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기 건설할 때야 사람들이 북적였지… 발전한 것도 별로 없어요. 아무것도 없고 그대로… 국가에서 한다는데 우짤 끼고.”
11월15일 월성원자력발전소(월성 원전)가 보이는 경북 경주 양남면 나아리 해변 도로에서 만난 ㄱ(78)씨는 “원전이 있어서 지역 살림이 달라진 게 있냐”는 질문에 ‘뭐,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 토박이인 그는 월성 원전 1호기가 있던 자리에서 살다가 1975년 착공을 앞두고 약 1㎞ 떨어진 곳으로 이주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ㄱ씨의 반응은 원전이 있는 마을 주민들을 만나면 맞닥뜨리는 공통된 모습이다. 해마다 원전이 있는 지방자치단체(지자체)와 주변 마을에 1천억원 넘는 재정이 지원금 형태로 들어가지만, 원전 주변 지역주민들에겐 지역의 발전이 정체됐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실제 원전 주변 지역주민들의 삶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는 지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원전 부품 비리(2012~2013년), 경북 지역 지진(2016~2017년), 잦은 고장 등으로 원전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며 지역주민들은 부동산 가격 하락, 지역의 농수산물 판매량·관광객 감소 등을 호소한다.
원전 불안감 커지며 땅값·관광객↓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2013년 원전 이름에 행정구역 명칭이 포함돼 지역의 경제와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주민들의 민원을 반영해, 영광 원전은 ‘한빛원전’으로, ‘울진 원전’은 ‘한울원전’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원전 신규 부지 선정 과정에서 정부와 한수원, 지자체 등은 ‘원전을 유치하면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수조원의 수익이 기대된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장밋빛 기대’는 어디로 간 걸까.
원전이 건설되면 해당 지자체에 막대한 정부 재정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1990년 시행된 ‘발전소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발주법)은 원전을 포함한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사업과 이에 따른 예산 지원을 규정하고 있다. 원전의 경우 크게 전력기반기금(소비자가 내는 전기요금의 3.7%를 떼서 만든 기금. 전력산업 발전과 기반 조성을 위한 공공사업에 쓰도록 규정)에서 예산을 지원하는 기본지원사업·특별지원사업·홍보사업과, 한수원이 부담하는 사업자지원사업(2006년부터 시행)이 있다. 원전 주변 5㎞ 이내 읍·면·동 주민들과 해당 지자체에 대부분 지급된다. 원전 인근의 지역주민들이 ‘위험시설’을 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전기를 사용하는 소비자와 위험시설을 운영하는 사업자인 한수원이 지원금을 분담하는 구조다. 여기에 약 2천억원의 지역자원시설세(지역에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특정 자원이나 부동산에 부과하는 세금)도 5개 원전 소재 지자체 재정으로 잡힌다.
발주법은 지원사업이 지역주민들의 소득 증대와 생활환경 개선 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규정한다. 원전 신규 부지로 선정된 지자체에 지급하는 특별지원사업(2019년 10월 준공 예정인 신한울 1·2호기의 경우 1276억원 지원)을 제외하고 매년 예산이 지원되는 사업은 크게 기본지원사업과 사업자지원사업으로 나뉜다. 법이 규정하는 기본지원사업은 주변 지역 개발과 주민 복리를 위해 시행하는 소득증대사업·공공시설사업·육영사업·주민복지지원사업 등이고, 사업자지원사업은 교육장학사업·지역경제협력사업·지역복지사업 등이다.
지원 예산 규모는 법이 개정된 2005년 이후 급격히 늘었다. 2005년 개정된 법은 한수원의 사업자지원사업을 도입하고, 발전소 운영 기간이 경과하면서 지원금이 줄어드는 기존 제도를 발전량에 따라 예산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당시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전문위원 법안 검토 보고서를 보면 “매년 물가 상승(연평균 3.5%), 주민들의 기대수준 변화, 타 혐오시설의 지원 규모 등으로 인하여 주변 지역 내에 거주하는 지역주민의 입장에서는 지원 규모가 점차 축소되어 지원사업의 효과가 미흡하다고 느끼고 있는 실정”이라고 법 개정 취지를 설명했다. 1990~2005년 전국의 원전 소재 지역에 준 기본지원사업 지원금은 5975억원인데, 2006~2016년에는 1조2641억원으로 지원금 규모가 두 배 이상 늘었다. 한수원도 2006~2016년 약 5005억원을 지자체와 원전 주변 마을에 지원했다.
