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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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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연임 대통령 된다는 절대권력 ‘지시’였다

1심 재판부가 배척한 피해자 진술을 바탕으로 구성한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또 다른 얼굴
등록 2018-08-21 15:37 수정 2020-05-0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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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14일 #미투 운동 국면에서 ‘권력형 성범죄’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던 ‘안희정 사건’의 1심 판결이 있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조병구)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형법 제303조) 4회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성폭력처벌법 제10조) 1회 △강제추행(형법 제298조) 5회 등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0개 혐의 전부에 무죄를 선고했다. 서부지법은 보도자료를 내 “이 사건 공소사실에 관하여 이를 인정할 만한 증명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보도자료와 별도로 나눠준 ‘선고문’(판결문 분량이 114쪽에 이른다며 재판부가 판단한 ‘핵심 내용’을 요약한 13쪽 문서)을 보면, 재판부의 판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여성이 상대방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것인가의 여부를 자유의사의 제압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하였음에도 자신의 결정을 사후적으로 번복하면서 상대방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부인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재판부가 권력에 의한 성범죄로 기소된 사건을 ‘성적 주체성이 있는 여성이 자유의사에 의해 성관계를 한 뒤 처벌을 요구한 일’이라고 새롭게 판단한 셈이다.
재판부의 이런 인식은 언론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며, 여기에는 ‘치정과 미투는 구분해야 한다’ ‘꽃뱀’ ‘상간녀’ 따위의 악성 댓글이 상위에 오른다. 이런 여론의 ‘반응’에는 성폭력 사건에 내재한 ‘정보 불균형’ 문제가 있다.
재판 과정에서 채택된 검찰 쪽 증인 5명 가운데 핵심 증인 3명(피해자, 전임 수행비서 A씨, 전전임 수행비서 B씨)의 증언은 비공개됐다. 반면 안 전 지사 쪽 증인 7명의 증언은 전부 공개됐다. 지금 일반인이 알고 있는 정보 대다수가 안 전 지사에게 유리한 정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안 전 지사의 아내 민주원씨의 ‘상화원 부부 침실 침입’ 증언 등이 기사화되는 동시에, 안 전 지사의 ‘무죄 근거’로 소비된 것처럼 말이다. 김수아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는 “재판부가 검찰의 재판 전체 비공개 요청을 거부한 것이 결과적으로 언론의 2차 가해를 유도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 보호는 피해자의 증언만 비공개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재판부가 ‘비공개된 피해자’의 진술을 거의 배척했기 때문에 이번에 공개된 선고문과 보도자료를 통해서도 피해자 쪽 ‘비공개 진술’은 공개될 수 없었다. 이 피해자 쪽 동의 아래, 재판 과정에서 비공개로 가려졌던 피해자 검찰 진술조서와 피해자 쪽 증인의 법정 증언을 단독 입수한 까닭이다. 1심 재판부가 ‘안희정 사건’을 무죄로 구성할 때 배제한 피해자 쪽 증언을 검토하는 일은, 정보 불균형으로 편향된 여론의 균형을 위해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항소심에서 ‘위력 행사’에 대한 논쟁과 새로운 판례 정립을 위해서도 절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8월14일 오전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8월14일 오전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안희정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판결문 서두에 ‘죄형법정주의’를 언급했다. 성폭력에 대한 형사처벌도 각종 증거 법칙에 따라 엄격하게 판단해야 하고, ‘범죄 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는 형사소송법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 전문가들과 법조계 일각에서는 재판부의 죄형법정주의 언급이 위력에 의한 성관계를 좁게 해석하기 위한 ‘알리바이’라고 주장한다. 안 전 지사에게 유리하게 판결하기 위한 일종의 핑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은 일반 형사사건과 다른 특수한 성격이 있기 때문에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다보면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반박한다.

재판부가 의도적으로 성폭력의 범위를 좁게 해석했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재판부가 피해자의 모든 진술을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의 판단은 과연 합당한 것일까. 그러나 피해자가 법정에서 비공개로 증언한 내용은 판결문에 등장하지 않은, 언론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말한다.

