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서럽습니다.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잦은 야근에 몸살 감기라도 걸릴라치면, 출근길 발걸음은 천근만근입니다. 직장을 ‘위해’ 일하는 시대도 아니고 직장 ‘덕분에’ 얻은 병인데 쉬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쉴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프면 쉬면 되지’라고 말하는 직장인이라면 다행히 지금껏 병치레 없이 잘 버텨온 것입니다.
고용노동부 게시판, 국민권익위원회 게시판 등 정부기관만 아니라 온라인 포털 게시판에서도 병가와 관련한 질문과 답은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병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부터 “독감에 걸렸다. 아무래도 옆 부서 직원에게 옮은 것 같은데, 병가를 낼 수 없다니 도대체 이런 회사를 다녀야 하느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식의 폭로까지 다양합니다. 이 가운데 분노, 허탈, 당황 등 가장 복합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질문은 구구절절한 사연 끝에 따라오는 “직장에 병가가 없어도 되나요”일 것입니다.
<font color="#008ABD">병가를 내려고 하니 우리 회사에는 업무 외 질병과 부상 등으로 인한 병가 규정이 아예 없다고 합니다. 이건 불법 아닌가요?“불법은 아닙니다. 불법이라고 하려면 법이 있어야 하는데 근로기준법에 병가 규정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실제로 취업규칙에 병가 규정이 없는 회사가 절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병의 정도에 따라 휴가가 아니라 휴직이 필요하다면 병 관련 휴직 규정이 있는지도 살펴보셔야 합니다. 병 휴직 또한 법에 규정돼 있지 않아 조건과 기간이 회사마다 다릅니다. 회사 내 규정을 살펴 판단하셔야 합니다.”
</font>
현실에서 업무 외 질병과 부상으로 병가를 신청한 직장인의 상당수는 “우리는 병가가 없는데?”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근로기준법상 병가가 없으니 병가를 줄지 말지는 기업의 재량입니다. 설령 병가 규정이 있어도 회사 관행을 들어 병휴가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font color="#008ABD">독감에 걸려 병가를 쓰려고 부서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연차부터 쓰라고 합니다. 불법 아닙니까?
</font>“역시 불법은 아닙니다. 다만 연차부터 쓰라는 부서장의 태도로 볼 때 병가 규정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취업규칙 등 사내 규정에 병가와 연차 소진 방법에 대한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시고,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노조나 노무사 등에게 문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노조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 다시 부서장과 협의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부서장이 위로는커녕 ‘연차’부터 얘기하는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법에 보장된 다른 유급휴가인 연차로 해결하라는 몰인정에 서러울 법합니다. ‘연차 사용을 권하며 병가 신청을 거부했다’는 사연도 있습니다. 이를 못하게 강제할 방법은 없습니다. 연차를 권한 것은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할 만한 사례도 등장합니다. ‘2주 이상의 병가에 필요하다고 해 정당하게 진단서를 제출하고 쉬었다. 그런데 고과에 (마이너스로) 반영했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거나 ‘월급, 보너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등처럼 불이익을 받았다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고용노동부가 고객상담센터를 통해 답변한 내용을 보면, 근로기준법에 따라 병가 사용에 관한 규정 해석 권한은 사용자나 노사 당사자 사이에 있는 것으로 밝혔지만, 현실에서 병가를 둘러싼 결정권은 사용자 일방에게 있습니다. 취업규칙에 유급병가가 있어도 병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근무 연차가 짧은 신입 사원이나 계약직 사원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또한 취업규칙에 따라 (회사의 재량 또는 회사와 협의해) 결정할 문제라는 게 드릴 수 있는 답입니다.
<font color="#008ABD">저는 공황장애를 알리지 않은 채 회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황장애가 심해져 일상생활도 힘겨운 상황입니다. 그러던 차에 빅뱅의 멤버 탑이 공황장애로 대체복무 중 병가 휴가를 썼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회사에서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에도 병가가 가능한가요?“병가 규정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그에 따르면 됩니다. 다만 병가가 가능한 질병의 종류는 따로 나열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 회사 내에서 지금까지 병가 신청 현황이나 (병가) 처리 관행에 따라 가부가 결정될 것입니다.”
</font>
병가에 대한 질문은 ‘임신했는데 몸이 좋질 않다. 습관성 유산 등 임신을 위한 병가도 가능한가?’ ‘입덧으로도 병가를 쓸 수 있는가?’처럼 임신과 관련해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임신이라고 해서 답이 다를 리 없습니다. 앞서 공황장애의 답과 같습니다. 병가 규정의 후진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모성 보호를 위한 제도가 생겨나는데도 병가는 여전히 오랜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힌트는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입니다. 시민들이 낸 세금을 월급으로 받는 공무원만 병가(제18조)의 제도적 혜택을 보는 셈입니다. 앞선 질문 중 임신과 관련한 질문을 공무원으로 신분을 달리해 던져보면 답은 달라집니다.
<font color="#008ABD">공무원입니다. 이전의 잦은 유산 경험으로 인해 임신 초기 병가 사용을 했으면 합니다. 가능할까요?
</font>“임신 중 입덧이나 부작용 등 안정의 필요가 있으며 1~2일의 단기간 치료나 안정을 한 후 정상근무에 임할 수 있는 경우 병가를 승인받아 사용할 수 있습니다(제18조). 임신 중 공무원이 유산·사산의 위험이 있다는 진단서를 제출해 출산휴가를 신청하는 경우에는 어느 때라도 최장 44일의 범위에서 출산휴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제20조 특별휴가).”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행정기관의 장은 소속 공무원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할 경우에는 연 60일의 범위에서 병가를 승인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병가가 가능합니다. 물론 ‘할 수 있다’는 규정이므로 해당 기관장의 재량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병가 규정과 관련한 기관장의 재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실상 승인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2017년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당시 “해군은 입덧으로 인한 여군의 병가를 올해부터 허가하고 있다”는 내용의 입장 표명이 한 예일 듯합니다. 공무원 가운데 가장 열악한 근무조건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군인 공무원도 (임신으로 인한) 병가의 권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질문과 답을 들여다보면 갈 길은 명확해지는 듯합니다. 억울하면 공무원이 되라는 게 답일까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근로기준법상 병가 규정을 신설하는 게 먼저일까요.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font color="#008ABD">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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