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4강에 오를 때까지 정현의 발이 코트를 구를 때 왠지 ‘까르르까르르’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그의 얼굴은 얼음처럼 침착했고, 공을 재단하는 라켓의 규율은 벅찰 정도로 정교했다. 발바닥 통증으로 다소 싱겁게(!) 세계 4강 도전은 마무리됐지만, 이제부터 그가 보여줄 매혹의 끝이 어딘지는 아직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정현의 놀라운 성취는 잠시 미뤄졌을 뿐이다. 어쩌면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을 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번호 은 한 청년이 제 몸(human body)만으로 일궈낸 도전의 역사를 전한다. 박원식 편집국장이 멜버른 현지에서 정현의 경기를 지켜봤고, 슬럼프에 빠졌던 정현을 일으켜 세우는 데 공을 세운 ‘팀 정현’의 숨은 공로자 박성희 박사를 만났다. 어른이 되어 딱 100번의 경기를 치렀고, 그중 46번은 졌던 청년이 축구 다음으로 지구에서 보편적인 스포츠의 역사 앞에 서 있다. _편집자 </font>
한국 테니스는 세계 무대에서 늘 변방이었다. 2000년 US오픈테니스대회에서 이형택 선수가 16강에 올랐을 때, 세계는 한국도 테니스를 하는지 궁금해했다. 한국에는 세계 1위를 하거나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종목이 많아, 한두 번의 16강 정도는 큰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다. 한국 테니스는 그동안 세계 1위는 물론 톱10 안에도 든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테니스는 비인기 종목일 수밖에 없었고, 외국에서도 한국을 테니스 후진국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22살 청년 정현(한국체대)이 2018 오스트레일리아오픈 테니스 남자단식에서 강호들을 잇따라 꺾고 4강에 진출하며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국내에선 테니스에서도 세계 정상을 넘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018년 ‘국민 스타’ 점찍은 정현</font></font>해방 뒤 73년간 이어진 대한민국 스포츠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스타가 명멸을 거듭했다. 시대는 스포츠 스타를 원하고 그들이 이룩한 성과는 팍팍한 삶, 부정적 일들로 고통받아온 국민을 위로했다. 한국 스포츠가 세계 무대에서 이뤄낸 가장 위대한 성과는,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그해 서울 광화문 거리를 수놓았던 ‘붉은 악마’의 거대한 함성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인기 종목인 야구 대표팀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일본과 쿠바 등 세계 강호들을 잇따라 격파하고 금메달을 따냈다.
그렇지만 비인기·불모지 종목에서 탄생하는 예상치 못한 성공 스토리는 국민에게 더 크고 강력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대표적인 예가 ‘피겨 여왕’ 김연아다. 김연아가 2010년 캐나다 밴쿠버겨울올림픽에서 보여준 우아하고도 완벽한 연기에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가 환호했다. 시간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골프 퀸’ 박세리의 성공 신화가 있다. 그는 1998년 세계 최고 권위의 메이저 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했다. 박세리가 흰색 양말을 벗은 채 연못에 발을 집어넣고 샷을 하는 장면은 시름에 빠진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1997년부터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선발투수로 자리잡았다. 그가 던져대는 96마일짜리 강속구는 외환위기 사태에 몰려 있던 우울한 조국에 유일한 희망이었다. 한국인들은 이들에게 ‘국민 스타’ 지위를 부여해왔다.
2018년 ‘국민 스타’ 자리를 정현이 이어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열악한 테니스 환경과 수준을 볼 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토종 한국인 선수가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4관왕이 빛났던 유진선의 남자프로테니스(ATP) 최고 랭킹은 194위에 불과했다. 이후 등장한 ‘레전드’ 이형택이 2000년과 2007년 US오픈에서 16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일궈냈지만, 한국 테니스는 분명 세계의 변방이었다.
1월26일 오후 5시30분, 정현은 5천만 국민의 응원을 등에 업고 오스트레일리아오픈 테니스대회 주경기장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 들어섰다. 상대는 ‘테니스의 황제’라는 세계 2위 강호 로저 페더러였다. 그러나 젊은 정현은 8강 전까지 보여주던 끈질긴 근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첫 서브게임을 내주는 부진 끝에 1-6으로 허무하게 1세트를 내줬다. 장기인 사이드라인에 바짝 붙은 백핸드 스트로크는 날카롭지 못했고, 평소 약점인 포핸드에서도 범실이 많았다. 이유가 있었다. 정현은 2세트에서 다시 한번 서브게임을 브레이크를 당해 게임 스코어가 1-4가 된 상태에서 메디컬 타임아웃을 불렀다.
