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덕분이었다. 한국인이 테니스로 이야기꽃을 피울 줄은! 오랜만에 추억의 이름들을 소환했다. 이반 렌들이 있었고 존 매켄로가 있었고, 여자 선수로는 ‘철녀’라 하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가 있었다. 한국에서 이들은 신문 지면이나 스포츠 뉴스, 그리고 가끔 해주던 윔블던 테니스 중계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선수였다. 다른 세계에 있는 선수들 같았다. 한국 프로야구보다 몇 배는 뛰어난 기량을 가진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보다 더 먼 곳에 있는 상상 속 존재들 같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금목걸이와 ‘꿀벅지’의 유진선 </font></font>그런 나에겐 정현이나 이형택보다 유진선이란 이름이 더 친숙하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금목걸이, 엄청난 허벅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1986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무려 4관왕에 올랐다. 단식뿐 아니라 복식, 혼합복식, 단체전까지 4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요즘 말로 ‘하드캐리’한 셈이다. 일본을 꺾고 사상 처음 데이비스컵 월드 그룹 진출에 큰 공을 세웠으니 1980년대엔 유진선이 곧 테니스였다.
인터넷이 없다뿐이지 그때 유진선의 인기는 정현 못지않았다.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가진 사인회에선 2시간 동안 1천 명 넘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그가 직접 한 말을 빌리면 “조용필의 입장을 이해하겠”을 만큼 많은 인기였다.
하지만 그런 유진선도 세계 무대에선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웠다. 1988년 서울올림픽 본선 1회전에서 그는 탈락했다. 그의 남자프로테니스(APT) 개인 최고 랭킹은 194위였다. ‘최고’ 랭킹이 194위라는 건 그보다 잘하는 선수가 200명 넘게 있다는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벽이었다. 개인 기량으로도, 여건이나 환경으로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더 이반 렌들이나 존 매켄로, 보리스 베커 같은 선수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존재들처럼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아시아인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열패감 같은 감정도 생겨났다. 국가를 뛰어넘어 아시아인이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활약할 때 느끼는 동질감 같은 것이 있다. 스즈키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서 최다 안타 기록을 세울 때,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서 안드레아 피를로를 경기장에서 압박하며 지워버렸을 때 어쩔 수 없이 환호하게 되는 감정이 있다.
하지만 테니스에서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어려웠다. 특히 남자 테니스의 벽은 더 두꺼웠다. 중국인 여자 테니스 선수 리나가 2011년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하며 아시아 최초, 그리고 유일한 그랜드슬램 우승자로 이름을 올렸지만 남자 테니스만은 요지부동이었다. 일본의 니시코리 게이가 US오픈에서 준우승하며 세계 랭킹 4위까지 오른 적이 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마이클 창에게 괜히 마음이 갔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대만계 미국인이고 미국에서 나고 자란 그를 동양인이라 하긴 애매하다. 하지만 175cm라는 테니스 선수로는 작은 키는 동질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는 피트 샘프러스와 앤드리 애거시 시대의 선수였다. 불리한 신체 조건으로 샘프러스와 애거시의 공격을 악착같이 받아내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그를 응원하게 됐다. 마이클 창은 동양계도 남자 테니스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보여준 선수였다.
그리고 정현이 등장했다. 정현을 좋아할 이유는 충분하다. 잦은 부상으로 조금씩 하향세에 있는 니시코리 게이에 이어 오랜만에 나온 동양인 신성이었다. 한국 선수가 세계 랭킹 1위였던 조코비치를 이긴다는 상상을 과연 어느 누가 했을까. 렌들과 샘프러스를 봐온 사람이라면 한국 뮤지션(방탄소년단)이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무대에 선다는 상상보다 더 멀리 있는 상상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테니스 매력 새삼 일깨워준 경기</font></font>거기에 정현은 철저한 ‘언더도그’였다. 세계 랭킹 58위의 선수가 자기보다 위에 있는 선수들을 도장깨기 하듯 한 명씩 이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와 노바크 조코비치(14위)를 차례로 꺾은 건 절정이었다. 한국인(동양인)이라는 동질감, 그리고 언더도그 효과까지 더해져 그는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모두의 눈과 귀가 그의 경기와 인터뷰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했다.
그의 경기를 찾아보며, 그리고 그의 인터뷰를 찾아 읽으며 앞서 내가 얘기한 모든 사항이 무색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현의 경기에서 같은 동양인이라는 감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다가왔다. 그저 경기하는 그가 멋있었다. 백핸드 다운더라인에 감탄했고 경기 뒤 인터뷰에 반했다. 여기에 동양인의 한계 같은 나의 비좁은 열패감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우아하게 경기했고 여유롭게 인터뷰에 임했다. 겸손과 당당함, 그리고 쿨함을 모두 갖춘 새로운 인류가 탄생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정현의 경기를 보며 테니스의 매력을 새삼 깨달았다. 경기가 끝난 뒤 정현과 조코비치가 주고받은 매너는 빛난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선수가 서브를 넣을 때 장내가 조용해지는 침묵의 순간은 언제나 짜릿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테니스 영웅 로드 레이버가 경기 도중 등장했을 때 모든 관객이 기립해주는 모습은 테니스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장면 같았다. “테니스는 귀족과 신사의 스포츠”라는, 어쩌면 배알 꼴릴 수 있는 말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쓰는 지금, 정현은 로저 페더러(2위)와의 경기에서 기권패했다. 언더도그의 행진은 여기까지였다. 이미 발바닥에 잔뜩 물집이 잡혀 있던 정현은 물집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기권했다. 해당 기사의 사진은 정현과 페더러가 경기가 끝난 뒤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37살의 페더러는 22살 어린 정현을 위로하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페더러는 “2세트부터 정현 움직임이 느려졌다. 결승에 올라 행복하지만 이런 승리는 원하지 않았다”며 정현을 배려했다. 또 한 번 매너가 팬을 만드는 순간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외신 “정현은 젊은 선수이자 외교관”</font></font>‘졌잘싸’라는 인터넷 용어가 있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뜻으로 패배했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거나 멋진 경기를 보여줬을 때 쓰는 말이다. 지금의 정현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영국 일간지 은 정현을 가리켜 “그는 탁월한 젊은 선수일 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말솜씨를 칭찬하는 의미였지만, 나에게 그는 진정 멋진 테니스 외교관이었다. 그는 테니스란 종목의 매력을 알리고 테니스의 가치를 빛나게 해준 선수다. 그는 정말 멋지게 잘 싸웠다. “정현, 보고 있나?”
김학선 대중음악 평론가 겸 스포츠 덕후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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