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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보다 센 힘이 필요해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성폭력피해자집중지원팀의 지난 1년
등록 2018-12-08 11:13 수정 2020-05-03 04:29
지난 10월 방한한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부문 이사회 의장 수잔나 딜버가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관계자의 손을 잡고 있다. 한겨레

지난 10월 방한한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부문 이사회 의장 수잔나 딜버가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관계자의 손을 잡고 있다. 한겨레

2010년 어느 날 회식 뒤 정규직 팀장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ㄱ씨. 대구의 공공연구기관인 대구기계부품연구원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중 겪은 이 일을 그는 #미투 국면에서 고발했다가 되레 해고를 당했다. 2007년 입사한 이래 11년 동안 관행적으로 갱신해온 계약이 지난 6월 갑자기 중단된 것이다. 대구의 여성단체와 노동단체가 똘똘 뭉쳤고, 범정부 차원의 #미투 대책으로 설치된 ‘성폭력피해자집중지원팀’도 나섰다. 8월 대구지방고용노동청에 부당 해고 구제 신청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전문가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집중지원팀이 지원했다. 사건을 심의한 경북지방노동위원회는 9월 부당 해고를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12월3일은 ㄱ씨의 첫 출근날이었다.

통합적·직접적 지원

출근 둘째 날인 4일 과 한 통화에서 ㄱ씨는 겉과 속이 다른 절반의 성공에 대해 이야기했다. “복직 요건을 나와 협의하지 않았다. 정규직이 아니라 무기계약직이라는 이전에 없던 직렬을 만들어 복직시켰다. 회사에는 내가 근거도 없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달라 한다는 왜곡된 정보가 퍼져 있더라. 갈 길이 멀다.” ㄱ씨는 곧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일반노조 조합원이자 대구기계부품연구원 지부의 지부장으로 회사와 단체교섭에 나선다. 기존에 있던 노조 역시 민주노총 소속이지만 정규직만 가입할 수 있었다. ㄱ씨는 앞으로 포부에 대해 “나는 그동안 시민단체나 정부기관의 도움을 많이 받은 편이다. 여성 비정규직 같은 사회적 약자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 자기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앞으로 이런 약자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2018년 상반기 #미투에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는 #미투 당사자에게는 무엇보다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미투 당사자들은 직접 연대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지지자가 될 수 있었다. 언론의 관심이 사그라들었다고는 하지만 #미투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2018년 #미투가 남긴 족적은 정부가 직접 피해자에 대한 통합적·직접적 지원에 나섰다는 것이다. ㄱ씨 사건을 지원한 성폭력피해자집중지원팀은 여성가족부가 설치한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센터’에 접수된 사건 가운데 피해자의 밀착 지원이 필요한 사례가 생겨나면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에 꾸려졌다. #미투 이전 고발에 나섰던 대다수 피해자들이 조직에서 나가떨어진 것과 달리 ㄱ씨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피해자가 소수나마 생기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부가 #미투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 구실을 한 것이다. 특별신고센터에 접수된 350여 건의 신고 가운데 36건이 선별돼 집중지원팀의 코디네이터가 사례 관리를 통해 법률, 심리, 조직문화 개선 컨설팅, 실태조사, 긴급쉼터 등의 지원을 했다.

집중지원팀 피해자 지원 자료를 보면 피해자 사건 처리 과정에서 법률·노무·심리상담 등 전문가 자문(26건), 기존 무료법률구조 체계에서 지원하기 힘든 사건에 대한 법률·노무 비용 지원(9건), 청주대 연극학과 졸업생들의 처럼 피해자가 현업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피해자 자활 지원 (10건),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실태조사와 후속 컨설팅 지원(10건) 등이 있다.

특히 코디네이터가 성폭력 발생 기관을 직접 방문해 상황을 파악하고 조직문화를 진단한 기관 컨설팅의 경우 #미투 이전 민간 영역의 성폭력 피해자 지원체계에는 없던 부분이다.

“집중지원팀 활동 후에야 학교 반응”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하고 경찰 수사에 연계하는 해바라기센터에서 일한 바 있는 임정현 코디네이터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바라기센터 이름으로 성폭력 발생 기관에 공문을 보내 사건 해결을 위해 나서도 기관이 방어하면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범정부 성희롱 성폭력 근절 추진 점검단 사업은 국무총리령에 설립 근거가 있고, 범정부 차원에서 꾸린 기구라는 인식이 있어 뭐가 됐든 조직이 반응한다. 직장 내 성폭력은 조직 대 피해자가 싸우는 구도인데, 피해자를 정부기관이 지원하면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구조다.”

‘성폭력 반대 청주대 연극학과 졸업생 모임’의 강윤지(26)씨도 ‘기관 컨설팅’을 가장 효과적인 지원으로 꼽았다. “학과 교수진도 두 차례 공식적으로 만났고, 청주의 지역단체도 국회도 학교 쪽도 만났는데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아 지칠 때가 있었다. 집중지원팀 컨설팅단이 학교에 내려가니까 그제야 학교에서 만나자고 반응이 왔다.”

조직 구성원에게 실시한 ‘조직문화 실태조사’ 역시 #미투 이후 집중지원팀이 생기면서 처음 시도된 일이다. 김정희 코디네이터는 생생한 경험을 들려줬다. “지역의 공공기관에 컨설팅을 나갔는데 ‘우리는 그런 조직이 아니다’라고 성희롱 발생 사실을 부인했다. ‘조사하면 0% 나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해서 그러면 ‘조사를 해보자’고 해 전 직원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직원의 70%가 ‘성희롱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후 조직문화 개선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성폭력피해자집중지원팀이 12월3~6일 실시한 ‘성폭력 집중지원 프로그램 만족도 조사’에 응한 피해자들의 평가는 후했다. ‘정부의 지원이 도움이 되었나’라는 질문에 응답한 19명 가운데 15명이 ‘그렇다’, 3명이 ‘보통이다’, 1명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일부 응답자가 남긴 긴 글에는 기존의 분산된 성폭력 피해자 지원체계로는 대응할 수 없는 ‘통합적 시스템’ 구축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다.

“2차 가해로 이어지는 부분에 대해 상세한 상황을 전달받고 같이 고민해주고, 지원팀에서 지원 가능한 게 있는지 검토하고 노무사 상담, 심리상담 등 각 상황에서 필요한 부분에 대해 지원받았다. 퇴사하지 않도록 우울하고 약해지는 순간에 지지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감동이고, 실질적 문제 해결에 핵심 도움이었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모든 기관에 도움을 요청해보았지만 나에게 정서적 위로나 타 기관 연계가 아닌 실질적이고 밀착된 도움을 준 곳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성폭력피해자집중지원팀 한 곳이었다. 덕분에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티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었고, 지금도 이 시간을 이겨내고 있다.”

79% “지원이 도움되었다”

애초 12월31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려 한 성폭력피해자집중지원팀은 내년에도 존속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예산이 반토막 났다. 11월 여성가족부의 ‘조직문화 개선 컨설팅 및 피해자 지원 프로그램’ 사업 신청 안내를 보면 컨설팅과 피해자 집중 지원에 5억3200만원이 배정됐다. 지난해에는 9억6천만원 규모였다. 최근 이같은 문제를 지적한 보도에 여성가족부는 기존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과 해바라기센터 인력 증원 예산은 오히려 늘었다며 피해자 지원 예산이 줄었다는 보도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반박 자료를 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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