 

①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정도의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보도자료에서 “유력 정치인으로서의 지위 및 도지사라는 지위와 그 비서의 관계는 ‘위력’에 해당”하지만 “위력을 행사했거나 위력의 존재 자체로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억압하였다고 볼 만한 증거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위력 관계’는 맞으나 ‘위력 행사’에 의한 성폭력은 없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판결 선고문을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사건을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갖춘 성인 남녀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아예 ‘위력’의 존재를 배제하는 태도까지 엿보인다.

그러나 이 입수한 피해자의 검찰 진술조서를 보면,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로서 ‘24시간 근접 수행’을 하면서 목격한 안 전 지사의 ‘위력’에 대한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진술인이 느낀 충남도청 내 피의자의 위치는 어느 정도인가’를 묻는 검찰의 질문에 피해자는 “도청에서 언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 사람은 충남도지사가 아니라 차기 대통령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다음으로 안희정이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안 전 지사에 대한 평소 심리적인 감정’을 묻는 말에는 “그 사람은 나랑 다른 사람이다. 나는 참모일 뿐인 거고, 이 사람은 개헌 후 연임까지 생각하는 대통령이었다. 제가 실제로 그걸 다 옆에서 봤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사람을 대하는지 아니까. 해외에서도 그렇게 귀빈 대접을 하니까”라고 했다. ‘피의자도 그러한 진술인의 심리 상태를 알고 있었냐’는 질문에는 “알고 있다. 저한테도 그러셨다. ‘내가 대통령을 하는 게 맞을까? 맞겠지?’ ‘그런데 난 좀 쉬고 싶다. 어떻게 이(렇게) 15년을 가냐?’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문재인 정부 임기 내 대통령중임제로 개헌이 될 경우, 2022년 대선에 당선되면 2030년까지 연임이 가능하고, 2017년 당시를 기준으로 2030년까지 ‘15년 정도’로 어림한 것으로 보인다.

진술조서 곳곳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안 전 지사의 위력에 대한 피해자의 묘사는 “절대 권력” “미래 권력”으로 표현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피해자가 2017년 12월 정무비서로 발령 나고 후임 수행비서가 된 C씨가 피해자에게 털어놨다는 사례는 평소 수행비서들이 목격한 안 전 지사의 권력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 “행정안전부 지침에는 원래 수행비서는 청와대 안에 못 들어가고 그냥 신분증이랑 비표만 지사한테 드리고 차에서 대기하게 되어 있다. …그 친구(C씨)가 매뉴얼대로 하니까 막 화를 내셨다는 거다. ‘나는 무조건 프리패스인데, 너 그것도 안 물어봤냐? 내가 안희정인데 내가 신분증을 차고 들어가?’ …내가 그랬다. ‘청와대 어차피 총 안 쏘니까 그냥 지사님 편하신 대로 해라. 안 지사 수행비서라고 하면 다 용인된다. 지사님 심기만 거스르지 마라. 그 밖의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라.’ …본인도 그걸 알았을 거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보다 지사님이 더 무서우니까.”

안 전 지사는 검찰에 ‘(피해자는) 언제든지 감찰기관에 대한 진정, 언론에 대한 제보 등을 통해 자신의 정치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진술했다. 검찰이 피해자에게 이에 관해 묻자 “제가 지사랑 통화하는 사람들… 다 알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얘기하냐. 충남경찰청장, 청와대 누구, 감사원 어디 누구, 국정원, 최고 지위 사람들 다 만나고… 경찰, 검찰에서 수시로 전화 오고 변호사, 국회의원들도 연락 오고 하는데, 어떻게 그걸 감사기관에 제가 얘기를 하냐. 차관은 자기랑 급이 안 맞는다고 자기가 직접 연락도 안 한다. …대통령 행사도 자기가 롤(명단)이 없으면 안 가겠다는 사람인데. …절대 권력 안에서 제가 어떻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나? 저라는 일개의 사람이.”