51.9% “지역 발전? 변화 없다”투입한 재정만큼 지역경제는 발전하고, 주민들의 만족도는 올라갔을까. 한수원이 한국산업경제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작성한 ‘원전 주변 인문·환경 변화 과정 추적관리 종합보고서’(2017년 8월)를 보면, 원전의 지역 발전 기여도에 대한 주민 조사에서(원전 주변 지역 20㎞ 이내 주민 1900명 대상 면접 조사) 51.9%가 “변화 없다”고, 41.7%가 “발전했다”고 답했다. “낙후됐다”는 응답은 6.4%였다. 각종 원전 지원사업에 대한 만족도는 ‘보통’(49.5%)이 가장 많았고, ‘불만족’(25.7%)과 ‘만족’(24.8%)이 뒤를 이었다. 원전 지역 지원사업제도가 28년 동안 지속돼왔지만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지역에 변화가 없고 지원사업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민들의 반응은 원전 주변 지역과 다른 지역의 지역내총생산(GRDP)을 비교한 연구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관련 연구 중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논문 ‘원전 주변 지역 지원제도의 경제효과 분석’(조세재정연구원·2016)은 “지원을 받는 지역과 지원을 받지 않는 다른 지역의 GRDP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정부의 재정 지원은 오로지 도로나 건물 등 건설 부분 GRDP를 올려주는 효과만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연구는 원전 지역 지원금이 증가한 2006~2014년 원전 지원을 받는 지자체와 지원을 받지 않는 인접 지역 지자체를 비교·분석한 것이다. GRDP 통계가 읍·면·동 단위로 집계되지 않아, 연구는 원전 5㎞ 이내 지역의 GRDP가 아닌 시·군·구 GRDP 통계를 기준으로 했다. 보고서는 또 지원금이 투입된 지역에 총인구가 일부 늘어났지만, 사업체 수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분석했다. 물론 원전 주변 지역의 GRDP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논문은 막대한 재정 투입에 비해 그 성과가 높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일자리의 경우도 원전 건설 초기에는 건설업 일자리가 늘어나지만 전문성을 요구하는 원전 특성상 이후 운영할 때는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지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경주시가 월성 1호기 가동 중단에 따른 지역경제의 영향을 분석해 내놓은 자료를 보면, 경주 출신 한수원 월성원자력본부와 협력회사 근무자 수를 350명(2014~2016년 채용)이라 밝힌다. 이외에 원전 운영으로 유지되는 일자리는 청소 등 계약직 일자리와 공원 관리 등 일용직이 대부분이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현행 원전 주변 지역 지원사업이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중·장기 계획 대신 단기성 사업에 치중되고, 지역주민들의 소득 증대보다 눈에 보이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나 일회성 행사에 집중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지원사업이 주로 지자체나 원전 주변 지역 발전협의회나 이장단 협의회 등의 단체가 신청한 민원성 사업을 승인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다보니 지원사업을 두고 ‘나눠먹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며 지역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도 하다.
지원사업 ‘나눠먹기’ 주민 갈등 반복발주법 제9조는 “그 지역의 지원사업에 관한 장기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 현행 지원사업은 매년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에서 8월에 사업계획 수립 지침을 지자체와 한수원에 내리면, 10월 말에 각 사업계획이 제출돼 12월에 사업이 확정되고 다음해에 사업이 진행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즉, 중·장기 사업을 검토할 충분한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현실성이 떨어지거나 부적합한 사업이 예산은 잡히되 실제 실행되지 않는 문제가 되풀이된다. 국회예산정책처는 매년 예산 기본지원사업·사업자지원사업 지원금의 실제 집행률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왔다.
