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시간에 바쁜데 이렇게 타시면 어떻게 해요.”
전동휠체어를 타는 직장인 홍아무개(39)씨는 최근 아침 출근길에 저상버스를 타려다 버스 운전기사가 나무라듯 내뱉은 말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일반버스를 타기 힘든 홍씨는 저상버스가 차체를 낮춰줘야만 버스에 탈 수 있다. “운전기사에게 ‘장애인이 보호자 없이 혼자서 이렇게 버스에 타려고 하면 어떡하느냐’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심리적으로 위축돼 버스 타기가 꺼려진다. 지금은 되도록 지하철을 타려 한다. 버스는 지하철과 다르게 장애인도 일반인과 똑같은 요금을 내고 타는데, 눈치까지 보이면 억울한 생각이 든다.”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과 노약자 등 교통약자를 위해 저상버스를 늘리고 있지만 홍씨 같은 지체장애인들에게 버스의 ‘벽’은 여전히 높다. 장애인들이 수십 분 걸리는 환승 시간을 감수하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이유다.
저상버스 이용 땐 약속 시간도 못 정해먼저, 저상버스는 운행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버스가 언제 올지 알기 어렵다. 지상에서 타고 내리는 버스는 불안한 휠체어 리프트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은 버스가 기다리는 시간만 잘 맞는다면 돈을 내고라도 탈 생각이 있다고 입을 모았지만, 들쑥날쑥한 저상버스의 운행 간격 때문에 이용을 망설이게 된다.
버스의 승하차 지점이 일정하지 않은 점도 장애인이 버스 이용을 망설이는 이유다. 버스는 교통 상황에 따라 정류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손님을 태우기도 한다. 일반인들은 우르르 몰려가 탈 수 있지만 이동 속도가 느린 장애인들은 일반인처럼 빨리 버스에 다가갈 수 없다. 홍씨는 “저상버스를 이용하려면 약속 시간 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시간 관리가 어렵다”고 했다.
저상버스의 고장이 잦다는 지적도 있었다. 지체장애인 문아무개(39)씨는 출퇴근을 위해 일주일에 두세 번 저상버스를 타는데 휠체어 탑승을 위한 경사로가 고장 난 때가 많다. “저상버스를 열 번 타면 두세 번은 휠체어 탑승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기사 아저씨가 ‘다음 저상버스 타세요’라고 말하고 떠나버리는데, 그렇게 무작정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 회사에 늦을 수밖에 없다. 출퇴근 시간에는 버스를 이용하는 일반 승객이 많다보니 ‘고장이 났으면 고쳐야 하지 않느냐’고 따져묻기도 어렵다.”
최근에는 버스 중앙차로제가 확대되면서 버스를 기다리는 공간이 좁아진 점도 이들의 탑승을 어렵게 한다. 문씨는 “운전기사들이 장애인이 있는 걸 알아야 경사로 내릴 준비를 하는데 중앙차로제가 생긴 뒤에는 기사가 장애인 승객을 못 보고 지나치는 일이 늘었다”고 했다.
장애인 외면하는 버스 기사들한국장애인개발원이 국토교통부 지원을 받아 2010년 ‘장애인 등의 버스이용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를 한 것을 보면, 장애인 298명에게 저상버스 이용 관련 불만을 조사했더니 “운행 대수가 충분하지 않고 대기 시간이 길다”는 대답이 34.2%로 가장 많았다. “일반버스보다 좌석이 적고 휠체어 공간이 불편하다”(11.2%), “운전자에게 승하차 의사를 전달하기 어렵다”(11.2%), “휠체어 고정 장치 작동법이 까다롭다”(7.9%) 등의 불만이 뒤를 이었다.
한국이 처음 교통약자에 관심을 가진 때는 2005년이다. 1998년 4월 장애인 등 신체 이동이 불편한 약자를 위한 법(‘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 처음 시행돼 공원, 공공건물에 교통약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설치됐다. 법에는 버스 같은 교통수단도 편의시설 설치 대상에 포함됐지만 비용 문제로 거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2005년 1월에야 교통수단에 편의시설을 설치하기 위한 별도의 법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하 교통약자법)이 제정돼 2006년부터 시행됐다.
