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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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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이 먼저냐 아동이 먼저냐

보편·준보편 복지 확대 평균적 삶은 개선했지만 저소득 가구 상황은 더 나빠져
등록 2019-04-09 10:51 수정 2020-05-03 04:29
지난 10년간 무상급식, 무상보육, 아동수당 등 아동·보육 정책은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이나 노동빈곤층을 위한 복지는 정체됐다. 박승화 기자

지난 10년간 무상급식, 무상보육, 아동수당 등 아동·보육 정책은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이나 노동빈곤층을 위한 복지는 정체됐다. 박승화 기자

“지금 당장 편하자고 후대에 빚을 넘기면 안 됩니다.”(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아동수당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은 많은 국가에서 증명이 됐습니다.”(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2012년 12월16일 18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3차 TV토론회에서 ‘아동수당’을 두고 격한 논쟁이 오갔다. 12살 미만의 모든 아동에게 월 10만원을 주겠다는 문재인 후보의 공약에, 박근혜 후보는 실천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공격했다. 그로부터 7년 만인 2019년 1월, 아동수당은 현실이 됐다.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0~5살 아동이면 월 10만원을 받는다. 애초 “부잣집 아이한테까지 돈을 줘야 하느냐”며 자유한국당이 강력히 반발해 소득 상위 10% 가구의 아동은 제외하는 선별적 지급이 이뤄졌으나, 6개월 만에 “고소득 가구를 배제하는 행정 비용이 더 든다”는 여론에 항복했다. “아동수당은 최초의 보편적 사회 수당”이라고 보건복지부는 평가한다.

무상급식→무상보육→아동수당

아동수당이 최초의 ‘보편적 수당’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10년 보편복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룬 최초의 복지 서비스는 초등학교 무상급식이었다. 사회 구성원 중 가장 어리고 약한 아동은 누구나 생존과 건강한 발달을 위해 국가의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 구성원의 공감대가 형성된 덕분이었다.

아동수당 이전에는 무상보육이 실현됐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는 만 0~5살 아동은 누구나 보육료·유아원비를 받는다. 만 7살 미만 아동을 집에서 돌보는 가정에는 월 10만~20만원의 가정양육수당이 지급된다. 아동 기본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부모(주양육자)의 양육 부담을 덜어주고 저출산 문제를 완화하려는 목적이 결합된 보편적 아동·보육 정책들이다.

‘무상급식→무상보육→아동수당’으로 이어진 아동·보육 정책의 획기적인 변화는 정부의 집중적인 예산 투입이 이끌어낸 결과다. 2019년 아동·보육 부문 예산은 8조1264억원으로, 10년 전인 2010년(2조1275억원)보다 281% 늘었다. 전체 보건복지부 예산 증가율(133%)의 두 배를 웃돈다. 같은 기간 노인복지 예산(3조5166억원→13조9776억원)이 297%로 급증했지만, 급격한 저출산·고령화 속도를 고려하면 복지 대상자 1인당 예산은 아동·보육 부문에서 더 많이 늘었을 수밖에 없다.

일부에선 아동·보육 정책이 복지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는지에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오히려 가장 심각한 노인의 빈곤 문제에 재정을 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들 역시 정부가 사회보장을 확대할 때 중점을 둬야 하는 인구 집단으로 ‘노인→청년→중·장년→영유아·아동→청소년’을 꼽기도 했다(2018년 6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보장 대국민 인식조사’).

2016년 가처분소득 기준 아동의 상대적 빈곤율은 6.7%(중위소득 50% 미만)로, 전체 상대적 빈곤율(13.8%)의 절반 수준이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네 번째(2015년 기준)로 낮은 수치다. 반면 상대적 노인 빈곤율은 46.7%로, 노인 10명 중 절반은 빈곤선 아래 있다. 생애주기별로 봤을 때 가장 형편이 나은 아동에게 돈을 집중 투입하는 것은 ‘중산층·고소득자 복지’라는 평가가 일부에서 나오는 이유다.

물론 다른 세대와 계층에서도 복지의 양적·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2010년 시민들이 무상급식을 선택한 이후 보편주의(필요를 가진 모든 사람이 동등한 사회 급여나 복지 서비스를 누리는 것)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잡은 결과다. 그동안 정권에 따라 부침은 있었지만, 완전한 보편복지는 아니더라도 복지 수혜를 보편화하려는 노력이 진행돼왔다. 2014년 출발한 기초연금도 소득 하위 70% 노인을 포괄한다는 준보편적 성격을 띤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초연금 없는 노인은 재분배 효과 크지 않아

그 결과, 전체적인 분배 상황은 다소 개선됐다. 2018년 남재욱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이 발표한 ‘한국 복지국가 성장의 재분배적 함의’ 보고서를 보면, 2006~2016년 재분배로 소득이 가장 많이 증가한 가구는 1~10분위(가처분소득 기준) 중 가장 소득이 낮은 1분위였다. 다만 소득 하위 1분위도 쪼개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들 중 기초연금이라는 소득보장제도가 있는 65살 이상 노인의 불평등도는 비교적 크게 개선됐지만, 그렇지 않은 64살 이하 노동연령대 인구에서 재분배 효과는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간 복지 재분배의 수혜를 가장 누리지 못한 집단(노동연령대 인구 중 가처분소득 1분위 가구)에는 가구주의 나이가 많거나 여성이거나 고졸 이하 학력인 경우가 많았다. “노동연령대 인구를 놓고 볼 때 복지국가 성장의 수혜는 중상층 집단에서 뚜렷한 반면, 저소득 가구의 상황은 상대적, 절대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은 한국 복지국가 성장의 사각지대에 자리한 집단이 되었다.” 보고서의 결론이다.

