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은 법원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반응한 것이다. 한국 사회 성인지 감수성의 원천은 여성운동이다. 여성운동은 줄곧 성차별적 사회에서 묵인되고 방치됐던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사회문제로 공론화해온 역사가 있다.
지난해 2월 ‘양공주’라는 이름으로 비하되던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은 국가가 조장한 성매매의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2월8일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경제적 빈곤 등을 이유로 자발적으로 기지촌에 유입됐다 하여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면제할 수는 없다며 1심 판결 당시 손해배상 대상에서 제외됐던 여성 60여 명의 피해를 인정했다. 201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원고 120여 명 가운데 불법적 성병 검진을 당한 60여 명에 대해서만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바 있다. 대법원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김숙자(75) 할머니도 2018년에야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지난해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에 나와 기지촌에 ‘자발적’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지난 2월8일 경기도 평택의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 인근 햇살사회복지회에서 만난 김숙자 할머니로부터 ‘자발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맥락을 들을 수 있었다. 우순덕 대표가 2002년 반지하방에서 시작한 햇살사회복지회는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미군 기지촌 ‘위안부’ 할머니들의 공동체다.
“텔레비전에서 자식을 넘치게 사랑하는 걸 보면 아직도 열이 나. 내 부모는, 내 엄마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어머니의 학대를 피해 12살에 집을 나온 김숙자 할머니는 기지촌에서 생계를 꾸리다 22살에 어머니와 재회했다. “10년 만에 만났는데 어떻게 지냈느냐 하는 게 당연하잖아. 눈물 흘리고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 엄마가 어딨어. 이런 말 하면 사람들이 믿지도 않아요. 그때부터 도와준다는 것이 오십 대까지 도와준 거야. 와서 뜯어가고, 안 주면 개판 치고.”
햇살사회복지회가 13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경기도 기지촌 여성노인 실태 조사’(2008) 보고서를 보면 이들은 기지촌 이주 동기로 ‘가족 생계를 위해서’(29%), ‘먹고 잘 곳이 없어서’(20%), ‘친구나 언니를 쫓아서’(28%) 등을 꼽았다. 기지촌을 떠나지 못한 이유로 65%가 ‘갈 데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의무교육이나 사회복지 등 국가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던 빈곤국가에서 여성들이 기지촌 성매매로 유입된 ‘사회적 맥락’은 기지촌 여성 지원단체가 생기기 전까지 거의 무시됐다. ‘제 발로 갔다’는 자발성 프레임은 기지촌 성매매 여성을 도구로 이득을 챙긴 ‘제3의 포주’, 국가의 역할을 지웠다. 그러나 2심은 “설령 원고들이 자발적으로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시작하였더라도 국가는 이를 기화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조장… 원고들의 성,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군사동맹의 공고화 및 국가안보 강화, 그리고 기지촌 내 성매매 활성화를 통한 외화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며 ‘피해’를 인정했다.
2월8일 만난 김숙자 할머니는 인터뷰를 마친 뒤 나직이 '꽃반지끼고'를 불렀다. 사랑했던 미군 병사 '영철이'에게 가르쳐줬던 노래라고 했다. 함께 만난 박영숙(84) 할머니는 그가 180도, 200도로 바뀌었다고 했다. "같은 교회에 다녔는데, 어디 놀러가서 노래 부르라고 하면 벌금 내고 노래 안하는 쪽이었어. 연극하고 변했어. 진짜 변신한거야." 김숙자 할머니는 미군 기지촌 위안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배우'다. 햇살사회복지회는 2014년부터 할머니들의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숙자이야기, 문 밖에서, 그대 있는 곳까지 등의 연극과 뮤지컬 공연을 했다.
김숙자 할머니와 박영숙(84) 할머니는 미군 기지촌 ‘위안부’ 할머니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얼굴과 실명을 드러내고 언론 인터뷰를 하는 분들이다. 이날 만난 두 분은 미군 기지촌 ‘위안부’ 운동에서도 ‘제2의 김복동 할머니’ 같은 ‘인권운동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우순덕 대표와 주고받았다. 김숙자 할머니는 김복동 할머니 별세 이후 처음 열린 수요집회에 참석해 “우리한테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하셨다. 그 뒤로 용기가 생겨서 할머니 뜻을 가지고 용기를 내서 앞장서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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