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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 간음시에만 없었다?

최악의 판결에 ‘안희정 1심’…

형법에서는 위력을 ‘관계’로 해석하지만 성폭력에서는 적용 안 돼
등록 2019-02-15 16:02 수정 2020-05-02 04:29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2심에서 징역 3년6개월형을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법정 구속돼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2심에서 징역 3년6개월형을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법정 구속돼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피고인을 징역 3년6월에 처한다. 피고인에 대하여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한다. 피고인에 대하여 아동, 청소년 관련 기관 등에 5년간 취업 제한을 명한다.”

지난 2월1일 오후 3시50분께,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312호 법정에서 홍동기 부장판사가 주문을 읽어 내려갔다. “공소사실이 많아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일어서서 들으라”는 재판부의 명령에 약 80분 동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선고 내용을 듣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차기 대선 주자로 평가받던 정치인에게 도덕적 책임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책임을 묻는 순간이었다.

피해자 심리만 살피며 ‘성인지 감수성’ 언급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하고 강제추행(업무상 위력·위계에 의한 간음, 추행)하는 등 범죄 혐의 10가지 중 단 한 가지를 뺀 9가지 공소사실마다 재판부가 유죄로 판단하자, 안 전 지사의 비서였던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씨 쪽 변호인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선고가 끝나자 방청석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소리와 박수가 나왔다. 김씨 쪽 변호인단은 눈물을 터뜨렸다. 2018년 8월 1심에서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뒤 6개월 만에 바뀐 눈물이었다. 김씨가 방송에서 피해를 말한 이후 약 11개월 만이었다.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검찰국장에게 성추행 피해를 당했고, 이후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는 피해 말하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됐다. 이 흐름에서 안 전 지사의 사건은 직장 같은 곳의 업무상 관계 등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에서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했다. #미투 운동이 퍼진 이후 첫 판결이었던 안 전 지사의 1심은 법원이 ‘업무상 위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로 주목받았다. 직장 내에서 말과 행동으로 일상적인 성폭력을 가하는 권력자에겐 경종을, 피해자에겐 위로를 줄 수 있는 가늠자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피해자다움’을 따지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인하고 ‘위력이 존재했지만 행사되지 않았다’며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안 전 지사의 1심 판결이 과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가 공동으로 꾸린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에서 2018년 최악의 판결로 선정된 이유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안희정 사건은 폭행·협박 수준으로 위력 행사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성인지 감수성’ 판결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위력 성폭력’과 관련된 토론회에서 한 교수가 ‘피해자에게 그때 왜 도망치지 않았냐고 사후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정의했는데, 1심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심리적으로 얼어붙음이 있었는지 등 피해자의 심리를 살피는 것 정도에 성인지 감수성을 끼워맞췄다”고 평가했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따지면서 가해자 진술은 확인하지 않고 도외시한 부분이 많았다. 피해자 진술과 함께 가해자 진술도 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 전 지사에게 적용된 형법 제303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는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서 간음한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대법원(대법원 1976년 2월 174도1519 판결, 대법원 2009년 9월24일 선고 2009도6800 판결 등)에 따르면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이라 함은 직장의 내규 등에 의한 직제상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관계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직장 내에서 실질적으로 업무나 고용관계 등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의 경우도 포함한다. 그동안 ‘업무상 위력 간음’ 판결에서 인정한 보호·감독 관계는 미용실 주인의 남편과 종업원, 정신병원 요양보호사와 조현병 환자 등이 있다.

