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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수치 ‘외교부 의견서’

양승태 재판 거래의 중심에 있는 문건…

외교부는 과거사 해결할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등록 2019-02-22 13:43 수정 2020-05-02 04:29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월23일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월23일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과거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동안 과거사 문제를 외면했던 아베 정부가 부랴부랴 한국에 강제징용 관련 협의를 제안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 외교부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지난 2월15일 과 만난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협회 회장이 한국 외교부에 한 주문이다. 지난해 10월30일 선고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근거로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 피해자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가해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조언도 했다.

일본 정부의 적반하장 격 공격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2016년 6월24일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2016년 6월24일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하지만 외교부의 태도는 우쓰노미야 변호사의 기대와 거리가 멀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월16일 독일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의 협의 요청에 “계속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일본은 앞서 1월31일 한-일 국장급 회의에서 한-일 청구권 협상에 따른 정부 간 협의를 요청했다. 아베 정부는 일본 언론을 통해 한국 정부가 대법원 판결의 부당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협의를 거부한다는 식으로 공격한다. 전쟁 가해자가 도리어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외교부는 왜 일본 정부가 제안한 협상에 소극적일까. 외교부가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검찰의 사법 농단 수사 결과에서 대략적인 배경은 추론할 수 있다. 검찰 수사 결과 외교부는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를 들쑤셔 강제징용 재상고심에 개입하도록 했다. 외교부는 일본 전범기업에 배상 책임을 물린 2012년 5월24일 대법원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 판결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취지에 어긋난다고 판단하고 박 전 대통령에게 이런 취지의 보고를 했다.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제 피해자의 개인청구권까지 모두 소멸됐다는 게 박정희 정권 이후 외교부가 유지해온 기본 시각이었다. 이는 ‘한-일 청구권협정에도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대법원 판결과 정반대의 해석이다.

검찰은 외교부의 충동질이 박근혜 정부 초기에 본격화한 것으로 파악한다. 앞서 이명박 정부 때는 외교부가 2012년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해 8월 이 전 대통령이 떨어지는 지지율을 만회하려고 뜬금없이 독도를 방문하는 등 대일 강경 기조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외교부의 이런 분위기는 이듬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확 바뀐다. 김앤장 고문을 지낸 윤병세씨가 2013년 3월 박 정권의 초대 외교부 장관에 취임하자 청와대에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윤 장관은 앞서 김앤장 고문으로 있을 때 김앤장이 미쓰비시중공업, 신일철주금을 위해 따로 꾸렸던 법률팀을 합쳐 만든 ‘강제징용 재판 대응 태스크포스(TF)’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앤장에 둥지를 튼 외교부 전관들도 가세했다. 주일대사를 지낸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은 2013년 1월 미쓰비시중공업 고문인 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일본대사와 윤병세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의 면담을 조율했다. 무토 전 대사는 이라는 책을 쓴 극우 인사다. 유 전 장관은 나중에 2015년 한-일 포럼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검찰은 설명한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박 전 대통령

외교부 보고를 받은 박 전 대통령은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대법원 판결과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탓으로 보인다. 그러다 2013년 여름 서울고법이 대법원 파기환송심에서 신일철주금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내리자 외교부의 행보가 빨라졌다. 외교부는 대법원에 ‘2012년 대법원 판결은 외교적,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있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대법원 판결이 회부되어 그 효력이 부정될 수 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등의 불만을 제기했다. 또 청와대에도 파기환송심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한-일 관계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다.

결국 2013년 12월1일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윤 장관과 황교안 법무부 장관, 차한성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불러다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윤 장관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으로, 입법·사법·행정부 차원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대법원 심리 과정에서 이 점을 각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배상 판결 확정시 정치적, 외교적 해결은 불가능해지므로 사법적 해결 외에는 대안이 없는 현실을 고려해 기존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보고했다. 그러자 차 전 법원행정처장은 “왜 이런 얘기를 2012년 대법원 판결 때 안 했느냐. 브레이크를 걸어줬어야지”라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 강제징용 재상고심의 전원합의체 회부를 유도하고 동시에 재판 진행을 지연시키면서 원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 취하를 유도하는 ‘투 트랙’ 방식이 결정됐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이처럼 청와대와 사법부를 들쑤셨던 외교부는 정작 박 전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기 지시한 2015년 무렵에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했다. 검찰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이 한-일 청구권협정과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의 연관성을 인식한 뒤부터 적극적인 대책을 독려했지만, 외교부는 ‘전범기업의 편을 들고 있다’는 비난이 두려워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청와대가 주도한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자 외교부는 더욱 몸을 사렸다. 대법원은 강제징용 재판의 전원합의체 회부를 위해서는 외교부 의견서가 필요하다고 압박했지만 외교부는 의견서 제출을 차일피일 미뤘다.

“검토”에서 입장 바뀐 외교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018년 10월26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018년 10월26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그러자 청와대는 외교부 당국자를 불러다 강하게 질책했고, 결국 2016년 11월29일 외교부 의견서가 대법원에 제출됐다. 양승태 대법원은 이 의견서를 근거로 전원합의체 회부를 추진했으나 박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부의 출범 등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강제징용 재상고심은 김명수 대법원장 때인 2018년 7월27일 전원합의체에 회부됐고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이 확정됐다.

검찰은 사법 농단 수사 초기 외교부 압수수색 때 입수한 이 의견서가 일본 전범기업에 유리한 내용으로 작성돼 강제징용 재판 거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18년 10월26일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이 의견서에 대한 의원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천정배 민주평화당 위원이 의견서 철회 여부를 묻자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강 장관은 이 의견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는 취지의 일본 정부 입장을 부정하지 않는 내용을 담아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음을 의식해 유감의 뜻까지 밝혔다.

하지만 외교부는 사법 농단 수사가 끝난 지금 5개월 전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내놨다. 이 2월18일 이 의견서의 철회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런 답변을 보내왔다. “외교부가 이 소송과 관련해 제출한 문서는 특정 주장에 대한 의견이나 입장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외교부 소관 업무와 관련된 참고 정보를 취합, 정리한 것으로서 내용적으로 철회 내지 변경 대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의견서가 개인청구권에 대한 여러 해석을 담았을 뿐 특정 의견을 강조하거나 지지한 게 아니기 때문에 철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외교부의 설명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이 의견서가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뒤집으려는 목적으로 작성됐기 때문이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 외교부 의견서가 미쓰비시 등 “일본 전범기업에 유리한 내용”이라고 분명하게 적었다. 검찰 관계자는 “여론을 의식해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았겠지만 내용은 전범기업에 유리한 게 맞다”고 말했다.

검찰 “외교부 설명은 눈 가리고 아웅”

의견서 철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가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제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기존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지다. 개인청구권 소멸 문제는 앞으로 일본 정부와 협상할 때 기본 원칙이 되기 때문이다. 은 외교부 당국자에게 개인청구권에 대한 외교부의 입장을 물었으나, 그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게 외교부의 공식 입장”이라고만 답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을 대리하는 최봉태 변호사는 “외교부 안에는 여전히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도 소멸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핵심 보직에 있다. 외교부가 일본과의 협상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이다. 전직 대법원장은 강제징용 재판 거래로 형사처벌을 앞두고 있는데, 이를 부추긴 외교부는 아무런 반성도 없이 정권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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