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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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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울면서 청원서를 받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인터뷰

“수많은 피해자가 직접 나서는 방법으로 청원 선택”
등록 2019-03-30 11:34 수정 2020-05-03 04:29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3월1~15일 베트남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을 만나 청원서를 받았다. 정용일 기자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3월1~15일 베트남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을 만나 청원서를 받았다. 정용일 기자

어두운 마당에 모인 십수 명의 사람 중에서 한눈에 알아보았다. 돌테이블에 앉아 있는 응우옌리(93). 꼭 20년 만이다. 칠순 노인은 이제 백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손님을 할아버지는 이제는 알아보지도,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우리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가족이 말했다. 그래도 가족은 할아버지 귀에 대고 다 함께 소리 질렀다. “한국에서 왔어요!” 그제야 할아버지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지팡이를 찧으며 외쳤다. “구.수.정, 구.수.정.” 흐릿한 기억 어딘가에서 노인은 20년 전 한 번 만난 낯선 이의 이름을 기어코 끄집어냈다.

“나더러 20년을 또 기다리라고?”

할아버지는 1999년 구수정 통신원(현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과 처음 만났다.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프억빈 마을에서다. 구 통신원은 1999년 5월 제256호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기사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처음 폭로한 뒤 1964~73년 한국 전투부대가 주둔했던 5개 성(꽝남성, 꽝응아이성, 빈딘성, 푸옌성, 카인호아성)을 중심으로 수십 개 마을을 돌며 피해자 진술을 채록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전체 민간인 학살 피해자 9천 명 중 100여 명의 목소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그 증언자 가운데 한 분이 응우옌리 할아버지였다. 한집에서 조카들까지 대가족이 모여 살던 할아버지네는 잔인한 한국군에게 가족이 많이 희생됐다. 당시에도 학살 30년이 지난 터라 할아버지는 “조카 이름까지 한명 한명 기억해내려고” 무척이나 애썼다. 그때 할아버지는 참 많이 울었다.

지난 3월5일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애써 한국군의 만행을 증언하지 않았다. 대신 구 이사가 내민 종이에 서명했다. 이름, 생년, 주소, 피해 지역과 날짜는 아들이 대신 적었지만 서명만큼은 스스로 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학살 피해자들의 청원서’. 1999년 생존자이자 목격자로서 학살을 증언했다면, 2019년에는 유가족으로서 한국 정부에 책임을 묻기로 한 순간이다. 청원서를 품고 돌아서며 구 이사가 손을 잡고 부탁했다. “꼭 다시 올게요. 건강하세요.” 할아버지가 간신히 말했다. “나더러 20년을 또 기다리라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구 이사가 3월1~15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과 꽝응아이성의 17개 마을에서 만난 103여 명의 ‘청원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이번 청원은 에서 구 이사가 처음 보도한 이후 시민사회가 한-베 과거사의 정의로운 해결과 평화를 위해 힘을 모았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의 시즌2다. 다만 더 이상 그들에게 ‘미안하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한국 정부가 나서라’고 외치는 일을 돕는다. “이제부터라도 피해자가 주체가 되어야 해요. 한국에서 일본 ‘위안부’ 문제가 일본군의 전쟁범죄지만 결국 우리의 문제인 것처럼, 결국 이 문제도 베트남이 풀어가야 하니까요.”

한베평화재단은 이들이 한국 정부에 ‘수많은 피해자가 있다’고 직접 알리는 방법으로 ‘청원’을 선택했다. 한국민이 아닌 외국인도 청원법에 따라 피해 구제나 공무원의 위법·부당 행위에 시정을 요구하는 일에 배제되지 않는다는 학계의 통설을 따른 것이다. 청와대를 상대로 한 청원서에는 진상 조사와 사실 인정, 공식 사과, 피해 회복을 위한 조처 등의 요구안이 담긴다. 이를 접수한 청와대는 사실 확인 등 심사를 거쳐 90일 안에(60일 연장 가능) 청원인에게 결과를 통보해야 한다.

