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하게 국가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타이 육군, 공군, 경찰로 구성된 국가평화유지위원회가 5월22일 오후 4시30분을 기해 권력을 장악했다.”
텔레비전에 나온 낯익은 인물이 근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때는 2014년 5월22일, 타이 전국에 생중계된 연설에 나선 인물은 쁘라윳 짠오차 타이 육군참모총장이다. 왕비 근위부대 출신의 왕당파인 그는 육군 중장 시절이던 2006년에도 쿠데타에 가담했던 전형적인 ‘정치 군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014년 이후 ‘잃어버린 4년’</font></font>쿠데타 직후 쁘라윳 총장은 ‘적임자를 찾을 때까지’를 시한으로, ‘행정적 편의를 위해’를 목적으로, 총리 권한대행을 자임했다. 타이 전역에 통행금지령(밤 10시~새벽 5시)을 내렸고, 5명 이상 모이는 집회도 금지했다. 정규 방송이 중단된 가운데 외국 위성방송 송출도 제한됐다. “대중적 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인쇄 매체와 온라인 매체에도 재갈을 물렸다. 4년이 바람처럼 흘렀다.
1932년 6월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이후 2014년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타이에선 모두 12차례 ‘성공한 쿠데타’가 벌어졌다. 진기한 기록도 있다. 1933년과 1951년, 1976년 등엔 1년에 두 차례씩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했다. 1957년과 1958년엔 사릿 타나랏이 쿠데타와 친위 쿠데타를 거푸 벌인 바 있다. 웃지 못할 역사다.
베트남전쟁이 불을 뿜던 1960~70년대 타이는 미 공군의 안전한 후방 발진기지 노릇을 했다. 그 무렵 좌파 성향의 소수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군부와 맞서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이 스러지거나, 갇히거나, 소신을 꺾었다. 1980년대 2건, 1990년대 1건으로 쿠데타의 빈도가 줄었다. 타이 정국도 점차 안정세로 접어드는 듯했다.
아니었다. 2001년 1월 선거에서 탁신 친나왓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경찰공무원 출신으로 방송·통신 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재산을 모은 탁신은 1990년대 중반 정치권에 발을 들인 뒤 1998년 타이락타이당을 창당한 ‘이단아’였다. 당시 선거에서 40.6%를 득표한 타이락타이당은 의회 500석 가운데 248석을 장악했다. 탁신은 일약 총리에 올랐다. 왕실과 군부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타이 주류 엘리트 집단은 경악했다. 이후 타이 정치는 탁신을 둘러싼 지지와 반대 진영으로 양분돼 갈등을 거듭해왔다.
2005년 2월 총선에서 탁신 총리가 이끈 집권당은 56.4% 득표율을 기록하며, 500석 가운데 375석을 차지했다. 주류 집단의 사력을 다한 흔들기에도 되레 의석을 127석이나 늘린 게다. 농가채무 지불유예, 저가 기초의료 서비스 제공, 농촌 개발기금 후원 등으로 대표되는 친서민 정책의 힘이었다. 탁신 총리는 2006년 4월 야권의 보이콧 속에 조기 선거를 치러 60.6%를 득표해 의석을 460석까지 늘렸다. 선거로는 탁신 체제를 무너뜨리기 어려워 보였다.
2006년 9월19일, 탁신 총리가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한 사이 일이 벌어졌다. 1991년 2월 이후 침묵해온 군부가 15년여 만에 다시 움직였다. 입헌군주제 도입 뒤 11번째 쿠데타였다. 탁신 총리를 몰아낸 군부는 1년3개월여 뒤인 2007년 12월 선거를 실시했다. 하지만 탁신 전 총리 지지 세력의 연대체인 ‘국민의 힘’이 39.60% 득표율로 압도적인 제1당에 올랐다.
이 무렵을 전후로 타이에선 반탁신·친왕실 성향인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이른바 노란셔츠)와 친탁신 세력인 ‘반독재민주연합’(UDD·이른바 빨간셔츠)이 거리에서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정국이 요동치자, 군은 다시 움직였다. 계엄령을 선포한 군은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힘’ 소속 3개 정당 해산 결정을 내리자, 전통적 엘리트 집단을 주축으로 한 민주당 쪽에 정권을 내줬다.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권력 입지 다진 군부</font></font>친탁신 진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2011년 7월 총선에서 탁신의 동생 잉락 친나왓이 이끈 프어타이당이 다시 48.41%의 득표를 올리며 원내 과반 의석을 거머쥐었다. 잉락은 타이 사상 첫 여성 총리로 취임했다. 군부와 주류 집단의 정국 흔들기는 이어졌다. 부패 추문이 꼬리를 물었다. 2013년 11월 탁신 전 총리 사면 논란을 시작으로 ‘노란셔츠’와 야권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른바 ‘방콕 셧다운’ 시위다. ‘빨간셔츠’도 맞불을 놨다. 대치 국면은 6개월여 이어졌다. 12번째 쿠데타의 전조였다.
“2014년 5월 쿠데타 직후부터 군부는 2006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2006년 쿠데타 세력이 탁신 진영의 선거를 통한 복귀 가능성을 차단할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봤기 때문이다.”
파누왓 판두프라서트 타이 치앙마이대학 교수는 지난해 1월 일본 교토대학이 발행하는 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쁘라윳 총장이 이끈 타이 군부가 지난 4년간 크게 3가지에 집중해 권력의 입지를 다졌다고 분석했다.
첫째, 민주주의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 ‘탁월한 국정운영 능력’으로 국민 삶의 질을 높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2014년 임시헌법 제44조가 부여한 비상 대권을 툭하면 휘둘렀다. 형식적인 의회 통과 절차도 생략한 채 군부가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이다. 통신은 5월18일 “쿠데타 이후 군부가 장악한 의회가 298개 법령을 통과시켰고, 군부가 따로 500개 넘는 포고령을 선포했다”고 집계했다. 군부가 타이 사회의 법 질서 근간을 흔들어놨다는 뜻이다.
둘째, 왕실이 군부 집권의 정당성을 부여해줬다는 주장이다. 그간 군부는 타이 왕실의 수호자 노릇을 자처했다. 특히 2016년 10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사망과 마하 와치랄롱꼰 왕자의 왕위 승계 과정을 매끄럽게 이끌었다고 강조해왔다. 군부 집권 뒤 왕실모독죄 적용 사례가 크게 늘었고, 위반자는 민간법원이 아닌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셋째, ‘개혁’을 군부가 계속 집권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다. 군부가 지명한 ‘국가개혁위원회’(NRC)를 내세워 각 정부 부처의 ‘개혁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개혁 방안을 군부는 ‘국가 20년 전략’으로 집대성했다. 군부의 ‘20년 집권 계획’으로 읽혀 아득해진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년 2월엔 선거 열릴까</font></font>쿠데타 이후 군부는 온갖 구실을 내세워 모두 4차례 민정 이양을 위한 총선을 연기했다. 군부는 내년 2월에 반드시 선거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쁘라윳 총장은 군복 대신 양복을 입고 타이 전국을 돌며 손을 흔들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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