교통약자법에서는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권리”라고 정의한다. 교통약자법에 근거해 지자체는 저상버스의 비중을 늘리고 있다. 서울시는 8월21일 2025년까지 서울의 모든 시내버스를 저상버스로 바꾼다는 계획을 담은 ‘제3차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계획’을 발표했다. 2017년 말 기준으로 시내버스 중 44% 정도를 차지하는 저상버스를 2022년까지 81%로 늘리고, 2025년에는 100%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계획안에 따르면 2020년부터는 마을버스도 저상버스로 바꾼다.
하지만 저상버스 수를 늘리더라도 배차 시간 간격 준수 등을 우려한 운전기사들이 장애인들을 보고도 지나쳐버리면 의미가 없다. 최근 저상버스에 타려는 장애인을 외면하고 지나친 버스 기사가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교육 수강을 권고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8월22일 발표한 내용을 보면 지난 2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ㄱ씨가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버스 정류소에서 저상버스를 타려고 운전기사 ㄴ씨에게 휠체어 경사로를 내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ㄴ씨는 ㄱ씨를 태우지 않고 떠나버렸다. ㄱ씨는 “장애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냈지만 ㄴ씨는 “다른 승객이 승하차하는 중이라 뒷문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내려달라는 ㄱ씨의 요청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고의로 승차 거부를 한 것이 아니다”라며 맞섰다. 인권위는 저상버스를 운행하는 운전기사는 일반버스 기사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함에도 이를 소홀히 했다는 점을 들어 ㄱ씨의 손을 들어줬다.
저상버스 대수에만 집착하는 정부2017년에는 장애인의 버스 승차를 거부한 버스회사가 위자료를 지급한 일도 있었다. 수원지방법원은 2017년 7월 ㄷ(26)씨가 경기도 평택 등지에서 버스노선을 운영하는 버스회사 3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뇌병변 1급 장애인으로 전동휠체어를 타는 ㄷ씨는 2016년 4월10일 평택역 앞에서 버스를 타려다 승차를 거부당했다. 휠체어 승강장비가 고장 났다는 이유였다. ㄷ씨는 이후로도 승강장비 고장과 장비 사용법을 모르는 운전기사 때문에 버스를 타지 못했다.
ㄷ씨는 총 9번을 타지 못했다며 승차 거부에 따른 정신적 고통 등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법원은 교통약자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위반한 것으로 봤다. 버스회사들은 각 1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고 소속 기사들에게 승차 거부 금지와 휠체어 승강장비 사용법을 교육할 것을 명령했다.
저상버스가 늘어나도 이용자들의 불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저상버스 수에만 신경 쓰고 사후 관리는 제대로 하지 않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관계자는 “저상버스 도입에는 비용을 지원하지만, 유지·보수 비용은 민간 버스업체에 떠넘기다보니 제대로 관리가 안 된다. 저상버스는 장애인만 위하는 교통수단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늘어나는 노인, 임신부, 유모차 등 다양한 교통약자를 위한 수단이다. 정부가 장기적 관점으로 대안을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장애인 콜택시는 몇 시간 기다려야위험한 지하철역 휠체어 리프트, 타기 힘든 저상버스를 제외하면 장애인의 기본권인 이동권을 보장하는 교통수단은 없다. 최근 장애인을 위한 콜택시가 늘어나고 있지만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한번 이용하려면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이용자들이 하소연했다. 홍씨는 “지난 4월 종로에 나갔다가 전동휠체어가 망가져서 저녁 6시쯤 콜택시를 불렀는데 4시간이 지난 밤 10시에나 왔다”고 했다. 김아무개(26)씨는 “출퇴근용으로 가끔 이용하는데, 대기 시간이 기본 1시간이다.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이용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했다.
장애인단체는 이처럼 장애인 콜택시 이용이 어려운 이유가 임신부와 노약자 등 다양한 교통약자들이 함께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휠체어를 타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콜택시를 기타 교통약자들을 위한 ‘복지택시’와 분리해 운영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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