 키워준 공장인데.” 공장이 꾸린 질서에 기대어 살았던 동네와 사람들이 변해버릴 모습이 눈에 선했다. 명치가 꽉 막혔다. 대공장이 떠나고 질서가 무너진 뒤, 그는 다시 산업혁신과로 넘어왔다. 산단을 활성화하는 일을 맡았다.

백일성이 사무실을 둘러본다. 전화기를 붙잡고 열심히 무언가 설득하는 후배가 보인다. 피로한 듯 눈을 비비며 모니터와 서류를 번갈아 보는 후배도 보인다. 9년 전처럼 분주하고 긴박하다. 이유는 그때와 다르다. “고용·산업 위기 지역 지정이 풀리면, 중앙정부 사업을 따오기 위해서 다른 지역과 동등한 선에서 경쟁해야 한다. 그건 지금 군산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없다.” 한 직급 올라 계장이 된 백일성은 직원들을 독려한다. 군산은 내년 4월까지 고용·산업 위기대응 특별지역으로 지정됐다. 정해진 기간 동안만 위기에 처한 산업과 노동자, 소상공인을 위한 특별한 지원을 누릴 수 있다.

그사이 백일성 자녀들은 군산에서 떠났다. 둘 다 수도권으로 갔다. 한 아이는 제조업, 한 아이는 서비스업 일자리를 구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자식들에게 “군산에서 같이 살면 좋겠다”고 말한다. 11년 전 훈장을 받으며 남긴 수상소감이 멋쩍어서만은 아니다. 일 때문에 거처를 정하고, 일의 일정에 맞춰서 먹고 자는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애들이 여기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단 생산기지

이제 백일성의 정년이 3년 앞으로 다가왔다. 말단 공무원치고는 파란만장했다고 생각한다. 군산도 그랬다. 질서가 만들어졌다. 별 탈 없이 모두가 그 질서 속에 각자 자리를 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와르르 무너진 뒤에야 백일성도 의심하게 됐다. 그 질서는 정말 제대로 된 것이었을까.

대기업 생산공장의 효율성과 비용절감은 산단의 질서를 잣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였다. 군산으로 들어올 때도 효율성이 이유였고 떠날 때도 효율성이 이유였다. 이제 와 그 효율성의 의미를 뒤집어 생각한다. 내키지 않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효율성이었다. 위험을 한 지역, 협력업체, 비정규직으로 몰아넣는 효율성이었다. 누군가는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누군가는 뒷일을 알지 못한 채 흔쾌히 그 효율적인 질서에 의존했다.

군산의 정점으로 군림하며 유리한 질서를 만들어놓은 대공장들 역시 실은 미국에, 서울에, 울산에 있는 본사들에 견주면 말단 생산기지에 불과했다. 성장해온 시간, 공장들은 벌어들인 돈을 본사로 퍼날랐다. 전북 지역 소득의 역외 유출 규모는 2000년 지역총생산의 3%(6천억원)에서 2013년 11.2%(4조8천억원)까지 급격히 늘었다. 그 대부분은 기업소득이 차지했다. 분공장·지사·영업소 중심의 산업구조가 자리잡은 탓이다.(‘지역 소득 역외 유출 진단과 대응방향’, 전북연구원)

“난 아직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기업에 한번 당해봤으니까 더는 예전처럼 말고 다른 무언가를….” 말끝을 흐리는 백일성의 표정만큼은 단호하다. 파란만장한 공무원 생활의 끝이 어디가 될지는 그러나, 아직 아득하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만화 이윤희
그래픽 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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