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액수가 같아도 돈의 효용과 가치는 쓰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물며, 공부를 해도 여행을 가도 심지어 술·담배를 사도 괜찮은 ‘가욋돈’의 의미는 말 그대로 쓰기 나름이다.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의 ‘쉼표 프로젝트’에 참가한 4명도 그랬다. 자전거부터 월세까지, 6개월간 월 50만원의 기본소득이 선물한 자유와 행복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연구를 이끈 서정희 군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자전거보다 월세의 자유가 더 클까요? ‘너는 불쌍하니까, 너의 자유가 더 크게 증대될 테니까 국가가 지원해줄게, 너에게는 불필요하니까 너한테는 안 줄게’라는 식으로 자유의 크기를 재단하는 것 자체가 권위주의적인 것 아닐까요?”라고 물었다. 이번 실험 결과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지급되는 보편적 기본소득의 의미를 짚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의 표현이다.
1차 지급대상자인 김정화(45·가명·익산)씨는 중산층이다. 시청 환경미화원 위탁관리업체 직원인 정화씨가 매달 140만원을, 국토관리직 공무원인 남편이 월 320만원을 번다. 사회통념상 자전거 한 대 살 수 없을 정도의 형편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화씨는 기본소득 50만원을 6개월이나 받고서야, 그것도 지급 마지막 달에야 “평생 숙원 사업”인 자전거를 샀고, 배웠다. “평생 못해보고 죽을 수도 있었는데.” 지난 5월8일 익산에서 만난 정화씨는 연신 웃었다.
정화씨는 딸만 둘인 집 막내다. 부모님은 맏이인 언니를 강하게 키웠다. 반대로 막내딸은 뭘 하려고만 하면 “다친다, 하지 마라” 말렸다. 김씨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자전거를 진짜 못 타는” 이유다.
익산에도 수년 전부터 “라이딩 붐”이 일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먼저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친구도 합류했다. 두 친구는 김씨에게 “야~ 우포 가자” “너는 차 타고 가서 기다려” “삼겹살 굽고 있어” 농을 했다. 친구들이 정화씨 앞에서 자전거 동호회 가입을 상의할 땐 조금 얄밉기도 했다. ‘나 자전거 못 타는 거 뻔히 알면서….’
자가용도 있는 정화씨가 돈이 없어서 자전거를 못 샀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아들 둘 교육에 먼저 생활비를 떼고, 수시로 불쑥불쑥 생기는 비상 지출에 지갑을 털리고 나면 정화씨만을 위한 지출은 늘 후순위였다. 가정주부에게 지출 후순위란, 줄곧 ‘지출 불가’라는 말과 동의어다. “굳이 내 돈 주고 (자전거를) 살 생각은 없고…” “누가 선물로 사주면 탈까” 하는 마음이었다.
자전거로 출퇴근 “좋다, 너무”행운처럼 주어진 기본소득은 정화씨를 ‘충동’했다. 친정어머니가 쓰고 싶어 하던 무선 청소기를 사드리고, 지인·가족과 여행을 다녀오고, 급할 때 팔 수 있는 금목걸이를 사고, 무이자 할부로 코트도 한 벌 사고…. 정화씨는 평소 해보고 싶었던 걸 다 해보고도 남은 기본소득을 ‘숙원 사업’에 썼다. 친구들이 타는 500만원, 300만원짜리는 아니어도 25만원짜리 빨간 자전거는 정화씨에게 ‘충분’했다. ‘쉼표 프로젝트’가 아니었으면 ‘지르지’ 않았을 일이다. 요즘은 날씨가 좋으면 사무실 출퇴근도 자전거로 하고. “좋다, 너무!”
“한 달 50만원이 적은 돈인 것 같아도 하려고 마음을 먹으니 진짜 너무 많은 걸 한 것 같고, 마지막으로 한 일이 제일 좋았다.” 정화씨의 기본소득 사용 내용을 보면 ‘긴급한 필요’로 보기 어려운 항목들이 눈에 띈다. 자전거 구입은 물론 친구들과 종종 가던 스크린 골프장 대신 처음으로 골프 라운딩도 나온다. 서정희 교수는 “정화씨는 비록 고임금은 아니지만 지방에서 괜찮게 사는 평범한 가정이었는데도, 자녀를 키우는 엄마가 자신만을 위한 소비를 하기 어렵다는 걸 보여줬다”며 “개인의 자유란 과연 뭘까, 이론적으로나 통계상으로 볼 수 없었던 부분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했다.
