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내는 일하러 가고 나는 우유병을 들고 있어

미국 2012년 ‘스테이앳홈대드’ 200만 명 추산…

같은 해 ‘주부아빠네트워크’ 출범
등록 2019-02-03 01:13 수정 2020-05-03 04:29
2018년 9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주부아빠네트워크’ 콘퍼런스 참가자들의 단체 사진. 주부아빠 네트워크 누리집 갈무리

2018년 9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주부아빠네트워크’ 콘퍼런스 참가자들의 단체 사진. 주부아빠 네트워크 누리집 갈무리

“나는 주부아빠야. 아기와 나뿐이야. 나는 주부아빠야. 아내는 일하러 가고, 나는 우유병을 들고 있어.”

미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TM·Rage Against The Machine)의 음악을 샘플링한 멜로디가 흐르고, 캐나다의 코미디언 겸 가수인 존 라조이가 노래를 거친 목소리로 토해내듯 부른다. 존 라조이가 회사를 떠나 육아에 뛰어든 친구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만든 록 음악 (Stay-at-Home-Dad)는 뮤직비디오로 제작돼 2008년 8월21일 유튜브에 업로드됐다. 영상은 영미권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1월30일 현재 해당 영상은 550만 번 재생됐고, 댓글도 5천 개 가까이 달렸다. 영어권 국가에선 주부아빠를 ‘집에 있는 아빠’라는 뜻으로 ‘스테이앳홈대드’라고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마약은 하지 않아… 아기가 안아줄 때 황홀함 느껴”</font></font>

“아기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울고 발을 굴러. 아기는 밥을 주면 울음을 그칠 테니 우유병을 물려. 아내는 잠에서 깨 침대에서 일어나. 아내의 아침을 준비해. 오우 기저귀에서 냄새가 나… 아내가 출근하고 아기를 씻길 시간이야. 아기 눈에 비누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아기가 울지도 몰라… 오후 5시면 아내가 돌아와. 그녀는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물어. 나는 나쁘지 않았다고 대답해. 주부아빠의 하루야.”

존 라조이의 노래는 주부아빠의 하루를 시간순으로 노래한다. 일부 가사는 주부아빠를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았다. “나는 마약은 하지 않아. 나는 주부아빠야. 아기가 안아줄 때 황홀함을 느껴.”

한국에서는 주부아빠가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앞서 전통적 개념의 가족 형태가 붕괴되고 사회 변화를 경험한 미국과 캐나다에선 이미 10년 전부터 주부아빠 증가가 주목받았다. 사회적 관심이 많아짐에도 주부아빠 수를 정확히 보여주는 통계는 아직 없다. 가장 최근에 공개된 자료는 미국 통계국이 2013년 내놓은 것이다. 미 통계국은 15살 미만 자녀와 함께 살면서 “밖에서 돈을 벌지 않고,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한다”고 대답한 성인 남성 21만4천 명을 ‘주부아빠’ 수로 파악했다.

미 통계국 자료에 대해서는 “실제보다 적게 파악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자신이 전업주부라고 떳떳하게 밝히는 사례만 집계됐다는 것이다.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는 2012년 일자리를 잃고 집에 머무르는 사례까지 포함해 주부아빠 수를 200만 명으로 추산했다. 퓨리서치센터 자료를 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주부아빠 수가 빠르게 늘었다. 2007년 150만 명을 조금 넘었던 수가 2010년 220만 명이었다. 이는 1989년 110만 명의 두 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70%가 ‘자발적’으로 선택</font></font>

미국 사회를 연구하는 학계에선 주부아빠가 늘어난 원인을 ‘경제’에서 찾았다. 육체노동이 대부분이던 산업화 시대에는 주로 남성이 밖에서 일해 돈을 벌었고, 여성이 집안일을 하며 자녀를 키웠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은 이러한 성역할을 무너뜨렸다. 남편의 노동만으로는 가족의 생계 유지가 어려워지자 부부가 모두 일하는 ‘맞벌이’ 가구가 빠른 속도로 늘었다. 산업사회 이후 서비스업과 지식노동 등 노동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여성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가 향상됐다. 이 변화에 힘입어 여성의 평균임금이 늘어나 남편보다 수입이 많은 아내의 수도 늘었다. 남녀를 떠나 더 많은 수입을 벌어들이는 쪽이 ‘주부’가 되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으로 여겨졌다. ‘남편은 돈을 벌고, 아내는 집안일을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진 것이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남성의 증가도 이런 변화를 촉진했다.

미국에선 주부아빠의 증가가 일찍부터 주목받았지만 이들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경제적 이유로 가사노동을 택했더라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집에 있고, 아내를 일터로 보내는 무능력한 남성’이라는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주부아빠는 자녀 양육 정보를 얻고 싶어도 주부 모임에 쉽게 참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9월 미니애폴리스에서 네트워크 모임</font></font>

미국의 주부아빠들은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연대를 결심했다. 2012년 출범한 ‘주부아빠네트워크’는 가사와 양육을 하는 아빠들에게 정보를 주고 사회적 지지를 얻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주부아빠의 70%가 ‘자발적으로 가사노동과 양육을 선택했다’고 강조한다. 실업이나 구직의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부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사노동과 양육의 책임 앞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며, 주부아빠를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고 다짐한다. 미국·영국·캐나다 각 지역에 풀뿌리 조직을 두고 1년에 한 번씩 전체 모임을 여는 주부아빠네트워크의 올해 모임은 9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릴 예정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주부아빠의 빠른 증가와 이들의 연대 움직임은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등 전세계적으로도 이 변화는 확산되고 있다. 한국은 남성의 가부장적 역할을 강조했던 유교문화권에 속해, 주부아빠와 관련된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 전망이 엇갈린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주부아빠 증가가 세계적 흐름이고 한국 역시 이 흐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font color="#C21A1A">http://bit.ly/1HZ0DmD</font>
카톡 선물하기▶ <font color="#C21A1A">http://bit.ly/1UELpok</fon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