위력상 간음 기소율 2016년 4%
연극배우들을 상습적으로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미투 운동’ 이후 첫 실형 판결이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연극배우들을 상습적으로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미투 운동’ 이후 첫 실형 판결이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형법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미성년자, 장애인, 업무상으로 한정돼 있다.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업무·고용 기타 관계’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포괄한 규정을 둔 것은 한국 내 특수한 위계적 문화를 반영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동안 장애인과 미성년자에 대한 위력에 의한 간음은 상대적으로 법원에서 잘 인정됐던 반면, 성인 여성이 업무 중에 겪을 수 있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과 추행은 인정이 쉽지 않았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 혐의로 검찰에 접수된 사건은 2013년 235건, 2014년 286건, 2015년 364건, 2016년 423건, 2017년 480건으로 매년 늘었다. 하지만 2013년 38.49%이던 기소율은 2016년 4%로 낮아졌다. 특히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의 경우 2016년엔 접수된 25건 중 단 한 건만 기소됐다. 최윤정 변호사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은 판례가 적을뿐더러 안 전 지사의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며 김씨에 대해 성적 주체성이 높다는 이유를 든 것처럼, 성인 여성에 대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검찰 단계에서 불기소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시인 ㄱ씨에게 성폭행과 강제추행을 당해 고소한 지지(필명)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지씨가 고소한 사건은 사법부 판단을 받지도 못한 채 검찰 단계에서 끝났다. 가해자 ㄱ씨는 시를 가르쳐주는 선생님, 지지씨는 등단을 목표로 시를 지도받는 학생이었다. 지지씨에 따르면, 지지씨는 2016년 ㄴ씨의 사무실에서 ㄱ씨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 지지씨는 “등단을 목표로 2년쯤 준비한 상태였고, 자신이 ‘한 일간지 신춘문예 심사위원이라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세 번째 피해 땐 내가 우니까 ㄱ씨가 성폭력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이후 또 다른 피해자와 공동으로 고소했지만 검찰은 ‘사설 학원강사와 학원생’이라는 등의 이유로 업무상 위력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봤다. 검찰은 “ㄱ씨는 사설학원을 운영하며 일반인을 상대로 글쓰기 수업을 하는 강사이며, 피해자는 수업료를 내고 수업을 수강하는 수강생으로서 ㄱ씨가 이런 관계를 통해 위계 또는 위력으로 강간 또는 강제추행을 할 수 있는 업무·고용 기타 관계로 보호·감독을 하는 지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지지씨는 “예체능은 거의 학원에서 시작한다. 예체능은 선배가 선생이라 강한 위력을 갖기 마련이고, 문단계의 유명한 선배는 출판에도 영향력이 닿아 있어서 책을 못 낼 수도 있다”고 항변했다. 지지씨는 추가 피해자들을 모아 항고를 준비 중이다.

지지씨처럼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을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로 고소한 밀양연극촌에서 안무를 맡았던 ㄴ씨 역시 위력이 작동하는 지위관계가 아니라고 법적 판단을 받았다. 2018년 1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ㄴ씨가 피해 당시 정식 단원이 아니었고, 극단의 안무를 도와준 것이었으며, 피해 당시 다른 곳에 취업이 예정됐기 때문에 “이 전 예술감독의 말을 듣지 않으면 생계가 위협된다거나 극단에서 불이익을 받을 만한 상황에 있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최악의 판결로 꼽힌 안 전 지사 사건의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김씨를 업무상 보호 또는 감독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임을 인정했다. 안 전 지사가 지방별정직 공무원인 김씨의 임명·휴직·면직 권한을 가진 충청남도의 도지사이며, 차기 대통령선거 후보로 출마가 예상되고, 정치·경제·사회적 유력 인사들과 인적 네트워크가 있는 점 등을 들었다. 1심과 2심의 판단이 달라지는 지점은 안 전 지사가 간음 행위를 할 당시 위력이 있는 상태였느냐는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나눠 안 전 지사가 성폭력 피해를 입힐 당시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고 봤다. 1심 재판부는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①위력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②그 위력이 행사되어야 하고 ③행사된 위력과 간음·추행 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되어야 하며 ④그로 인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과가 발생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새벽에도 수시로 맥주와 담배 등을 가져올 것을 지시하며 수행비서인 김씨를 호출했던 안 전 지사의 위력이 간음 당시에만 존재하지 않은 남녀 관계로 본 것이다.

