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번에 진행한 새 헌법 써보기 실험은 헌법 정신을 담은 ‘전문’, 기본원리를 담은 ‘총강’, 국민의 권리를 담은 ‘기본권’ 부분에 한정해 이뤄졌다. 그동안 이와 관련된 논의는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등 국가기구 개편 논의에 밀려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_편집자
6월26일 저녁 7시 <한겨레21> 회의실에서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와 1987년생 청년 8명이 모여 새 헌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류우종 기자
홍성수 헌법이 고조선 때도 있었고 중세시대에도 있었던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법은 민법과 형법이 먼저 만들어졌다. 헌법은 시민의 요구로 만들어진 근대국가의 산물이다. 체계적으로 논의해 만든 게 아니라, 시민들이 우르르 모여 여러 요구를 왕에게 전달한 뒤 서명받은 것이 헌법의 기원이다. 헌법 구성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가장 먼저 나오냐’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약속이 무엇이 되어야 하냐는 질문의 대답과 같다. ‘유럽연합 기본권헌장’에선 ‘인간의 존엄은 불가침’이라는 내용이 먼저 나온다. 우리 헌법의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되어 있다. ‘개인이 먼저냐, 국가가 먼저냐’라는 고전적 논쟁과 닿아 있다. 최근 개헌이 논의되면서 헌법에 인간의 권리가 먼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호림 현행 헌법 제1조부터 제3조까지는 기본권 앞에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뒤 공무원 등의 조항은 국가조직에 가까운 내용이라 뒤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분리가 애매하다면, 어쨌든 기본권이 앞에 나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박세미 민주주의가 10년 동안 후퇴했다. (그래서 민주공화국 규정이 앞에 나올 이유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 정부가 잘하고 개정 뒤 30년간 안 바뀐다고 하면 기본권이 앞에 나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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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리 총강에서 기본권 이전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 개인의 권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선언적으로 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공무원 규정은 뒤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총강이 우선 나오는 것에는 동의한다.
김창민 국민의 권리가 국가보다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내용에 동의한다. 다만 그 내용을 전문에 담는 방법이 있을 듯하다.
홍성수 기존 체제를 살리면서 절충식으로 갈 수는 있다.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내용이 너무 뒤인 제10조에 나오는 건 문제다.
홍성수 전문은 법률이나 헌법의 필수 요소는 아니다. 헌법에 전문을 두는 국가도 있고 안 두는 국가도 있다. 지금 전문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계승해야 할) 역사적인 사건과 기본 정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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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림 역사적 사건을 모두 넣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어떤 사건을 넣고 빼느냐에는 동의 수준이 다를 수 있다. 전문에 나오는 ‘민족의 단결’ 같은 표현은 지금 사회에서 강조할 내용이 아닌 것 같다. 다양성과 인권 존중 등이 포함되면 좋겠다.
임현종 헌법 전문을 명문으로 만들면 좋겠다. 사건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부마항쟁, 6월 항쟁 등 많으니까 ‘민주열사’처럼 종합할 수 있는 단어를 쓰는 건 어떨까. 촛불시위는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지우 역사적 사건 중 6월 항쟁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1987년 체제부터 헌법을 존중하는 시대가 시작됐다고 본다. 민족의 단결은 ‘올드’하지만 통일을 이야기하려면 필요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정지우 전문이 기회만 균등하고 결과는 상관없다는 느낌을 준다. 결과가 완전히 평등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지향하는 맥락이 담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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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 평등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차별 금지는 현대적인 과제다. 선진국에서도 인권 문제는 자유권보다 평등권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호림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처럼 차별 금지 사유를 열거해야 한다. 특히 성적 지향을 포함해서 혐오나 차별이 크게 대두되는 이들이 있다. 성평등 조항도 별도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임현종 성평등 내용을 별도 조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찬성한다.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에 배려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점이 잘 들어가면 좋겠다.