차기 대권 주자 주변에 형성되는 권력의 자장은 상식적인 수준의 일이며, 불법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새삼스럽게 이 문제를 짚는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위력에 의한 성폭력 범죄를 판단하는 재판부가 이 사건을 마치 ‘진공상태’에서 벌어진 일로 축소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② 성폭행 다음날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찾고 와인바 같이 가면 피해자가 아니다?
안 전 지사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온 8월14일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판결 결과를 비판하는 집회를 열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안 전 지사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온 8월14일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판결 결과를 비판하는 집회를 열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피해자는 수행비서 발령이 난 2017년 7월3일 이후 채 한 달도 되기 전인 7월30일 안 전 지사의 러시아 출장 수행 중 성폭행을 당했고, 바로 다음날 평상시처럼 수행비서 업무를 했다는 입장이다. 재판부는 “간음 피해를 잊고 수행비서 일로서 열심히 수행하려고 한 것뿐이라는 피해자의 주장에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배척 사유로는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하는 식당을 찾아 아침 식사를 하려고 애쓴 점 △피해 당일 저녁에 피고인과 와인바에 간 점 등을 제시했다. 재판부의 서술을 보면 ‘순두부’와 ‘와인바’는 공적 업무가 아니라 연인 사이의 ‘데이트’ 정도로 왜곡될 소지가 다분하다. 실제 피해자를 비난하는 악성 댓글의 단골 소재도 순두부와 와인바다.

하지만 재판부가 인정한 ‘순두부’ 관련 진술은 당시 출장에 동행한 충남도청 공무원의 공개 증언에서 나온 것으로, 피해자는 “허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혜선 변호사는 “순두부 식당을 검색해서 찾았다는 건 피고인 쪽 증인의 증언일 뿐이다. 피해자한테는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확인한 적이 없다. 아침에 식당을 찾는 과정에서 순두부를 제안한 것은 도청의 다른 공무원이었으며, 결국 햄버거로 아침 식사를 했다는 게 피해자 얘기”라며 “설사 순두부를 검색했다고 해도 성폭행 여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와인바 역시 안 전 지사의 업무 지시였다. 안 전 지사는 러시아 대사가 마련한 발레 공연을 거부하고, 대사의 또 다른 일정 제안마저 재차 ‘싫다’고 한 뒤 피해자에게 직접 “와인바 등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또 와인바에는 현지 교민이 계산할 때까지 함께 있었다. 안 전 지사와 피해자 둘만의 개인적 일정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재판부의 인식은 성폭행 피해자라면 피해 다음날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게 ‘정상적’이라는 ‘피해자다움’의 통념에 갇혀 있는 것 같다. 한 범죄심리학 전공 교수는 인터뷰에서 ‘피해자다움’의 문제를 조목조목 짚었다. “재판부는 순두부 등 ‘피해자답지 못함’을 입증하는 정황적인 진술을 제시하면서 피해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결론 내렸다. 피해자다운 피해자만 있는 게 아니다. 성폭력 피해를 당하면 당장 발칵 해서 다 뒤집어놓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피해자다움의 룰이 있는 게 아니다. 피해자다움이 사건 즉시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한 달 후에, 수년이 지나서, 친족 성폭행 경우는 성인이 된 다음에야 피해자다움이 나타나기도 한다. 선고문만 보면, 안희정과 피해자가 상식적인 수준의 상사와 부하 직원 수준으로 인식될 뿐 거물 정치인과 수행비서의 독특한 관계라는 것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안희정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조직의 독특한 다이내믹을 따져야 한다. 성폭행을 당한 다음날 순두부 주문을 하러 쫓아다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게 ‘위력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해자를 비롯해 검찰 쪽 핵심 증인으로 나온 전직 수행비서 A씨와 B씨의 진술 내용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안 전 지사 수행비서 업무의 ‘특수성’에 대한 설명이다. 수행비서 업무는 실상 ‘24시간 수행’이었다. 업무 매뉴얼을 만들기도 한 B씨는 ‘전화 응대 매뉴얼’과 관련해 ‘전화기는 24시간 항상 휴대 및 망 대기(세면시, 목욕시에도 투명 봉지를 이용 항시 휴대)’라고 적었다. ‘24시간’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B씨는 “안희정 지사는 밤이나 새벽 2, 3시에도 문자를 보내기 때문에 그것에 응대하기 위해서 ‘24시간 휴대’라고 써놓은 것”이라고 진술했다.

