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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뒤에도 징계 안 한 회사, 유죄!

가해자 징계하지 않는 회사에 손해배상 책임 물어…

“성희롱 예방 교육만으로는 안 돼”
등록 2019-02-16 15:57 수정 2020-05-03 04:29
직장 내 성희롱은 노동인권 문제와 결부돼 있지만 회사는 이를 방치하기도, 피해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직장 내 성희롱은 노동인권 문제와 결부돼 있지만 회사는 이를 방치하기도, 피해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정신과 치료 받느라 1년 만에 복귀했는데 못 다니겠더라. 가해자 만날까봐 화장실도 못 갔다.”

ㅇ의료원에 입사한 지 한 달 만인 2017년 7월 같은 부서 남자 선배에게 성추행을 당한 우영아(31·가명)씨는 결국 회사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선배 ㄱ씨는 우씨의 어깨를 주무르고, 팔뚝을 만지고, 팔꿈치로 가슴을 쳤다. 이후 우씨는 인사 담당자에게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채 피해 사실을 호소했지만, 적절한 피해구제 절차를 듣지 못해 인사 담당자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직원 추행도 보고받았지만

하지만 ‘피해 말하기’는 회사에 소문으로 퍼졌다. “우씨를 조심해라” “인사 담당자한테 잘 보여서 채용됐다” 등 우씨에게 ‘2차 피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우씨는 가해자들을 고소한 뒤 휴직 상태에서 1년 동안 정신과 입원을 반복하다 회사에 복직했지만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우씨는 현재 가해자들을 상대로 형사소송을 진행하는 한편 가해자들과 ㅇ의료원을 상대로 민사소송도 진행 중이다. 우씨가 직장 내 성희롱과 성추행으로 고통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ㅇ의료원이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아 2차 가해를 가중했다는 등의 이유다.

직장 내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은 ㅇ의료원에 공동 책임을 물은 우씨처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주름을 조금이나마 펴게 할 만한 판결이 나왔다. 2018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를 징계하지 않고 감독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ㄴ제빵회사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었다.

판결문을 보면, 피해자 김아무개씨는 2015년 1월 ㄴ제빵회사에서 판매보조를 하다가 제과장인 이아무개씨에게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 이씨는 ㄴ제빵회사의 한 지점에서 자신에게 제빵 기술을 배우는 김씨와 식당에서 함께 술을 마신 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없으니 잠깐 쉬었다 가자”며 모텔로 유인했다. 이씨는 모텔에 들어서자마자 김씨를 강제로 침대로 눕혀 성폭행했다.

이후 이씨는 일하는 김씨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려 했으나, 김씨가 거부하자 김씨의 팔을 잡아당겨 강제로 입을 맞추기도 했다. 회사는 이씨가 다른 직원을 상대로도 성추행한 사실을 보고받았지만, 이씨에게 경고만 했을 뿐 별다른 징계 절차를 밟지 않았다. 이씨의 직장 내 성추행 가해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도 벌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회사는 이씨에게 경고를 하는 데 그쳤을 뿐, 피해 사실을 조사하고 징계하며 이씨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회사가 임직원들을 상대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했다는 점 등만으로는 회사가 사용자로서 성범죄 방지에 필요한 주의 의무를 다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만약 회사가 이씨에 대해 적극적인 조사를 벌였다면 다른 직원들을 상대로 지속적·반복적 성추행을 일삼은 이씨가 피해자 김씨와 단둘이 빵을 만드는 일은 없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성폭력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재판부가 본 것이다.

회사 쪽은 “이씨의 불법행위는 회사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없고, 설령 회사의 사무 집행과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가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성희롱 방지 교육을 해마다 하는 등 사용자로서 모든 주의 의무를 다하였으므로 회사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 고발 뒤 불이익당했다 63.2%

