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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이런 노조는 어떠니?

‘노조는 이전 시대의 유물’이라는 1987년생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새로운 노조들’
등록 2019-03-12 10:33 수정 2020-05-03 04:29
박경효, 배용관, 서성훈의 <현대노동운동사>. 울산노동역사관 제공

박경효, 배용관, 서성훈의 <현대노동운동사>. 울산노동역사관 제공

“매운 연기 속에서 빨간 깃발이 휘날리고,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뛰고….” 1987년생인 아들이 대학 입학 자기소개서에 적었던 내용이다. 아들이 이제 직장을 다니는 30대 초반이 되었다. 1987년 이후 빈번히 열렸던 노동조합(노조) 집회에 종종 참석해 집회 포스터에도 등장했던 아들이, 이제는 ‘노조는 이전 시대의 유물이 아니냐’며 되묻는다. 1987년생인 한 사람의 변화가 우리 사회 노조에 대한 인식 변화를 대변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 주변에서 듣는 이런 개인들의 이야기가 변화의 한 조각을 보여주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85.5%“노조 필요하다”, 조직률 10.7% </font></font>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경험이었던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당시 쟁의에 참가한 노동자 수, 새로 만들어진 노조 수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에 박수를 보내던 시민들의 지지라는 측면에서도 좀 나이 든 세대에게는 가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았다. 이후 폭발적으로 결성됐던 노조 중 대기업을 중심으로 적은 수의 노조가 살아남았지만, 당시 노조운동은 조합원들의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향상을 위한 조직 이상의 운동이었다. 시민들에게 노조는 사회 약자를 대변하고 이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조직이었다. 이 틀에서 이른바 ‘1987 노사관계 레짐(체제)’이 만들어졌다. 현재 30여 년간 지속된 이 레짐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과연 노동자와 시민들의 노조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2017년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국민의 85.5%가 “우리나라에서 노조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젊은층을 포함해 긍정적 답변 비율이 연령별로 고르게 분포돼 있었다. 62.0%가 “근로자들은 기업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70.3%가 “노동조합은 기업의 부당한 대우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한다”고, 72.1%가 “노동조합은 근로자의 고용안정에 매우 중요하다”고, 59.9%가 “노동조합이 있으면 근로자의 임금이 더 많이 올라간다”고 답한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기업의 부당한 대우로부터 보호, 고용안정, 임금 등 조합원이 받을 혜택을 위해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가입할 의사가 있는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2017년 10.7%로 절대다수의 노동자가 노조원으로서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이와 관련해 정규직만을 위한 노조, ‘강성 귀족노조’라는 용어도 난무한다. 앞의 보고서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엿보인다. 국민은 ‘노동조합이 누구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는가?’란 질문에 “노동조합 간부나 일부 근로자의 이익”(46.1%). “노동조합원인 근로자의 이익”(32.1%), “전체 근로자의 이익”(21.8%)으로 답함으로써 현재 노조가 조합원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인식함을 알 수 있다. 노조가 있는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청년층이 현재 노조들이 자신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느끼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미래의 노조 중점 활동에 대해서도 고용안정이나 임금 인상 등 조합원의 근로조건 개선보다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 보호나 사회보장·세제 등 사회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과거보다 더 많이 지적하고 있다.

박경효, 배용관, 서성훈의 <현대노동운동사. 울산노동역사관 제공

박경효, 배용관, 서성훈의 <현대노동운동사. 울산노동역사관 제공

<font size="4"><font color="#008ABD">고용불안 어느덧 20여 년 </font></font>

한국에서 정치 민주화와 노조운동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박종철 사건부터 이한열 사건으로 이어진 당시의 민주화투쟁에 조응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면, 2016년 촛불혁명에는 일반 시민과 함께 노조들이 핵심 주체로 참여했다. 노조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사회 전반의 정치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앞의 보고서를 보면, “정치민주화에 노동조합이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답변이 1989년 61.7%, 2007년 35.4%, 2010년 39.9%, 2017년 57.8%로 정치적 민주화 요구의 분출 분위기와 같이 움직인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동시에 1987년과 마찬가지로 2016년의 촛불혁명은 젊은층을 비롯해 기존 노조운동에 포괄되지 않았던 계층에게 직장 민주화에 대한 불씨를 남겼다. 그 결과는 1987년과 같이 전통적 노조로 가입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노조 결성으로 이어졌으며, 임금과 고용안정 외에 직장에서 갑질과 성희롱 등의 이슈가 사회적으로 크게 확산된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노조의 등장과 덜 중요하다고 여겼던 이슈들의 전면화는 고용 상황을 반영하기도 한다. 고용불안이 일상적 현상이 된 지 어느덧 20여 년이고, 이제는 계약직·시간제 등 불안정 고용 형태를 넘어 특수고용 종사자 등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경계에 걸친 다양한 고용(계약)관계에 더 많은 사람이 종사하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아무나 노조 세대’가 나오게 되었으며, 이들은 기존 노조들과 다른 활동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조라는 기존 틀만이 아니라 노조가 아닌 다양한 조직체도 결성하고 임금보다는 일과 생활의 균형이나 직장 내 민주주의 이슈를 추구하는가 하면, 조합원 결집 방법도 기존 집회보다는 소셜네트워크를 선호하는 등 조직 형식과 내용, 운영 방식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사업장이나 기업을 뛰어넘는 직종별·계층별 노조와 조직체들의 결성은 기존 한국 노조의 한계 돌파라는 희망을 던져주는 등 정형화된 노조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생활과 밀착된 활동을 펼치는 선도적 노동자들의 조직체 또한 노동운동을 사회운동과 결합하는 싹을 보여주고 있으며, 일부 조직체는 직업 교육을 매개로 직종별 이해 대변 기구를 모색하고 있다. 또한 몇몇 조직체는 노동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고용주를 포함하는 조직화와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노조라면 기존 노조에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아들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font size="4"><font color="#008ABD">노동자들 간에도 심화되는 양극화</font></font>

그러나 새롭게 대두된 노조운동이 과연 기존 노조운동의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전통적 노조들이 이미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실현하는 그룹이라면, 새로운 노조와 조직체들은 이제 막 자신들의 다양한 이해를 표현하기 시작한 그룹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90%에 이르는 노동자는 자기 이해를 표현할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정치적 양극화를 심화하고 있다. 기존 노조와 새로운 노조 또는 조직체들이 연대해 조합원만을 위한 노조운동이 아니라 노동자 전체, 특히 미조직 취약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운동으로 나아갈 때만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김혜진 세종대 경영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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