베트남이 주체가 되어 풀어야 할 문제

“지난 20년을 통틀어 2015년과 2018년에 딱 세 분이 한국에 왔어요. 대부분 베트남의 깊숙한 농촌에 살고 계셔서 (도시인) 호찌민에도 평생 한 번 못 가본 이들이에요. 이분들이 한국에 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세 분 말고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달할 기회로 청원을 생각한 거예요.” 

1993년 호찌민대학에서 공부하다 한국군의 잔인한 범죄를 취재한 것을 계기로 줄곧 평화운동을 해온 구 이사에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집회·결사·시위의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 사회주의국가의 피해자들에게 (외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청원서를 들이밀었을 때 반응이 굉장히 걱정스러웠어요.” 그런데 정말 의외의 반응이었다. “이런 걸 하고 싶었어!” “나는 글자도 배우지 못한 무지렁이라 엄두도 못 냈지만 너무 하고 싶었어!”

한국에서 청원서를 들고 왔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일하는 시간을 피해 새벽에 3시간 동안 오토바이를 타고 트어티엔후에성 후에시에서 꽝남성 퐁니 마을까지 달려오기도 했다. 청원서를 다 받고 한베평화재단 지부가 있는 호찌민으로 돌아간 구 이사에게는 전화가 빗발쳤다. “나라도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 한다” “나도 청원에 힘을 보태고 싶다”고. 원래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가 주둔한 5개 성을 모두 돌아다니려 했던 구 박사도 이들의 간절함에 붙들려 빈딘성·푸옌성·카인호아성의 청원 작업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청원서를 끌어안고서 그들은 20년 전에 증언할 때보다 더 많이 흐느꼈다. 프억빈 마을에서 학살된 가족들의 처참한 주검을 목격했던 생존자 레티뚝(74) 할머니는 그날에 대해 처음 진술하고선 몸져누웠다.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숨을 못 쉬겠다”고 했다. 20년 전 “내가 울면 증언 기록이 안 된다”는 생각에 터져나오는 울음을 꾹꾹 눌러 참았던 구 이사도 이번엔 이들과 같이 울면서 청원서를 받았다. “20여 년 전 피해자 100여 명을 만난 뒤 부채감이 계속 있었어요. 그분들이 등 떠밀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못 왔겠죠. 개인적으로도 이번에 부채감을 완전히 덜어낸 느낌이에요. 여한이 없어요.”

15일간 통역사와 단둘이 17개 마을을 넘나든 구 이사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하루 2~3시간을 자는 강행군도, 사회주의국가에서 공포의 대상인 공안도 아니었다.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원 자격이 되는지 판단해야 해요. 그러면 현장은 늘 울음바다가 되거든요. 그 앞에서 ‘당신은 청원을 못합니다’라는 말이 정말 입 밖으로 안 나와요.”

사망한 희생자의 경우 유족이 대신 청원할 수 있는데 민법상 유족은 직계 존·비속만 인정된다. 형제자매 6명이 몰살당한 피해자는 그들의 부모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청원서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너무 억울하다”고 가슴을 쳤다. 현장에서 피해자가 청원 자격이 되는지 판단이 안 설 때 법률 자문을 해주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임재성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변호사와 연락이 잘 닿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그 시간을 피해자들은 정말 초조하게 기다려요. 손톱을 물어뜯기도 하고요.”

청와대를 상대로 한 청원서에 서명한 학살 피해자와 가족들이 요구안이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청와대를 상대로 한 청원서에 서명한 학살 피해자와 가족들이 요구안이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내가 왜 당신들에게 구걸하느냐”

청원을 거부한 이도 있다. 응오반머우.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티엔사 카이럼 마을 학살에서 가족 9명을 잃은 유가족이다. 카이럼 학살은 구 이사도 이번 청원 과정에서 처음 확인한 새로운 만행의 현장이다. 오랜 항미 투쟁 유공자인 응오는 집에 주석(한국의 대통령 직함)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렸을 정도로 공산당의 최고위급 당원이었다.