지난 10년간 복지 수혜의 보편화가 이뤄졌음에도 모든 시민의 삶이 보편적으로 좋아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보편화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남재욱 부연구위원은 설명한다. 지금껏 ‘고용’과 ‘기여’를 조건으로 한 국민연금·건강보험 등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복지가 확대된 탓에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 등 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은 복지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하거나, 보험 가입자라 하더라도 적은 기여분만큼 적은 보장을 받았다는 뜻이다. 여기에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복지의 보편성을 확대하려면 보편복지 제도에 대한 고민과 함께 (노동시장 양극화 해소 등을 위해) 재벌·대기업의 수출 중심 경제구조 등도 함께 고민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는 의견을 보탰다.

더군다나 노동능력마저 없는 최빈층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공공부조는 거의 제자리걸음이었다. 기초생활보장 예산은 2010년 7조7865억원에서 2019년 10조9천억원으로, 10년간 49% 늘었다. 전체 보건복지부 예산 증가율(133%)의 절반도 안 된다. 중위소득 30% 이하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생계급여 수급자 수는 2015년 125만9천명에서 2018년 122만9천명으로 오히려 3만명 줄어들었다.

국내총생산 대비 11.1%, OECD 절반 수준

이처럼 복지 사각지대가 굉장히 넓고 보장 수준은 낮은 상황에서 보편·준보편 복지 확대는 전체 가구의 평균적인 삶은 개선했을지언정 저소득 가구의 불평등은 더 나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김태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포용복지연구단장이 1월 발표한 ‘저소득층 소득 감소 추세와 원인’ 자료를 보면 실업급여·아동수당 같은 사회보장 수혜금은 소득 하위 1분위(0~20%)보다 2~4분위(20~80%)에서 오히려 더 많이 받았다. 아동수당과 실업급여는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지급되고 있어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은 “보편복지 증가 속도에 견줘 공공부조 복지의 발전이 지체되다보니 ‘복지 불균등 발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복지 전문가나 진보 진영에서도 정부가 일을 못하는 가구나 일해도 가난한 가구, 이들이 가장 많이 분포한 노인에게 보충 급여나 서비스를 우선적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제한된 계층에 혜택을 집중하는 선별복지로 돌아가자는 주장과는 결이 다르다. 오건호 위원장은 “보편주의라는 것은, 누구든 최소한의 삶을 ‘보편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지 그 수단인 개별 제도가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며 “선별복지가 튼튼하게,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촘촘한 보편복지망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주하 동국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와 달리 서구에서는 보편복지와 선별복지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때로는 같이 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정부에는 보편복지와 선별복지라는 씨줄과 날줄을 잘 엮을 재정 여력도 있다. 보수 진영에선 ‘세금 중독’에 걸린 문재인 정부가 ‘퍼주기 복지’를 한다고 비난하지만 한국의 공공사회지출은 2018년 국내총생산 대비 11.1%(예측치)다. 국제 비교가 가능한 2015년 기준으로는 10.2%로, OECD 평균치(19.0%)의 절반 수준이다.

‘중부담-중복지’인 포용적 복지국가를 내세운 정부 역시 취약계층의 소득이 점점 줄어 전체 소득분배가 악화되는 추세를 되돌리려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다. 올해는 대표적 노동빈곤층 대책인 근로장려금(EITC) 지원 대상과 지원액을 두 배(2019년 3조8천억원) 늘리기로 했다. 또 비정규직, 일용직 등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빈곤층이 실직하면 일자리를 찾는 6개월 동안은 월 50만원씩 급여(2020년 1조5천억원 추정)를 주는 한국형 실업부조를 내년부터 실시할 계획이다. 이외에 비수급 빈곤층을 기초생활보장제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부양의무자 조건을 완화하고, 기초연금을 ‘줬다가 빼앗는’ 기초생활수급 노인에게 월 10만원의 추가생계비(연 4102억원) 지급도 추진할 계획이다.

박근혜, 말과 다른 증세 vs 문재인, 증세 손놔

그런데 정작 조세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 2017년 대선 당시 보편 증세를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기인 2017년 초고소득자를 겨냥하는 ‘핀셋 증세’를 하고 2018년 부동산 보유세를 찔끔 올린 것 외에 증세에는 손을 놓고 있다. 오히려 올해는 ‘서민 감세’ 명목으로 47조4천억원의 국세를 깎아줄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지난해보다 13.3% 늘어난 규모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문재인 정부에서 기한이 만료된 조세 감면 제도를 폐지하거나 정비하는 비중이 크게 줄어든 탓이다.

윤홍식 교수의 평가다. “박근혜 정부에선 (취임 대비) 2017년까지 조세부담률이 2%포인트 올랐어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많이 증세한 거예요. 조세부담률로는 감세한 적이 없어요. 이전 정부는 다 내렸다가 올랐다가 했거든요. ‘증세 없는 복지’를 하겠다고 했는데 실제 증세를 한 거예요. 그런 박근혜 정부를 딛고 일어선 문재인 정부는 최소한 그보다는 증세를 해야 하는데 가시적 움직임이 없어요. 굉장히 유감입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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