③ 담배 가지고 오랄 때 거절할 수 있지 않았나?

전전임 수행비서 B씨 증인신문에서 그가 작성한 수행비서 ‘업무 매뉴얼’ 검토가 있었다. 녹취서를 보면, B씨는 매뉴얼에 있던 ‘로열티’ 항목을 상세히 설명한다. “저희 선임들로부터 우리는 안희정 지사를 보필하러 왔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사람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저도 안희정 지사에게 배운 것이,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서 희생했다고 항상 배워왔기 때문에 충성심을 가지고 안희정 지사가 무슨 잘못을 하거나 감옥에 가야 할 때 대신 가야 한다는 교육들을 많이 받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안희정 지사를 방어하고 막아주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로 교육을 받았다.”

재판부는 이런 특수성을 도외시한 채, 밤에 담배와 맥주를 구실로 호텔 객실로 부르는 안 전 지사의 지시를 피해자가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에 집중했다. 선고문과 보도자료는 피해자가 전임 수행비서 A씨에게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도 자발적으로 호텔 방에 들어간 것처럼 서술돼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들어가지 말라”는 말에 대한 A씨의 ‘진심’이 담겼을 수 있는 부연 설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는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이 들어가지 말라는 말밖에 없었고, 실제로 전임 수행비서로서 (지사가) 불렀는데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회피용으로 그렇게 답변했다” “(피해자가) 담배 같은 것을 밤에 찾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당연히 갖다드려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는 등의 증언을 했다.

발령 두 달째 되던 2017년 9월3일 발생한 스위스 출장 성폭행의 경우 재판부는 선고문에서 “의문이 가는 사정”이라고 표현했다. “A씨에게 피해 사실을 호소했고, A씨도 피고인의 객실에 들어가지 말라는 조언을 했음에도 피고인의 객실로 들어가 간음에 이르게 된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재판장인 조병구 부장판사는 재판 때 “들어가지 말고 (문) 앞에 두고 텔레그램으로 ‘앞에 두었다’라고 답장을 하라고 조언했다”는 A씨의 증언을 꼼꼼히 확인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A씨로부터 “문 앞에 걸어두고 가는 것은 사실상 저는 해본 적이 없다”거나 “실질적으로 지사님이 찾는 물건을 바닥에 두고 가는 것은 일반적으로 저희 태도에 맞지 않는다”는 답변을 확인했으나, 보도자료와 선고문에서 이를 참작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피해자의 행동에서 공사가 뒤섞이는 상황 역시 안 전 지사 수행비서의 ‘업무 특성’으로 보인다. 피해자 진술조서를 보면, 피해자는 공사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안 전 지사의 지시에 정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 천주교 주교와의 만찬 때 피해자는 주교에게 줄 빵을 사서 이동하는 중에 ‘집사람 줄 소보로 빵도 몇 개 사라’는 지시를 받는다. “다 사고 가고 있는 상황이라 바로는 못 사고 ‘조금 이따 식사 중에 사다놓을게요’라고 하고 주교랑 먼저 만찬장에 모셔다드리고, 식사 중에 저는 밖에 나와 바로 빵을 사왔다. 중간에 경제부총리한테 충남도 예산 때문에 전화가 온 것도 연결해드렸다.”