정현은 고통스럽게 신발과 왼쪽 양말을 벗었다. 그동안 이어진 ‘혈전’ 탓에 정현의 발바닥엔 피멍이 들어 있었다. 결국, 정현은 2-5로 뒤진 상황에서 ‘체어 엄파이어’(테니스 경기의 주심)에게 가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 모인 1만5천여 관중은 안타까운 패자를 향해 따뜻한 박수를 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빅4’가 떠난 자리 누가 메울까</font></font>정현은 이번 오스트레일리아오픈에 출전해 4강에 오를 때까지 세계 톱 랭커들과 겨뤄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평정심을 보였다. 그 모습에 지금까지 테니스를 잘 몰랐던 한국인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오스트레일리아 현지는 물론 전세계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테니스 선수로 성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는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미국 사람들은 정현의 활약을 아낌없이 응원했다.
그동안 세계 테니스계를 주름잡은 것은 신체 조건이 뛰어난 미국,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 서구 선수들이었다. 1968년 그랜드슬램 대회가 현재 체제로 자리잡은 뒤 4강 이상에 올라간 아시아계 선수는 대만계 미국인 마이클 창(1989년 프랑스오픈 우승)과 일본인 니시코리 게이(2014년 US오픈 준우승)뿐이었다. 이제 메이저 대회 4강에 갓 진출했을 뿐인 젊은 신예에게 세계가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ATP에선 로저 페더러(2위·스위스), 라파엘 나달(1위·스페인), 노바크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 앤디 머리(19위·영국)를 묶어 ‘빅4’라고 한다. 페더러는 테니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고, 나달과 조코비치 역시 그랜드슬램 우승의 단골손님이다. 머리는 윔블던과 올림픽 남자단식에서 정상에 오른 선수다. 이들이 2004년 이후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돌아가며 독차지하고 있다.
2004년 2월 페더러가 1위에 등극한 이후 남자 테니스에서 ‘빅4’ 외에 1위 자리에 올라간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페더러(37), 나달(32), 조코비치·머리(31)는 이미 서른 살이 훌쩍 넘었다. 이들이 주요 대회 우승을 독차지하니 세계 테니스계는 새로운 스타 탄생을 간절히 원했다.
ATP는 이들 세대를 대체할 신진 세력을 끌어모았다. 새로운 기대주들을 집중 조명하고 인터뷰해 알렸다. 이들에게 주요 대회의 와일드카드 출전권을 주고 틈만 나면 같이 모아 사진을 찍어 퍼뜨렸다. 그리고 연말에 이들을 대상으로 왕중왕전을 열었다. 지난해 11월 첫주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넥스트 제너레이션 투어 파이널스’ 대회였다. 그 대회의 우승자가 정현이었다. 향후 남자 테니스계를 이끌어갈 ‘넥스트 제너레이션’ 가운데 정현이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대회 이후 세계 테니스계는 정현의 활약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정현이 출전한 첫 그랜드슬램 대회가 이번 오스트레일리아오픈이었다. 이 대회에서 정현은 1회전 미샤 즈베레프(35위·독일), 2회전 다닐 메드베데프(53위·러시아), 3회전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독일), 16강전 노바크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 등을 차례로 꺾으며 세계 테니스계의 기대에 부응했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잇따라 뒤집은 정현에게 ‘자이언트 킬러’(거물 사냥꾼)라는 별명이 붙었다.
