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한국과 일본, 함께 판도라의 상자를 열자

한국 정부는 정면으로 나서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에 기금 출연 요구해야
등록 2019-02-23 13:38 수정 2020-05-03 04:29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2018년 9월25일(현지시각) 유엔총회 참석차 방문한 미국 뉴욕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2018년 9월25일(현지시각) 유엔총회 참석차 방문한 미국 뉴욕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 노동을 강요당한 ‘징용공’(한국에선 ‘강제동원 피해자’라고 함)들의 배상 요구를 받아들인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 갈등이 커지고 있다. 먼저,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에 배상을 명령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선 (한·일 모두) 삼권분립의 법치국가인 이상 한국 내에서 활동하는 일본 기업도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만약 일본 기업이 배상금 지급을 면하려면 선제적으로 원고(피해자) 쪽과 협의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두 기업은 협의하자는 한국 쪽 원고·대리인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거부하도록 지도하기 때문인데, 협의하지 않는 이상 지급액만큼 자산이 압류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됐던 판결

강제집행을 회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지난 1월 한국 정부에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협의를 제의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답변은 아직 없다. 한국 정부는 “협의에 응할지를 포함해 이들 문제의 대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 판결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됐던 일이다. 취임 뒤 1년6개월이 지나도록 문재인 정부가 아무런 대책을 검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안이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 정부의 이런 태도에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 때리기’를 거듭하고 있다. 냉정하지 못한 양국의 대립 상황은 매우 위험하며 상호 신뢰 관계를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선 미국 의회 등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의 외교는 남북 화해와 그 실현을 위한 한-미 관계 조율에 집중돼 있어, 한-일 관계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팬 패싱’ 혹은 ‘재팬 무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불협화음이 계속 고조돼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일본 언론은 전한다.

나는 아베 신조 정권이 의도적으로 “일본은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한국”이라고 한국에 비판적인 여론을 부추기고, 일본 언론이 그 영향을 받아 한국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며 위기를 과장한다고 본다. 이른바 ‘인상 조작’이다. 그 결과 일본 안에선 감정적 반한 분위기가 광범위하게 퍼져버렸다. 매일 신문·방송·주간지 등이 이웃 나라를 비난하고 매도하는 상황은 정상적이지도 건전하지도 않다. 70만 재일동포들은 혹시라도 ‘증오범죄’가 확산될까 걱정하고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신일철주금 등 일본 기업들의 재산이 압류되는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만 아직까지 실패하고 있다. 일본이 던진 ‘협의’ 제의를 한국이 받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솔직히 아쉽다. 일본 기업들의 자산이 압류돼 피해자에게 지급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 피해자들에겐 기쁜 일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일본 기업과 사회는 점점 반발 수위를 높여, 한국을 더 강하게 비난할 것이다.

‘위안부’와 원폭 피해자 문제까지 함께
2014년 9월23일 일본 도쿄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반한 시위에 맞서 시위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4년 9월23일 일본 도쿄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반한 시위에 맞서 시위하고 있다. 연합뉴스

바람직한 것은 일본 기업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해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면서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일본 기업들은 판결에 불복하는 상황에서 재산을 강제로 빼앗기는 꼴이 된다. 어쩔 수 없이 돈은 내지만 반성도 않고, 사죄도 없는 상태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 강제동원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대법원 판결은 절반만 실현되는 것이다.

판결을 무시하고 배상금 지급에 응하지 말라고 기업들을 설득해온 일본 정부는 그래도 좋을지 몰라도 한국 정부는 곤란할 것이다. 일본 기업은 반성 없이 앞으로도 태연히 한국에서 이윤을 추구하며 영업을 계속하게 된다. 또 대법원 판결로 구제되는 원고는 한정돼 있다.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대다수 피해자들도 사과와 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한국 정부엔 부정의와 불이익을 당하며 오랜 시간 인권이 침해된 자국민을 보호하고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일본 정부도 자국 기업이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뿐 아니라 당시 이뤄진 강제동원을 시행한 당사자로서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책임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일본군이나 기업에 동원한 것은 ‘국책’으로 실시된 것이다. 전체 계획을 입안하고 모집이나 이송 등에 조선총독부나 한반도 각 지방 사무소 등이 깊이 관련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 정부가 대법원 판결 이후 청구권협정에 따른 ‘협의’를 제안한 것은 의미가 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면 협의의 여지가 없다. 일본 정부도 내몰리는 만큼 한국 정부는 협의에 응해야 한다. 그리고 ‘징용공’ 문제뿐 아니라 ‘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잔류 한국인, 한국인 B·C급 전범, 한국인 시베리아 억류자 등의 문제도 함께 협의하도록 (일본 정부에) 제안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이 모두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일으킨 중대한 인권침해다.