위력 존재하나 행사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나누는 것은 문제적이라고 설명했다.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위력 행사를 따지는 건 위력을 과도하게 좁게 해석하는 것”이라며 “대법원 판례를 보면 위력은 유형력이나 무형력인데, 무형의 지배력은 (범행) 당시에 행사할 필요가 없다. 행사한다면 협박의 범위로 들어간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거나 마치 불이익을 줄 것처럼 행동하거나,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하거나, 안 전 지사처럼 ‘과중한 업무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 위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형법에서 ‘업무상 위력’을 별도로 둔 것은 법을 해석할 때 행사를 보는 게 아니라 관계를 보라는 것이다. 문제는 업무상이 아닌 다른 관계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있기도 한데 현행법에선 이를 적용할 수 없다. 위력에 의한 간음을 미성년, 장애인, 업무상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폭행·협박처럼 사실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력을 하나의 행위 수단으로 넣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1심은 안 전 지사 쪽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업무상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는 근거로 삼았다. 김씨의 증언을 보면, 안 전 지사는 김씨가 수행비서로 정식 임용된 지 20여 일 만에 간 첫 해외 출장인 2017년 7월3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과 2018년 2월25일 서울 마포의 한 오피스텔 등에서 김씨를 호텔 객실로 불러 “나를 안아주게, 위로해주게”라고 말했다. 안 전 지사가 김씨를 강제추행하거나 성폭행하기 전에 주로 쓰는 말이었다. 김씨는 당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고 진술했다.

왜 저항하지 않았나, 피해자를 탓하다

1심 재판부는 “간음 행위 전 단계에서 피고인이 행한 신체 접촉은 맥주를 들고 있는 피해자를 포옹한 행위뿐이고, 언어적으로는 외롭다고 안아달라고 말한 것뿐이다. 별다른 유·무형의 위력이 행사된 사정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피해자가 주장하는 이 당시 피고인의 언행이 성인 여성의 자유의사를 제압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의 위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인정하기도 어렵다”고 봤다. ‘주체적인 여성’ ‘학벌 좋은 여성’이 위력에 의한 간음을 당했을 리 없다는 안 전 지사 쪽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도 안 전 지사의 위력이 없었다는 근거가 됐다. 1심 재판부는 “적어도 안 전 지사의 행위가 미투 운동의 사회적 가치에 반한다고 언급하거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가는 등으로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며 저항하지 않은 피해자를 탓했다. 최 변호사는 “저항이 나오려면 폭행·협박이 저항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폭행·협박이 구성 요건에 없다. 저항을 따지는 건 이 조문을 별도로 만든 의미가 없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저항 여부를 따지는 것은 폭행·협박을 동원할 때만 강간으로 인정하는 ‘최협의설’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안희정과 분리된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그 분리가 제게는 단절을 의미합니다. 화형대에 올려져 불길 속 마녀로 살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지난 시간과의 작별입니다.” 지난 2월1일 안 전 지사에게 유죄 선고가 내려진 뒤 김씨는 이런 내용의 공개 편지를 띄웠다. 가해자와 분리된 세상은 성폭력 피해를 입고도 폭행·협박이 없었다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꽃뱀’ ‘불륜’ 같은 손가락질에 시달리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 피해자들이 바라는 세상이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국 사회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의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미투에 한국 사회 전반이 반응했고, 사법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과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선정한 ‘#미투 판결 10’을 보면 그 불가역적인 변화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폭력·노동·가족·헌법 분야 전문가 10명으로 꾸린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는 2018년 한 해 나온 젠더 관련 판결들 가운데 성평등 판결과 성차별 판결을 추천했다. 대법원 젠더법연구회와 헌법재판소, 대한변호사협회도 추천에 참여했다. 그 결과 성평등 판결로 16건, 성차별 판결로 10건이 추천됐다. 지난 1월15일 이화여대 법학관에서 열린 심사위원회는 성평등 5건, 성차별 판결 5건을 선정해, 이들 가운데 최고와 최악을 가리는 자리였다. 최고의 #미투 판결은 지난해 4월 대법원이 내놓은 ‘ㅇ대 성희롱 교수 해임 사건’ 판결이, 최악의 #미투 판결은 지난해 8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수행비서 성폭행 사건에 대한 서울서부지법의 판결이 선정됐다. 은 1부(최고의 판결)와 2부(최악의 판결)로 나눠 #미투를 이해하는 법의 열쇳말을 살핀다. 성평등의 열쇳말은 ‘성인지 감수성’, 성차별의 열쇳말은 ‘위력’이다.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
위원장 김유니스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 소장(이화여대 로스쿨 교수)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박귀천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
신옥주 한국젠더법학회 회장(전북대 로스쿨 교수)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변호사(전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위원)
원혜욱 인하대 부총장(인하대 로스쿨 교수)
이경환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장명선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정구태 조선대 법과대학 교수
최미진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대표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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