물론 정현 외에 넥스트 제너레이션으로 꼽히는 선수는 많다. 올해 21살인 알렉산더 즈베레프는 투어 대회에서 6차례 우승한 최정상급 선수다. 지난해 11월 세계 3위까지 올랐다. 즈베레프의 그랜드슬램 최고 성적은 지난해 윔블던의 16강 진출이다. 닉 키르기오스(23살·17위·오스트레일리아)도 테니스 기술만큼은 당장 그랜드슬램 우승을 해도 부족하지 않다. 키르기오스는 투어 대회에서 4차례 우승했고, 2014년 윔블던과 2015년 오스트레일리아오픈에서 각각 8강까지 올랐다. 두 선수가 못 가진 것을 정현은 갖고 있다. 겸손과 절제된 행동이다. 새로운 세대가 투어 우승을 하고 그랜드슬램에서 승승장구하지만, 4강까지 오르고 우승을 하려면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정현의 성과는 차세대 세계 테니스를 이끌 선두 주자로 손색이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열악한 한국 테니스 환경서 성장 </font></font>정현은 한국의 테니스 환경에서 자라고 배운 토종 선수다. 학교에서 합숙하고, 단체전에 출전하고,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대회에 출전했다. 그러는 가운데 정현이 미국 주니어대회에서 우승하자 외국 매니지먼트사 스카우트의 관심을 받았다. 정현은 2008년 주니어급 테니스 대회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오렌지볼 12세부에서 우승하고, 2011년 오렌지볼 16세부에서 우승했다. 중학교 시절엔 자신이 속한 수원북중의 시즌 전관왕을 이끌며 한국 테니스계를 이끌어나갈 차세대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오렌지볼 12세부 우승 이후 세계 챔피언의 산실인 IMG 닉 볼리티에리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프로에서 통하는 기술을 익혔다. 2013년 7월에는 그랜드슬램 대회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주니어 남자단식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뤄 스타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이후 선수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프로 입문 때 비용 걱정 없이 대회에 다닐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후원사(삼성증권)는 비인기 종목 선수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결정했다.
외국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외국 기자들이 정현에게 꼭 묻는 것이 있다. “한국은 골프 하는 나라이지 테니스 하는 나라는 아니지 않나?” “서울 시내를 다니면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가?” 정현은 그때마다 “한국에서 테니스가 축구, 야구, 골프에 비해 비인기 종목이지만 앞으로 인기 종목이 될 것”이라고 답한다.
정현의 키는 188cm, 몸무게는 87kg으로 테니스 선수로는 큰 편이다. 투어 대회가 주로 열리는 유럽, 미국 등에 가려면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해 불편할 법한데도 정현은 이코노미석을 고집한다. 시합에 나가려면 컨디션 조절이 중요하니 좌석 업그레이드를 하자고 해도 정현은 사양했다. 정현의 부모는 아파트 담보대출을 받아 아들을 뒷바라지해왔다. 정현의 부모는 “중학교 갈 때 대출을 받았는데 갚는 데 딱 10년 걸렸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페더러 “정현, 세계 톱10 진입 확실”</font></font>1월26일 정현에게 2세트 도중 기권승을 거둔 ‘황제’ 페더러는 경기 직후 이어진 ‘온코트 인터뷰’에서 “정현이 타임아웃을 부르기 전까지 몸에 이상이 있는지를 몰랐다. 2세트부터 정현이 물집과 싸우면서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승에 진출해서 기쁘지만, (정현의 부상으로 이기게 돼) 이런 방식을 기대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정현에 대해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정현은 대단히 침착한 모습을 보여줬고, 앞으로 더 대단한 것들을 보여줄 것이다. 정현이 앞으로 세계 톱10에 들 것임을 확신한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지만, 대단한 선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년 정현의 도전은 이제 막 시작됐다.
멜버른(오스트레일리아)=박원식 편집국장<font color="#A6CA37">발바닥 부상에 발목 잡힌 정현</font>
온통 피멍든 발바닥… “고통 1~10 중에 15”
기권의 원인은 발바닥 통증 때문이었다. 정현은 하드코트에서 5경기를 치르면서 왼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피멍까지 들어 잘 움직일 수 없었던 상태였다. 16강전 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잘 움직이지 못했고, 조코비치와의 8강전도 진통제를 먹고 경기했다. 대한테니스협회 관계자는 와 통화에서 정현의 몸 상태에 대해 “물집이 난 정도가 아니라 발바닥이 온통 피멍투성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조코비치와의 경기 뒤에는 다음날 하루 연습도 못하고 쉬었다”고 전했다.
정현은 현지 멜버른의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았는데 오스트레일리아 의사가 “고통 정도를 1~10이라고 할 때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15”라고 답해 의사를 놀라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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