1990년대 초 한국의 많은 피해자가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기 시작했다. 2011년 ‘위안부’ 문제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2012년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과 지난해 확정판결로 판도라 상자는 완전히 열렸다. 일본 외무성과 지식인 사이에서 ‘이 상자를 열지 말라’는 목소리가 있지만, 이는 시대착오적 인식이다.

북-일 국교 정상화 교섭 내용도 크게 바뀌어야 한다. 2002년 북-일 평양선언이나 2014년 스톡홀름 합의를 통해 양국은 한-일 국교 정상화 때와 같은 ‘경제협력 방식’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피해자 구제를 둘러싼 오랜 갈등을 생각할 때 이는 수정, 개선돼야 한다. 물론 기존 선언이나 합의를 파기하란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동안 간과됐던 과제와 새로 나온 과제를 추가해야 한다. 한국 대법원 판결도 한-일 청구권협정에 비판적이긴 하지만 협정 파기까지 명령한 것은 아니다. 이 협정에 따른 조처에서 누락된 이들을 구제하는 추가적 조처를 명령했을 뿐이다.

외교적으로 (일본 정부는) ‘이것으로 끝’이라는 종지부를 찍기 위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라는 문구를 자주 써왔다. 하지만 동쪽으로 알류샨열도에서 서쪽으로 인도 콜카타까지 광대한 지역에서 전쟁을 벌인 대일본제국의 무모한 전쟁 뒤치다꺼리가 한 장짜리 조약이나 협정·합의에 따라 쉽게 끝날 리 없다. 피해자는 일본 국민을 포함해 2300만 명을 헤아린다. 그 개개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은 대부분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가능한 범위에서 뒤늦게 깨달은 가해 사실에 대해 성실히 마주하고 사과와 보상을 이어가는 것이 가해국·가해기업·가해국민의 성의이자 책무이다.

166만 명에게 5조5500억원 지급한 독일

독일은 유대인들에게 나치 독일이 저지른 반인도적 학대와 범죄에 대한 보상을 일찌감치 마무리했다. 그러나 독일 기업 등 민간이 저지른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98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강제노동보상기금 설립 작업을 시작해 2000년에 완성했다.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라는 이름의 이 기금은 독일 정부와 독일 기업이 총액 100억마르크(약 5조5천억원)를 절반(50%)씩 부담해 만들었다. 기금은 이후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년 동안 98개국 피해자 166만5천 명에게 43억7300만유로(5조5500억원)를 지급(1인당 평균 400만원)했다. 또 도중에 기금이 떨어지자 독일 정부가 자금을 추가 출연했다.

한국의 경우 청구권협정에 따른 경제협력금이 한국 정부와 포스코 등 한국 기업에 흘러 들어갔다. 그에 따라 한국 정부와 기업들도 기금에 상응하는 출연을 할 의무가 있다. 즉, 한국 정부·기업+일본 정부·기업이라는 ‘2+2 공동출자기금’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한·일 변호사들의 제안은 합리적이다.

물론 일본 쪽이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상 때문에 한국에선 기금 설립에 부정적 의견이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고 포기해도 괜찮을까. 가해자 쪽이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지 않으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 정부는 주저하지 말고 정면으로 나서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에 기금 출연을 요구하고, 함께 문제 해결에 나서자고 말해야 한다.

일본 세금 10억엔에 대한 설명 있어야

문재인 대통령은 2016년 대선 당시 일본과 정상회담, 연 2회 셔틀외교 부활, 한·일 역사 문제와 다른 외교 과제의 분리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유감스럽게도 취임 뒤 1년 반이 지났지만 어느 것 하나 이행되지 않았다. 서울과 도쿄는 비행기로 불과 2시간여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문 대통령은 더 자주 일본을 방문해 아베 총리뿐만 아니라 일본 시민들에게 한국은 왜 이런 인권 문제와 역사 인식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지 직접 말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바빠서 방일하지 못한다면 특사라도 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의거한 일본 쪽 출연금 10억엔이 현재 공중에 떠 있다. 이 10억엔은 아베 총리나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상의 ‘포켓 머니’가 아니다. 일본 국민의 세금이다. 왜 한국이 2015년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하고 새 대응책을 강구하려 하는지, 그 경과나 배경에 대해 일본 국민에게 직접 설명했으면 한다. 대다수 일본 국민은 정중한 설명이라면 한국 정부의 방침 전환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협의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아리미쓰 겐 전후보상네트워크 대표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아리미쓰 겐은 1990년대 초부터 30년 가까이 일본 전후 보상 운동에 매달린 대표적 활동가다. 일본의 진보적 시민단체와 법조인, 민주당 등 야당 정치인들과 친분이 두텁다. 1951년생으로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나왔으며, 현재 전후보상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다. 보상 운동에 나서기 전엔 아시아인권기금 사무국장으로서 난민·소수민족 지원 활동을 벌였다.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