때로는 지사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피해자가 사비를 털어야 했다. 땅콩캐러멜, 껌, 커피 등의 간식은 운전비서 15만원, 수행비서 15만원, 기타 일비를 모아 충당했다. “가뭄과 홍수 때문에 지사 지인이 고춧가루를 구하기 힘들다며 유명하다는 고춧가루를 사서 지인에게 열 근만 보내라고 해서 내가 사비로 사서 보내고 보전받지 못한 적도 있다.”

2017년 8월13일 서울 강남 호텔에서 이뤄진 두 번째 성폭행 이후엔 호텔 숙박비를 피해자가 결제했다. “사비로 내라고, 출장 비용처리 하지도 말고. 나는 체크카드를 쓰는데, 돈(잔고)이 충분히 없어서 입금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 결제했다.” 이때 결제된 돈이 60여 만원이다. 강남 성폭행 혐의와 관련해 재판부는 보도자료에 “운전비서에게 만실이 아님에도 호텔이 만실이라는 취지로 말하여, 다른 곳에 숙박토록 했다”며 마치 피해자가 성관계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운전비서를 다른 숙소에 묵게 한 것처럼 적시했으나, 이는 운전비서의 증언만 반영된 것이다. “운전비서는 여비 지원이 되지 않아 수행비서만 지사와 같은 급의 호텔에 숙박하고 운전비서는 자기가 (저렴한) 숙소를 알아봐서 투숙했다”는 피해자의 일관된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안 전 지사 쪽 증인으로 출석한 운전비서 역시 피해자에게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도 고려되지 않았다.

 

④ 성적으로 주체적이고 자존감이 높아 저항할 수 있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운전비서에게 당한 일을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할 여지가 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표현하면서, 피해자의 문제제기가 좌절된 것보다 피해자의 문제제기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를 토대로 “기타 사정 등을 보아도 피해자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을 갖춘 사람으로 보이고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아니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 부분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추가적 주요 정황 검토” 항목에서 주요하게 다뤘는데 피해자 진술조서에 나온 당시 상황과는 차이가 크다.

피해자는 운전비서의 성추행을 문제 삼은 일에 대해 “지사도 그러는데 운전비서까지 그러니 내가 노리개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지사님에 대한 분노가 그 사람한테 투영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 해결해줄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지사님에 대한 얘기도 좀 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운전비서의 일이 안 전 지사의 피해를 공론화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리트머스시험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피해자는 수행비서 출신 비서실장으로부터 “그래서 사과했다며, 수행비서는 하고 싶다는 사람 많아. 너 관둬도 돼. 그런데 운전은 힘들어서 하고 싶다는 사람이 없어. 지금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피해자는 이를 “결국 내가 잘리는구나. 내가 견뎌야 되구나. …운전비서도 펄펄 날뛰는데, 지사한테 그러면 나만 잘리고 말겠구나. 나만 이상한 여자가 되겠구나”로 받아들였다고 진술했다.

 

⑤ 피해자가 상화원서 부부 잠자리 쳐다봤다?
2017년 3월28일 안 전 지사와 아내 민주원씨가 경남 양산 통도사를 찾은 모습. 연합뉴스

2017년 3월28일 안 전 지사와 아내 민주원씨가 경남 양산 통도사를 찾은 모습. 연합뉴스

1심 재판부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피해자의 행동이 다소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추가적 주요 정황 검토’ 부분에서 운전비서와의 갈등과 함께 이른바 ‘상화원 사건’을 별도로 설명하면서 피해자의 진술을 배척했다. 상화원 사건은, 2017년 8월18~19일 충남 보령시의 전통 휴양시설인 상화원에서 열린 중국 대사 접대 행사 때 있었던 일이다. 안 전 지사의 부인 민주원씨는 7월13일 법정에 출석해 “상화원에서 새벽에 자는데 ○○○(피해자)이 부부침실로 들어와 3~4분가량 지켜보다 나갔다”고 증언했다.