결국 지자체는 지원금을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한 지역주민 소득 증대 사업보다 눈에 보이는 사회간접자본 사업에 쓰는 일이 많다. ‘원전 주변 지역 지원제도의 경제효과 분석’ 보고서는 “2006~2013년까지 기본지원사업 금액의 52%가 도로·항만·상하수도 등의 공공시설 지원과 보수에, 사업자지원사업도 29%가 건설형 지역경제 활성화 사업에 활용됐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원전 주변 지역의 마을회관 신축, 도로 보수 등은 모두 지원금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는 지자체가 원래 집행해야 하는 사회간접자본사업 예산을 지원금으로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산자부 용역으로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수행한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제도 개선 방안’(2015) 보고서는 “원전 지역 자치단체의 SOC 투자사업 예산이 증가하는 기간 동안 해당 자치단체의 국토·지역개발 예산은 감소했다”며 “(지원금이) 단순한 자치단체의 재정 보조 수단으로 변질된다”고 지적한다.
한수원이 부담하는 사업자지원사업비는 취지와 달리 일부 지역 단체들의 ‘소모성 경비’에 쓰이고 있다는 비판에 시달린다. 2012년 국민권익위원회는 ‘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지원사업비 운영 투명성 제고 방안’을 발표했는데 “문중회·번영회·각종 체육단체 등 지역 특정 단체의 각종 행사, 수익사업 등에 돈이 사용됐다”고 지적했다. 또 소방서나 관공서가 화물차량 구매비, 민원실 신축비 등 자체 예산으로 추진해야 할 사업을 한수원에 청구하거나, 지자체가 드라마세트장 건립에 수십억원을 집행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후 지원금 집행 대상과 사업 내용을 제한하기로 제도를 개선해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일회성·소모성 지역사업에 지원금이 쓰이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이 국회를 통해 입수한 ‘최근 5년간(2013~2017) 한수원 지원사업 신청내역 및 심사결과’를 보면 중·고등학생 장학사업이나 저소득층 자녀 급식비 지원 사업같이 사회공헌, 주민 복지 성격을 띤 사업도 여럿 진행하지만, 경로잔치·음악회·노래자랑·체육대회 행사 비용, 마을 비품 구매 등에 대한 지원금 집행도 100만원부터 수천만원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원전 폐쇄 이후의 미래 발전 준비이는 원전 가동이 멈춘 뒤까지 염두에 두고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에 초점을 맞추는 프랑스와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는 원전 주변 지역 지원제도를 별도로 운영하지 않고 지자체나 주민들에게 돈을 직접 지원하지 않는다. 대신 원전으로 확보한 지방 세수를 중·장기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 주민들의 동의를 구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원전 지역인 프랑스 플라망빌시를 방문한 뒤 작성한 보고서(2014년)를 보면, 플라망빌시 관계자는 “원전이 모두 폐쇄될 경우를 대비해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재투자에 역점을 두고 있다. 원전이 폐쇄돼도 지역이 살 수 있기 위해서 원전이 없는 미래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앞서 언급한 보고서와 전문가들은 지자체와 지역주민들에게 지원사업의 계획과 집행을 맡기는 대신, 지역주민·지자체·외부인사 등이 참여하는 ‘제3의 기구’에서 각종 지원사업을 통합해 돈을 관리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제3의 기구가 지역의 중·장기 발전 계획을 세우고 돈을 체계적으로 쓰게 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원금 사용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다.
주무 부처인 산자부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현행 지원제도의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산자부는 지난 6월 ‘에너지전환(원전 부문) 후속조치 및 보완대책’을 발표하며 “원전 주변 지역 지원제도를 그간의 민원사업 및 SOC 중심에서, 지역 발전 계획과 연계한 주민 소득 증대 사업 중심으로 개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산자부는 이를 위해 연구용역을 통해 지역별 ‘에너지재단’을 구성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기본지원사업·사업자지원사업·지역자원시설세 등 원전 주변 지역에 들어가는 돈을 주민과 지자체,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별도 기구인 ‘에너지재단’에서 통합 관리하고 ‘종잣돈’을 바탕으로 지역의 중·장기 발전 계획을 세우게 하자는 구상이다. 그동안 지원사업을 주도하던 산자부와 한수원도 권한을 에너지재단에 넘기는 것이다.
지역별 에너지재단 구성 검토정종영 산자부 원전산업정책과장은 “지역경제를 위해 원전 의존형 경제구조에서 다원화된 구조로 가야 한다”며 “현행 지원제도는 아무리 철저히 관리해도 예산의 중복과 비효율성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 결국 근본적인 틀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경주=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부산=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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