경제적 자유가 확대된 덕분일까. 정화씨의 행복감과 삶에 대한 만족도는 ‘쉼표 프로젝트’ 참여 전후로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정화씨에게 주관적 행복지수를 물었다. 최저 0~최고 10단계 사다리로 대답해달라고 요청했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6이었던 김씨의 행복지수는 기본소득을 받은 이후 8로 올라갔다. 자기 삶에 대한 종합점수 역시 기본소득 전 7에서 기본소득 후 8로 한 단계 높아졌다.
2차 지급대상자인 김유지(26·가명·익산)씨에게 기본소득은 어쩌면 인생을 바꿔준 ‘비빌 언덕’이었다. 취업준비생 시절 “부부합산 통장 잔고가 0원”이라 절박한 마음으로 ‘쉼표 프로젝트’의 문을 두드렸다. 행운처럼 6개월간 기본소득을 받은 덕분에 “묻지 마 취직” 대신 “회사를 골라서” 구직에 성공했다.
유지씨 부부는 2016년부터 2017년 3월까지 1년간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했다. 유지씨는 마트 계산원으로, 남편은 요리사로 하루 서너 시간씩 일하며 “경제적 여유는 없지만 무식하게 쉬는 삶”을 살다 왔다. 귀국 뒤 부부가 함께 취업성공패키지에 등록했다. 각자 학원비 200만원 이외에 수당 28만원과 교통비 5만원, 부부 합산 66만원을 받아 생활했다. “2인 가구 적정 생활비는 250만원”이라는 유지씨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고, “150만원은 있어야 ‘집에서만’ 살 수 있다”는 마지노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입이었다.
유지씨네는 시댁에서 쌀을 받아 주식비를 월 15만원으로 틀어막았다. 친정집 외식에 매주 숟가락을 얹으며 외식비도 월 6만원으로 졸라맸다. 유지씨가 생각하는 자신의 경제적 계층은 최하 0~최상 10단계 중 3이었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유지씨는 ‘한국 사회는 한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느냐’는 질문에 “기회가 없다”고 답했다. 가난해도 “우울감 0”의 낙천적인 유지씨였지만, 희망은 없었다.
기본소득 지급대상에 당첨됐을 때 유지씨는 “엄청 큰돈도 아닌데 작은 돈도 아니에요. 이 애매한 50만원이 참 좋겠다. 없으면 못 쓰는 돈이지만, 있으면 참 요긴하게 쓰이겠다” 정도로 생각했다. 그 ‘애매하고 요긴한’ 기본소득은 결국 유지씨를 전공(디자인)과 취업성공패키지의 회계 훈련을 두루 살릴 수 있는, 집 근처 회사의 정규직 자리로 이끌었다.
취준생에서 회사원으로 ‘신분 상승’기본소득 실험 참여 기간에 유지씨는 회계사무소에 잠시 일자리를 구한 적이 있다. 일이 너무 많았고, 남의 일을 덤터기 쓰는 경우도 있었다. 기본소득이 없었다면 참고 다녔을 수도 있지만 관뒀다. 유지씨에게 근무시간과 출퇴근 거리는 중요한 직업 선택 기준이었다. 유지씨는 우연히 발견한 “집에서 차로 5분 거리”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고, 합격했다. “항상 집 가까운 게 좋거든요. 진짜 멀리 가는 게 너무 싫어서… 그래서 (지금 회사가) 너무 좋아요.” 그는 주 5일 하루 8시간씩 일하고, 토요일엔 격주로 하루 4시간씩 일한다. 4대 보험에 가입되고, 월급은 6개월 인턴 기간에 160만원을 받는다.