피해자를 ‘이상한 여자’ 프레임에 가둬버린 이 상화원 사건에는 제3의 인물, D씨가 등장한다. 이 인물은 1심 재판부가 배포한 보도자료에도 나온다. 민씨는 피해자가 부부침실에 들어왔다고 말하지만, 피해자는 침실에는 들어가지는 않고 ‘(D씨 일로) 사모가 있고, 중국 대사까지 참석한 일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2층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당시 안 전 지사의 휴대전화는 피해자 휴대전화로 ‘착신 전환’이 된 상태였다. D씨가 안 전 지사에게 ‘옥상에서 2차를 기대한다’고 문자를 보냈고, 피해자가 이를 본 것이다.

전임 수행비서 A씨의 법정 증언 녹취서를 보면 피해자가 왜 D씨 문자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설명된다. “지사가 D에게 스킨십을 하려고 해서 제가 자연스럽게 어깨를 중간에 밀고 들어가며 남들이 오해를 삼지 않게 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검사가 ‘그런 스캔들을 막는 것도 수행비서 업무 중의 하나냐’고 묻자 A씨는 “그렇다. 그렇게 후임 수행비서(피해자)에게 인수인계를 하였고, 재직 당시 크고 작은 노력을 많이 해왔다”고 답했다. D씨와의 스캔들을 막는 일은 피해자가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받은 주요 업무였던 셈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해자와 A씨의 증언이 아니라 민씨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세부적인 내용에서 피해자의 증언에 모순, 불명확한 점이 다수 있고, 피고인의 처인 민아무개의 증언이 상대적으로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 민씨의 증인 신문 녹취서를 보면, 그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는 재판부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민씨는 일관되게 ‘피해자가 안 전 지사를 일방적으로 좋아했다’고 주장하면서 침실에 들어온 일을 증언했는데, 검찰로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논박당했다. 검찰 증인신문에 따르면, 민씨는 새벽에 난데없이 침실에 침입한 수행비서를 두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놀라서 일어나거나 깜짝 놀라 소리치거나 안 전 지사를 깨우지 않았으며 △피해자가 나간 뒤 따라 내려가서 왜 들어왔냐고 묻는 일도 없었다. △민씨는 다음날 1층에 있는 피해자 방에 가서 눈썹펜슬을 빌렸으며 △그때 ‘왜 새벽에 침실에 들어왔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민씨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렇다” “제가 상황 판단이 됐으면 여기까지 와 있지도 않았을 것”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는 등의 말로 얼버무렸다.

 

⑥ 씻고 오라 했는데, 씻고 온 건 이상한 걸까?

재판부는 2017년 8월13일 강남 호텔 성폭행과 2018년 2월25일 마포 오피스텔 성폭행을 서술하면서 특별히 “씻고 오라”는 표현이 있었다고 강조한다. 보도자료에서는 강남 호텔 성폭행에 대해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씻고 오라’고 하였는데 시간, 장소, 당시 상황, 과거 간음 상황 등에 비추어 그 의미를 넉넉히 예측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으며, 마포 오피스텔 성폭행에 대해서는 “피고인이 ‘씻고 오라’고 하자 샤워를 하고 왔다. 수행비서도 아니고 달리 당시 심리적으로 제압을 당한 상황이라 볼 만한 정황도 없으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심야에 대전에서 올라올 정도의 상황이었다면, 피고의 이런 행위가 미투 운동의 사회적 가치에 반한다고 언급하거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가는 등으로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해자의 그러한 언행은 없었다”고 적었다. 재판부는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높은’ 피해자가 회피나 저항을 하지 못한 것을 심리적 제압을 당한 정황으로는 보지 않았다.

