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피해자답게’ 저항해야 유죄?

‘피해자다움’이란 왜곡된 통념에 기댄 ‘안희정 무죄’…

위력에 의한 간음죄 판단 기준 저항에서 동의로 바꿔야
등록 2018-08-21 18:30 수정 2020-05-03 04:29
지금까지 위력에 의한 간음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는 피해자가 아동, 청소년, 장애인 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8월14일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의 무죄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지금까지 위력에 의한 간음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는 피해자가 아동, 청소년, 장애인 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8월14일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의 무죄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형법 제303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8월14일 무죄를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 성폭행 사건의 쟁점은 형법 제303조에서 명시한 ‘위력’이다. 1심 재판부의 논리는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유력 정치인으로 피해자의 임면권을 갖고 있다”는 위력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이를 행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판결의 사회적 파장을 의식한 듯 재판부는 13쪽 분량의 선고문에서 “‘노 민스 노’(No means No·부동의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성관계한 경우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나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적극적인 동의 의사가 없었는데도 성관계한 경우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가 입법화되지 않은 현행 법제에서 피고인의 행위를 처벌하기 어려워 보인다”며 안 전 지사에 대해 ‘현행법으로는 무죄’라는 여지를 남겼다.

여성 보호 못하는 형법 제303조

결국 안 전 지사에 대한 1심 선고는 위력에 의한 간음 사건을 두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인정하면서도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을 따지는 법원의 시각을 드러냈다. 또 피해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저항했는지를 스스로 입증하지 않으면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행법의 한계도 보여줬다.

1953년 형법 제정 때부터 존재했던 제303조 조항은 애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한다는 입법 정신이 담겨 있다. 당시 법을 만든 이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법 조항에 담았다. “강자의 지위에 있는 자가 약자의 지위에 있는 부녀의 정조를 농락하는 소행에 대해 그것이 강간이 아닌 이상 아무런 처벌 규칙도 없는 것이 우리 현행 형벌 법규다. 그러므로 이런 행위를 처벌키 위함이다.”

정조를 보호해야 할 법익으로 봤던 남성 우월적, 전근대적 시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다. 1995년 형법 개정 등을 통해 위력에 의한 간음죄로 보호하려는 대상은 기존 ‘정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옮겨왔다. 배우자인 남성을 전제로 한 ‘여성의 정조’나 ‘순결’이 아니라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여성이 가진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 법익이라고 전향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위력에 의한 간음죄 적용 여부를 가리는 현실의 재판정에서 피해자는 하나같이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위력 행사가 있었는지, 권력관계가 있었는지를 가리기에 앞서 피해자에게 어떻게 거부했는지부터 묻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피해자가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범죄 사실 입증이 수시로 뒤집혔다.

대법원은 1998년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에 관한 판결에서 위력에 대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폭행·협박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안 전 지사의 사건에 대한 판단처럼 위력에 의한 간음 사건의 경우, 위력의 개념을 좁게 해석해 피해자의 저항 여부에 초점을 맞춰 범죄 유무를 판단하는 통상적인 기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상황이다.

지금껏 위력에 의한 간음을 인정한 판례는 피해자가 미성년자거나 장애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판부는 청소년과 장애인의 신체적·정서적 특수성을 고려해 피해자가 저항하기 어려운 장소나 공포심, 술에 취하는 등 심신미약의 상태, 신체적 차이 등을 기준으로 피해자가 느꼈을 위력의 정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앞서 2005년 대법원은 10대 피해자가 남자친구의 아버지인 가해자와 성관계를 한 과정에서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고 안겨보라는 말에 스스로 안긴 점 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뒤집기도 했다. 피해자의 거부 의사표시에도 가해자가 피해자의 팔목을 힘있게 잡았고, 가해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순간적으로 저항하기 어려웠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

미성년 등 제외하고 위력에 의한 간음 판례 거의 없어

하지만 성인의 경우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것으로 보고 법원은 위력 행사를 소극적으로 판단해왔다. 실제 피해자가 미성년자거나 장애인인 경우를 제외하고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 자체도 드물다. 1976년 대법원은 부인이 경영하는 미장원에 고용된 직원과 성관계를 맺은 사건에 대해 사실상 보호·감독 관계로 보고 위력에 의한 간음을 인정한 적은 있지만 이후에는 비슷한 판례를 찾기 어렵다.

2014년 울산지방법원이 50대 요양보호사가 요양병원 병실에서 자신의 보호를 받던 피해자를 위력으로 간음한 사실을 1심에서 인정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물리적 위협을 고려한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끈으로 침대에 묶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요양보호사의 말에 피해자가 공포심을 느껴 저항하지 못했다고 보고 위력에 의한 간음을 인정했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라는 ‘맥락’은 사라지고, 피해자가 ‘피해자답게’ 저항했느냐가 유무죄를 가르는 것이다. 김영미 변호사는 “성인은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가 비교적 자유롭다고 보고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을 보수적으로 인정한다”며 “이번 사건은 위력 행사와 간음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현행법의 한계 안에서 판시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결국 안 전 지사에 대한 법원의 무죄 선고를 두고 법조계 일부와 여성단체에서는 위력의 범위를 더 폭넓게 해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성폭력 범죄의 성립 조건을 저항이 아닌 동의에 두는 추세다. 독일에서는 2016년 쾰른 광장에서 일어난 집단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피해자들이 저항해야만 성범죄가 증명되는 것에 반대하는 ‘노 민스 노’ 캠페인이 추진되면서 법이 개정됐다. 특히 스웨덴은 5월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성관계 전 상대방의 명백한 동의를 얻어야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예스 민스 예스 룰’ 법안을 통과시켰다.

국내 정치권도 법 개정에 나선다는 입장이다. 앞서 3월 비동의 간음에 대한 해석을 폭넓게 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법(제303조) 개정안이, 4월 강간죄의 성립 범위를 확대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법(제297조) 개정안이 발의됐다. 5월에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 처벌을 강화하는 형법(제303조) 개정안도 발의됐다.

명백한 동의 없으면 성폭력 처벌해야

물론 위력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면 단순히 위계만으로도 모든 성관계가 문제가 될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미투 운동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서 곪았던 성폭력 문제가 터져나와 논의를 미룰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피해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저항했는지를 스스로 입증하지 않으면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했던 현행법의 허점을 전향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며 “명백한 동의가 없으면 성폭력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체계 정비가 시급하다. 다만 피해자의 2차 피해 등을 고려해 비동의 간음·강간·특수강간 등의 형태로 나눠 세밀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