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합의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판문점 선언)은 여러모로 남북기본합의서(1991년)와 10·4 정상선언(2007년)을 떠올리게 한다. 청와대가 회담에 앞서 밝힌 △남북관계 △평화체제 △비핵화 등 3개 핵심 의제는 3개 항목 13개 조항에 흩어져 있다.
더욱 높아진 이행 방안 수위판문점 선언의 기본틀은 1991년 12월 남북이 합의하고, 1992년 2월 발효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닮았다. 한반도 평화의 핵심이 여전히 ‘냉전체제 해체’란 점에선, 그때나 지금이나 정세가 그리 달라진 것도 없는 게 사실이다. 다만 불가침에 더해 비핵화가 추가됐고, 실천적인 이행 방안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전문과 △남북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을 중심으로 하는 4개 장 25개 조로 구성돼 있다. 남북 화해에 관한 실천 과제를 담은 기본합의서 제1장에서, 남북은 △상대방 체제 인정·존중 △내부 문제 불간섭 △상호 비방·중상 중지 △파괴·전복 행위 금지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 △국제무대에서 대결·경쟁 중지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설치·운영 등에 합의했다.
판문점 선언에도 남북 화해 관련 항목이 제1항에 몰려 있다. 무엇보다 기본합의서에서 판문점에 설치하기로 했던 남북연락사무소도, 위기와 목적이 ‘업그레이드’된 것도 눈에 띈다. 기본합의서 당시엔 ‘남북의 긴밀한 연락과 협의’가 연락사무소의 목적이었던 반면, 판문점 선언에선 “당국 간 협의를 긴밀히 하고, 민간 교류와 협력을 원만히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쌍방 당국자가 상주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 지역에 설치”하기로 한 것은 남과 북이 이른바 ‘공동 거버넌스’를 구성해 운영했던 개성공단관리위원회를 떠올리게 한다.
기본합의서의 제2장은 불가침 항목이다. 남북은 제9조에서 “상대방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했다. 이어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이 규정하는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을 불가침 경계선으로 명시했다. 이어 남북은 불가침 약속 이행을 위해 △군사공동위원회 구성·운영 △군사직통전화 설치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에 합의했다.
기본합의서에서 강조한 ‘불가침’은 판문점 선언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과 북은 제2항에서 “한반도에서 첨예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일체의 적대행위 전면 중지’를 강조하며, “비무장지대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나가기로” 합의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부에서 제기했던 것처럼, 향후 군사분계선 주변에 배치된 남북의 병력을 후방으로 물리는 문제가 논의될 가능성을 내비친 셈이다. 남북은 5월 안에 장성급 군사회담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국방장관 회담을 포함한 군사당국 회담을 자주 열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약속을 제3장에 모았다. 남북은 제15조에서 “민족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 전체의 복리 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교류·협력의 목표로 규정했다. △자원 개발 △왕래·접촉 △이산가족 서신 교환·상봉·재결합 △철도·도로 연결과 해로·항로 개설 등을 위한 원칙을 담아냈다. 기본합의서가 남과 북의 ‘평화 공존’을 제도화하기 위한 기본틀이란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판문점 선언에서도 남과 북은 △8·15 이산가족 상봉 행사 개최 △2018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 공동 진출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 왕래 활성화 △동해선·경의선 철도·도로 연결 등에 합의했다. 10·4 선언 당시에도 남과 북은 선언문에 2008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공동 진출 등 교류·협력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 적은 바 있다.
기본합의서의 틀과 10·4 선언의 내용을 따오면서, 판문점 선언은 여러 면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기본합의서는 ‘정전 상태가 평화 상태로 전화될 때까지 정전협정을 준수한다’고 강조했다. 10·4 선언에도 비슷한 문구가 등장하지만, 당시엔 ‘평화체제’ 대신 ‘종전선언’까지만 제시했다. 반면 판문점 선언은 “현재의 정전 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라며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한다고 합의했다. ‘3자 또는 4자’란 표현은 10·4 선언에도 등장한다.
이번 정상회담은 5월 말 또는 6월 초로 예상되는 북-미 정상회담의 ‘징검다리’로 평가된다. 따라서 비핵화와 관련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오는 게 중요했다. 남과 북은 제3조 4항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고 적었다. 이어 “북쪽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 있고, 중대한 조치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앞으로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합의했다. 그간 김 위원장의 입을 통해 외부로 전해졌던 비핵화 의지가 판문점 선언에 명시됐다는 점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평가할 만하다.
정상회담 정례화 의지이 밖에 남북 정상이 ‘수시로’ 만나자고 했던 10·4 선언과 마찬가지로, 판문점 선언 역시 △직통전화 수시 통화 △정기적인 정상회담에 합의했다. 문 대통령이 올가을 평양을 방문하기로 합의한 것도, 정상회담 정례화 의지를 밝혀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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