당시 피해자의 심리 상태는 검찰의 피해자 신문조서로 짐작해볼 수 있다. 마포 오피스텔에서 있었던 “씻고 오라”는 말을 피해자는 “지시”라고 표현했다. 이날 있었던 안 전 지사의 ‘지시’는 “씻고 오라”는 것만이 아니었다. “안으라”고 했고 폭행이 끝난 뒤에는 다시 “씻으라”고 했다. 피해자가 일련의 과정을 서술한 내용은 마치 업무 지시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과 같다. “관계가 끝난 후 본인이 씻더니 저보고도 씻으라고 해서 씻었고, 그 후에 또 침대 위를 청소하라고 청소도구 위치를 알려줘서 ‘돌돌이’로 청소를 했고, 빨리 나가라고 해서 당시 갖고 있던 돌돌이 테이프 뜯은 거를 ‘휴지통 어디 있어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이 급해서 그냥 가지고 나왔다.” 그는 휴지통 어디 있냐는 질문조차 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지사에게는 뭘 물어볼 수 없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반문할 수가 없다”고 답했다. 검찰 질문을 보면 안 전 지사는 검찰에 ‘○○○(피해자)가 밀회를 즐기는 마음으로 오피스텔에 왔고, 함께 맥주 한잔을 했고, ○○○이 먼저 ‘저 씻고 올게요’라고 하며 샤워를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1심 재판부는 당시 상황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안 전 지사의 진술을 인정했다.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한 4번 가운데 3번은 2017년 7월3일 수행비서 발령을 받은 뒤 9월3일 스위스 출장까지 2개월 안에 생긴 일이다. 12월 정무비서로 발령 난 뒤 마음을 추스르던 피해자는 2018년 2월25일 마포 오피스텔에서 6개월 만에 또다시 네 번째 성폭행을 당하면서 마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난 여기 못 있겠구나. 이 소굴에서 나와야겠다. 안 그러면 계속 부를 테니까.”

⑦ 피해자와 안 전 지사가 정말 연인이었을까?

피해자는 네 번째 피해가 있고 나서 하혈 증상이 나타나자 산부인과를 찾아 “비정상적인 자궁 및 질 출혈”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진료기록부에는 “원치 않는 성관계로 인함”이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 피해에 대해 피해자는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끔찍한 기억이다. 지사의 성기가 들어와 있는 느낌이 너무 끔찍한 기억이다. 혼자서 계속 미친 사람처럼 뭔가 얘기했던 것들이. ‘성욕을 이렇게 푸는구나. 빨리 나가고 싶다. 언제 끝나나, 언제 끝나나’ 계속 이 생각 했던 것 같다.”

피해자 진술조서를 보면 JTBC 인터뷰에 나와서 “저에게 안 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사님이었다”고 한 말의 맥락이 드러난다. ‘이성적인 호감을 느껴본 적이 있냐’는 검사의 질문에 “진짜로 그 말은 하고 싶다. 많은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고 자기 팬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저는 그 사람의 이념이나 가치, 그게 좋았던 거고 그걸 따랐던 거지 안희정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성적인 호감이 아니었다. 제 스타일이 아니다. 실제로 나이도 너무 많고 제가 교감하거나 이성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피해자와 안 전 지사가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진이나 문자 기록, 텔레그램 메시지 기록이 한 번도 제출된 적이 없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정혜선 변호사는 “초기에 우리도 사건을 파악해가는 단계에서 사진 나온다 얘기가 돌았다. 피해자한테 물어봤는데 ‘없다’고 했고 실제 증거로 나온 바 없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안 전 지사 역시 영장실질심사가 있던 3월28일 법정에서 ‘피해자와 교감하거나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번 사건은 피해자에게 무엇이었을까. 피해자는 피해 경험에 대해 말했다. “체위는 늘 지사가 제 위에 있었다. 늘 왕의 시중을 드는 느낌. 제가 아파서 움직이려고 하면 제 양쪽 어깨를 꽉 잡고 눌렀다.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냥 저를 가지고 노는 느낌이었다. 제가 나무인형이 된 느낌? 혼자서 인형 가지고 노는 거 있지 않나.” “그는 다 알고 있었다. 내가 부르면 여자들은 올 것이고 나는 왕이니까 내가 너를 선택해서 내가 너에게 섹스를 해주는 시혜 같은 느낌. 나는 그와 교감을 하거나 그를 동경해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사님이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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