이경환 변호사는 이 꾸린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에서 “당연한 사안이긴 하지만, 사용자 책임을 물은 판례가 너무 적어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교육만으로 부족하다는 판례는 기존에 있었는데, 이번 판결은 징계가 아니면 안 된다고 판시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신옥주 한국젠더법학회 회장은 “통념적으로는 성폭력이 업무와 관련된 것이 아닌데, 이번 판결은 굉장히 설득력 있게 성폭력 예방 의무가 업무와 관련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형식적인 성폭력 예방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번 판결이 널리 알려져 회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에서는 사업주에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엔 예방 의무를, 사후엔 조치 의무를 지우고 있다.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을 예방하고 노동자가 안전한 노동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할 의무가 있고(제13조),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알게 된 경우에는 지체 없이 그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를 하여야 한다(제14조 2항). 또 위 조사 기간 동안 피해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해당 피해노동자 등에 대하여 근무장소 변경, 유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제14조 3항). 이처럼 법에서 사용자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는데도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는 회사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피해 말하기 이후 돌아오는 해고 등 인사상 불이익, 동료들의 손가락질 등 2차 피해에 시달린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2017년 ‘평등의 전화’에서 상담한 사례를 분석한 결과,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이 692건(24.4%)으로 노동조건, 모성권 상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았다. 눈에 띄는 점은, 2013년 236건이던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이 2017년 692건으로 약 3배나 늘었다는 것이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중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한 비율은 2017년 63.2%로 2015년 34%, 2016년 42.5%보다 늘었다.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지만 실제 피해자들의 현실은 ‘나홀로 싸움’인 셈이다.

“남녀고용평등법의 실질화 필요해”

실제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제기한 르노삼성 직원 ㄷ씨는 업무에서 배제되고 징계 처분을 받았다. ㄷ씨를 도운 후배 또한 정직을 당했다. 2017년 12월 대법원은 인사상 불이익으로 ㄷ씨가 입은 정신적 손해에 회사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후 파기환송심은 르노삼성에 “ㄷ씨에게 3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김유니스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소장은 “‘사용자 책임’이라는 게 우리 법에 개념이 있어도 사문화됐다. 법에서 요구하는 책임은 그동안 성폭력 예방 교육 수준의 최소한이었다. 회사에서 직원 개인 간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경영진을 교육하는 곳에서 주요 사례로 들어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르노삼성 사건의 피해자를 지원했던 이종희 변호사도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면서 회사 책임 부분이 많이 들어가기는 했는데, 문언(말과 글)이 실질화되는 게 필요하다. 회사는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절차 등을 잘 알려줄 필요가 있고, 발생 즉시 분리한다든지 즉각 조사하는 등 합당한 조처를 해야 한다. 또 피해가 인지되면 회사는 2차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국 사회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의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미투에 한국 사회 전반이 반응했고, 사법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과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선정한 ‘#미투 판결 10’을 보면 그 불가역적인 변화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폭력·노동·가족·헌법 분야 전문가 10명으로 꾸린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는 2018년 한 해 나온 젠더 관련 판결들 가운데 성평등 판결과 성차별 판결을 추천했다. 대법원 젠더법연구회와 헌법재판소, 대한변호사협회도 추천에 참여했다. 그 결과 성평등 판결로 16건, 성차별 판결로 10건이 추천됐다. 지난 1월15일 이화여대 법학관에서 열린 심사위원회는 성평등 5건, 성차별 판결 5건을 선정해, 이들 가운데 최고와 최악을 가리는 자리였다. 최고의 #미투 판결은 지난해 4월 대법원이 내놓은 ‘ㅇ대 성희롱 교수 해임 사건’ 판결이, 최악의 #미투 판결은 지난해 8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수행비서 성폭행 사건에 대한 서울서부지법의 판결이 선정됐다. 은 1부(최고의 판결)와 2부(최악의 판결)로 나눠 #미투를 이해하는 법의 열쇳말을 살핀다. 성평등의 열쇳말은 ‘성인지 감수성’, 성차별의 열쇳말은 ‘위력’이다.

#미투 판결 심사위원회
위원장 김유니스 이화여자대학교 젠더법학연구소 소장(이화여대 로스쿨 교수)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박귀천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
신옥주 한국젠더법학회 회장(전북대 로스쿨 교수)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변호사(전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위원)
원혜욱 인하대 부총장(인하대 로스쿨 교수)
이경환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장명선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정구태 조선대 법과대학 교수
최미진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대표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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