취업준비생에서 회사원으로, 기본소득 수급 이후 극적인 신분 변화가 있었다. 삶의 만족도도 크게 높아졌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만족도는 5였으나, 받은 후엔 10이 됐다. 행복지수 역시 받기 전 7에서 받은 후 10으로 올라갔다. 말하자면 유지씨는 지금 최대치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유지씨가 말했다. “기본소득을 받으면서 제가 이직도 하고 그런 거잖아요. 조금 마음 편하게 다른 데도 생각할 수 있었어요. 기본소득이 없었으면 (이직으로) 한 달 쉰다고 가정했을 때 조금 불안하잖아요, 벌다가 안 벌면. 그런데 (기본소득이 있어서) 그런 것 없이 그냥 든든하게 믿고 다른 데를 열심히 (찾아)봤어요. (기본소득이 없었다면)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하고 안 맞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일하려 했을 것 같아요.” 서 교수는 “최소 생계가 유지되는 현금 급여라는 게 개인들의 선택지, 노동자의 협상력을 강화해준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 연구팀은 3차 지급대상자 김동환(19·가명·전주)씨를 보면서 “기본소득이 빨리 도입돼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듯 위태로웠던 동환씨에게 기본소득은 ‘산소호흡기’처럼 보였다.
고교를 졸업하고, 사실은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픈 아버지와 할머니 생활비까지 부치는 착한 동환씨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집세를, 수도·전기·전화·난방비를 밀린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모두 “네”라고 답했고, “1년에 30번” 정도는 돈이 없어서 식사량을 줄이거나 끼니를 거른 적이 있다고 했다. 동환씨는 기본소득을 받는 6개월간 월세와 공과금을 단 한 번도 밀린 적이 없다. 친구들에게 들은 “용 됐다”는 칭찬은 동환씨의 처진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전북 진안 부귀에서 할머니와 사는 동환씨의 아버지는 무직이다. 면사무소 소방 담당 공무원으로 일하던 2014년 전신 70% 화상을 입은 뒤부터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동환씨는 주 3~4일,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시급 7천~8천원을 받고 일했다. 많을 땐 월 120만~150만원씩, 기본소득 지급대상자로 뽑혔을 땐 70만~100만원씩 벌고 있었다. 부정기적이긴 하나 월평균 아버지 50만원, 할머니 60만원씩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있었다. 쇠도 씹어 먹을 나이에 하루에 “아침 겸 점심 한 끼만” 먹고, 밤잠도 안 자고 일하는데 월세 내기도 빠듯했던 이유다. 소득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주는 기본소득이 동환씨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월세 20만원짜리 원룸에서 형과 함께 살던 동환씨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투룸으로 이사를 했다. 월세는 형과 반반씩 나눠서 낸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동환씨는 주로 사장한테 사정사정해서 가불해 월세를 냈다. 친구들한테도 가끔 손을 벌렸다.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땐 밀렸다. 한두 달 간격으로 월세를 밀리는 일이 반복됐다.
따박따박 내는 월세와 공과금기본소득을 받은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월세와 공과금 납부였다. “한 번도 밀린 적이 없다”거나 “내가 이걸 내나, 하하. 어떻게… 신기하기도 하고 뭐”라는 말에서 자부심이 스쳤다. 주로 단답형으로 답하던 동환씨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기본소득으로 월세를) 따박따박 내니까~ 미리 내요, 이제. 그 돈은 제가 쓰면 안 되니까, (집주인한테) 미리 줘요”라며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으쓱한 어깨가 말투를 통해 그려지기도 했다. “뭔가 잘사는 기분? 애들이 다 한번씩 물어보고, ‘야, 월세 냈냐~’ ‘야, 이거(기본소득) 받고 나니까 좋아 보인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부럽다고.”
기본소득은 이젠 받지 않지만 동환씨는 “더 열심히 해야죠”라며 “괜찮다”고 했다. 실제로 동환씨는 기본소득 지급 종료를 앞두고 시급 7500원짜리 ‘투잡’을 시작했다. ‘풀타임’으로 일하고 싶어 프랜차이즈 직영 치킨집으로 옮겼다. 4대 보험에 가입되고 식사도 주는 치킨집에서 오후 3시부터 새벽 1·2시까지 일한다. 새벽 3시~아침 7시에는 해장국집에서 한 달간 일했다. 한 달에 두세 번 쉬는 강행군이다. 치킨집에서는 200만원, 해장국집에서는 120만원 정도를 벌었다. 5월8일 동환씨를 만났을 땐 “몸에 너무 무리라 해장국집은 한 달만 하고 그만뒀다”고 했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동환씨는 ‘최근 1년간 자살을 생각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네”라고 답했다. ‘실제 시도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네”라고 답했다. “그냥 옥상에서 뛰어내릴까. 뛰어내릴 뻔했는데, 올라가기 전까지는 (뛰어내리려) 했는데 다시 생각해본 거죠.” 그는 가슴 철렁한 얘기를 덤덤하게 털어놨다. 인생의 끝 같은 난간에서 안전망 없는 바닥으로 몸을 던지려던 동환씨를 붙든 건 2014년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었다.
