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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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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아이 낳을 권리

독일, 뇌 이상 아이 산재로 인정…

임신 여성 금지업무 규정하고 위반시 강력 제재하는 등 여성 산업보건정책 강화해야
등록 2018-04-03 16:44 수정 2020-05-03 04:28
고용노동부는 임신노동자를 위해 근로감독을 하거나 작업환경을 측정한 적이 없다. 한 산부인과 신생아실 인큐베이터 모습. 연합뉴스

고용노동부는 임신노동자를 위해 근로감독을 하거나 작업환경을 측정한 적이 없다. 한 산부인과 신생아실 인큐베이터 모습. 연합뉴스

이미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대한민국 출산율이 연일 화제다. 아이를 안 낳는 이유는 고용 불안, 주택 불안정, 보육지원 체계 미비, 낮은 성평등 의식 등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놓친 점이 있다. 우리 사회가 이미 가진 아이조차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 통계를 보면 유산이 해마다 늘고 있다. 2006년 5만1천 명에서 2015년 7만2천 명으로 1.4배나 늘었다. 열 달을 못 채우고 37주 미만에 태어난 미숙아도 2006년 2만2천 명에서 2015년 3만 명으로 1.4배 늘었다.

수두와 풍진 관련 규정만 존재

이런 변화는 고용률이 높아지는 여성노동자가 겪는 산업재해와 결코 무관치 않다. 나는 2017년 여성가족부의 ‘산업안전정책 특정성별 영향분석평가’에 연구책임자로 참여했다. 보고서에서 ‘성인지적 관점’으로 산업안전보건 정책의 전반을 손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사 결과, 산업안전보건법상 작업환경 측정과 사업장 위험성 평가에 임신·산후 여성을 보호할 평가 기준이 없다는 문제점이 발견됐다. 여성이 많이 있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 서비스직 감정노동자는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다수였다.

여성들은 직장이 아이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면 임신 전후로 직장을 그만두거나 아예 아이 갖기를 포기한다. 경제적 사정 등으로 직장을 다녀야 한다면, 임신 기간 내내 유산이나 사산 걱정, 기형아를 낳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열 달을 보낸다. 지금처럼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집단 유산과 선천성 장애아 출산이라는 사건을 언론에서 보면 여성들이 갖는 임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우선 미비한 법 체제가 큰 문제다. 근로기준법은 임신 중인 여성노동자가 하면 안 되는 업무를 규정하고, 이를 위반하면 사업주는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임신노동자가 안전한 직장생활을 하도록 사업주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산업안전보건법에 유일하게 수두와 풍진 같은 감염병에 한정해 감염자 접촉 제한과 검사 시행만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고용노동부는 임신노동자를 위해 근로감독을 하거나 작업환경을 측정한 적이 없다. 여성노동자가 생식 독성 인자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도 정부나 기업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산업구조의 변화로 근무형태가 다양해지고 작업공정이 복잡해져, 새로운 화학물질이 크게 늘어났다. 불임·유산·기형을 유발하는 생식 독성 인자도 늘어났지만 이 또한 법률에 반영돼 있지 않다. 생식 독성 물질에 노출돼 피해를 입는 것이 산업재해라는 인식 자체가 부족하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5년 동안 생식 독성과 관련한 산재보험 신청은 불과 8건뿐이었다. 그중 절반인 4건만 승인됐다.

특히 병원 환경에서는 임신노동자들이 마취가스, 항암제 등 의약품, 유기용제, 소독제, 방사선 등 인체에 해로운 물질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또한 육체적으로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 병원 내 감염, 교대근무 등의 부담도 있다. 병원에는 자연유산과 선천성 기형, 조산, 저체중아 출산 등 생식 독성을 일으킬 만한 물리적·화학적·생물학적·심리사회적 요인이 상존한다.

정부, 아이 키우는 방안 지원 초점

지금처럼 임신노동자를 위한 산업보건이 관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제주의료원에서 일어난 집단 유산과 기형아 출산 등의 비극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귀결 아니었을까? 이런 문제 때문에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의 인생과 그 가족의 고통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50년 전 독일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9년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뇌 이상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 아이에 대해 엄마는 산재보험 보상을 신청했고, 노동자가 아닌 아이의 업무상 재해를 산재보험에서 인정할지 논쟁이 벌어졌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1977년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임신 기간에 일어난 업무상 재해로 태아의 건강이 손상됐을 때 산재보험에서 보상받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성과 모성 보호, 보편적 평등 원칙, 사회국가 원칙을 위배한다’고 밝혔다. 여성노동자와 그 태아를 동일체로 보고, 업무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더라도 개연성이 있다면 산업재해로 인정함이 타당하다며 사업주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

대한민국은 국가 차원에서 미숙아와 선천성 장애아에게 정부지원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지급 대상이 일정 소득 이하로 한정됐고, 지원금에도 한도가 있어 경제적 지원이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성탄절 다음날, 사상 초유의 저출산율 대책 마련을 위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간담회가 열렸다. 문재인 정부의 주된 저출산 정책 추진 방향은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육아휴직 활성화 △고용보험 미가입자 출산지원금 도입 △경력단절 여성 재취업 지원 △영유아·초등 보육 지원 등이었다. 즉, 출산 이후 ‘아이를 키우는 지원 방안’ 중심으로 대책이 제시돼 있다. 여성노동자의 안전과 보건 대책을 강화해 직장 내 임신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등 ‘아이를 건강하게 낳게 하는 지원 방안’이 빠져 있다.

산재보험에 아예 가입조차 못하는 여성에게도 눈을 돌려야 한다. 산재보험 수급자 84.7%가 남성, 15.3%가 여성이다. 여성 비율이 낮은 건 업무 위험의 차이도 있겠지만, 여성노동자 가운데 산재보험에 못 드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학습지 교사, 보험 모집인, 간병인, 골프장 캐디 등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 중 여성 비율은 약 70%에 이른다. 여성 종사자가 다수이면서 산재보험 적용을 못 받는 취약 직종의 산재보험 적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여성 관련 산업보건정책 강화해야

안전한 직장 환경을 마련해 여성노동자가 유산이나 사산을 겪지 않고, 미숙아나 기형아가 아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임산부 관련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미비한 규정을 보완해 임신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며, 임산부 관련 산업보건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업무상 재해로 기형아나 질병을 가진 자녀가 태어났다면 아이에게 신속한 산재보험 보상을 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때, 여성들은 안심하고 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현주 우송대 간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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