그는 “당신이 하는 일이 옳다”면서도 “피해자인 내가 왜 당신들에게 구걸하느냐”고 한국에서 온 손님을 내쳤다. 베트남 고위급으로 한국에 갈 기회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방문한 적 없고, 한국의 국비 유학생이 된 아들도 한국으로 보내지 않은 그였다. 원한이 깊었다.

응오가 한국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도 있다. “잠시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베트남 정부의 공식 입장을 당원인 내가 거스를 수도 없다”고 했다. 전쟁범죄 피해국인 베트남이 내부적으로 피해 조사는 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는 원인은 복합적이라고 구 이사는 설명한다. “베트남은 1973년부터 남-북베트남 무력 전쟁을 통해 통일한 국가잖아요. 그런데도 서방의 예상과 달리 이른 시일 내 상처를 봉합하고 통합했어요. 과거사를 전면에 등장시키면 통일 과정의 상처까지 다 터져나올 수밖에 없죠. 또한 한국군 학살 문제를 들추면 미군 학살, 프랑스군 학살, 일본 점령기 200만 명 아사(굶어 죽음) 등 모든 과거사가 한꺼번에 터져나올 것을 우려하겠죠. 거기에 한국은 10여 년간 대베트남 투자 1위국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니 당연히 한국 정부를 의식할 수밖에 없죠.” 

이런 분위기에서 구 이사는 피해자에게 청원서를 받으러 학살 피해 마을들을 다니겠다고 베트남 정부의 허락을 구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외국인이 관광지가 아닌 농촌·산간 지역을 다니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고, 연구 목적을 가진 이는 연구 비자를 받아야 하지만 애초에 포기했다. “일정상 한 마을, 한 집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적었지만 공안이 혹시 올까봐 늘 게릴라식으로 청원서를 받고 빠졌어요.”

조심해도 낯선 이방인의 존재는 쉽게 들통났다. 하루는 늦은 밤 마을을 빠져나오다가 길거리에서 현(군 단위) 공안과 마주쳤다. 높은 공안이었다. “허가를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첫 마을, 첫 집이다”라고 둘러댔지만 공안은 이미 구 이사의 동선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공안은 3시간 동안 구 이사를 억류하고 있다가 풀어주었다. “그래도 지방 당국이 한국의 청원 작업을 다 알면서 눈감아준다는 걸 느꼈어요.” 마을 공안에게는 수시로 발각됐다. 그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나도 같이 데려가라”며 구 이사를 편들어줘서 체포된 적은 없었다. “사회주의국가에선 ‘공안’ 소리만 들어도 기겁하는데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저를 지켜준 거죠. 결국 마을 공안도 같이 증언을 듣다가 울어버려요. 자기 마을 일이기도 하고 가족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공안도 눈감아준 청원 물결

이렇게 모인 103개의 청원서는 이제 청와대를 향한다. 4월4일 꽝남성 학살로 가족을 잃고 온몸에 총상을 입은 생존자인 두 명의 응우옌티탄(하미 학살과 퐁니·퐁넛 학살)이 직접 청원서를 청와대에 낸다. 이들은 2018년 4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 원고로 참석해 학살을 증언하고 원고 승소 판결을 얻어낸 공로로 올해 4·3평화상 특별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청원서가 접수되면 한베평화재단은 한국에서 청원 운동을 시작한다. 누리집에 피해자들 사진과 사연을 공개하면 ‘나는 피해자와 함께한다’는 한국인의 ‘연대 청원’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청와대가 책임 있게 피해자들의 요구 사항에 답변하도록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하는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 청원인이 20만 명이 넘으면 정부가 답변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청원서를 외교부와 국방부에도 내고 유엔에 전달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청원서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부디 한국 정부가 우리의 간절한 목소리에, 용기 내어 꺼낸 목소리에 응답해줄 것을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이들의 당연한 요구에 청와대는 얼마나 응당한 답을 내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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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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