기본소득 수급 반년 뒤, 동환씨는 똑같은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했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삶의 만족도는 6이었는데, 받은 뒤엔 8로 높아졌다. 행복지수는 기본소득을 받기 전 4~5에서 받은 후 10으로 뛰었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우울한 기분은 4였는데, 기본소득 실험을 마친 동환씨의 대답은 “크흡, 없어요”였다.
4차 지급대상자 박진규(33·가명·전주)씨는 세후 소득이 210만원 정도 되는 1인 가구 계약직 노동자다. 진규씨는 기본소득 실험이 끝날 때까지, 전 국민이 아닌 노인과 저소득층을 위한 기본소득이 나을 것 같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예산도 많이 드는데 굳이 있는 사람들까지 줄 필요는 없고” “나도 안 받아도 되고” “설마 ‘나도 저소득층 돼서 지원받아야지’ 하는 멍청한 사람은 없다”는 논리였다. 그랬던 진규씨가 “(기본소득을 받았던 경험이) 되게 긍정적이고 80~85%는 되게 행복하다”며 “기본소득이 더 이상 안 들어올 뿐이지 지난 6개월간 제 삶이 변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저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요”라며 누구보다 기본소득에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진규씨가 생각하는 자신의 삶은 최근 2년 사이 최하 0~최상 10단계 중 7→4~5→8로 비교적 부침이 컸다. 조선업이 활황일 때, 삼성중공업 협력업체에서 현재 월급의 두 배를 받고 일할 땐 7이었다. 계약직이긴 했으나, ‘퇴사 뒤 재계약’ 방식으로 상대적인 고용 안정을 누렸다. 부당한 걸 알지만, 소송을 해봐야 시간과 변호사 비용만 부담되고 업계를 떠나지 않을 바에야 재취업에도 걸림돌이 됐다. “그거 얼마 받겠다고….” 퇴직금만 포기하면 임금도 많고 그럭저럭 괜찮은 일자리였다. 조선업 불황으로 회사가 도산하면서 두 달치 월급을 떼였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끼니를 거른 적이 있고, 적금도 깼다.
전주로 돌아온 진규씨는 2016년 12월부터 한전 협력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주 5일, 하루 평균 9시간을 일한다. 잔업이 있으면 토요일에 출근하기도 한다. 농번기 때는 13~15시간씩도 일한다. 회사가 한전으로부터 일을 수주하면 2년 더 일할 수 있다. 아니면 올해 말 또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한다. 임금이 절반으로 깎이고 고용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진규씨의 인생 만족도도 4~5로 꺾였다.
예전엔 돈만 바라보고 살았지만…진규씨의 삶이 다시 8로 반등한 건,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의 ‘쉼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다. 기본소득을 받는 6개월간 진규씨의 인생은 “못 돼도 8”은 됐다. “금전적 여유가 생기니까 삶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행복지수 역시 “그래도 7~8”은 됐다. 기본소득을 받기 전 행복지수는 6~7이었다고 대답했지만 “헛되게 살지는 않았는데 5점을 주기가 좀 그래서” 일부러 후하게 쳐준 점수다.
기본소득을 받고 난 뒤 진규씨는 ‘기본소득이 지속적으로 주어진다면 일하는 시간을 좀 줄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때문인지 “조선소 경기가 좋아져도 다시 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조선소가 한창 바쁠 때, 진규씨는 최장 63일까지 하루도 못 쉬고 일을 해봤다.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에 회사에서 아침밥을 먹고 밤 10~11시까지 일하다 퇴근하고 돌아와 12시에 잠드는 숨가쁜 생활을 반복했다. 너무 힘이 들어서 ‘내일은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알람이 울리기 “딱 5분 전” 눈을 떠서 다시 출근하는 일상을 되풀이했다. “그때는 돈만 바라보고 살았”지만 “이제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어휴, 그렇게 살고 싶진 않다”고 한다.
정우주 기본소득전북네트워크 대표는 “처음부터 데이터나 수치를 기대한 실험은 아니었고,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인식이나 삶의 변화를 알아보려 했다”며 “삶의 질과 일상의 여유 회복 등의 측면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설명했다.
군산·익산·전주=글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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