이호림 그냥 차별을 금지한다고 할 때 어떤 차별을 금지하냐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를 차별하는 사람들은 ‘이것은 차별이 아니다’라며 차별하는 경우가 있다. 리스트가 무한정 길어질 수는 없지만 차별받기 쉬운 취약한 이들을 직접 거론해 명확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조아라 (차별에 취약한 이들을) 열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명시해서 적어도 이 부분은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국민 인식을 만들어야 한다. 헌법에 명시하고 하위 법령에서도 차별하지 못하게 국가의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홍성수 노동권 이야기를 해보자. 흥미로운 건, 프랑스·독일·미국 헌법에는 노동권이 그리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그 나라들이 더 강력하게 노동권을 보장한다. 우리는 헌법에만 강하게 규정돼 있다.
홍은교 우선 용어부터 ‘근로’에서 ‘노동’으로 바꾸어야 한다. 예전에는 둘의 차이를 잘 이해 못했는데, (지금 표기는) 열심히 일한 사람만 노동자로 인정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 ‘열심히’ 일만 할 건가.
최유리 노동자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더 있으면 좋겠다. 노동3권처럼 집단으로 뭉친 노동자뿐 아니라 개개인의 권리를 명문화해주면 좋겠다. 프리랜서로 일하는데, 이 경우 노동조합이 별로 없다. 단체교섭은커녕 근로계약서도 없는 경우가 많다.
김창민 노무사 준비를 하다 우리나라 노동법에 예외조항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가 나서 책을 집어던졌다. 헌법에서 이런 문제를 조절할 수는 없을까.
이호림 근로의 의무(제32조 2항)는 삭제가 맞는 것 같다. ‘의무’라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홍성수 안전권은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이 강조하고 있다.
박세미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얼마 전 아파트 외벽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주민이 줄을 끊어 추락사한 사건을 보고 섬뜩했다. 기업이 안전의 의무를 약간 더 보장했으면 보호할 수 있었다. 돈의 논리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가 이런 문제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홍성수 헌법에 국가의 안전 보장은 여러 번 나온다. 당연한 내용임에도 재해 등에서 안전할 권리는 거의 없다.
김창민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이 충격적이었다. 어릴 때는 여성이 밤길을 걷는 게 위험하다는 걸 잘 몰랐다. 나중에 보니 남성에게는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위험이 여성에게는 상당히 심각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성이나 노인, 아동 등 상대적으로 범죄에 취약한 계층의 안전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홍성수 주거권은 1987년 상황에 비하면 훨씬 필요가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최유리 주거권은 시장논리에 좌우되는 것이기도 하다. 헌법에 어떻게 담을지 고민이다.
이호림 국가의 적극적 의무 중 하나로 시장의 상품을 공정하게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는 느낌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임현종 주거 지원에 방점을 두면 될 것 같다.
홍성수 정치적 기본권과 관련해서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완화하거나 국민소환제를 넣자는 의견이 있다.
박세미 정당 활동을 하다보니 내부적으로도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논의를 많이 하게 된다. ‘우리미래’ 창당 과정에서 청년정당의 창당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공무원 신분이라 가입 못한다는 분이 많더라. 특히 소방공무원은 처우가 너무 열악한 상황이라 관심이 많은데도 정치적 중립 의무 때문에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
이호림 직무상 정치적 중립은 두고 그 외의 정당 가입 등은 공무원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떨까.
임현종 공무원에게 정치 후원금도 못 내게 하는 것은 지나친 제약 같다.
홍성수 다른 쟁점과 관련한 논의를 더 해보자.
김창민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탄핵 결정을 할 때 숨죽이면서 봤다. ‘그러나’가 계속 등장하면서 대통령 탄핵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제일 화가 난 것은 세월호 참사 당시 아무 일도 안 한 점이 탄핵 사유에 포함되지 않았을 때다. 차라리 대통령은 재난시 무엇보다 우선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호림 ‘동물권’ 같은 경우 표현이 애매한 것 같다. 환경권에 종 다양성 등의 내용이 있다. 동물복지 방식으로 추가되면 좋을 것 같다.
홍성수 동물권 내용은 환경권의 일환으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동물을 독자적 권리의 주체로 보는 건 입법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정지우 여가와 휴식의 권리가 명시되면 좋겠다. 야근금지법이나 연차를 의무적으로 쓰지 않으면 불이익을 준다는 규정이 도입될 수 있게. 또 문화예술의 경우 분야가 다양한데, 시장에서 제대로 소비되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 좋겠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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