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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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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본의 탄생

6월 항쟁의 구심점 국본 탄생 비화…

1986년 존폐 기로 민주화운동 1987년에 극적으로 살아나
등록 2017-06-13 16:12 수정 2020-05-03 04:28
1987년 6월14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인명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맨 오른쪽)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인 대변인은 2006년 한나라당 윤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올해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6월14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인명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맨 오른쪽)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인 대변인은 2006년 한나라당 윤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올해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난 6월5일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312호는 굳게 잠겨 있었다.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범국민운동본부’(국본)는 1987년 6월1일 이곳에서 현판식을 열었다. 항쟁의 기억을 더듬어 찾지 않고서는 이곳이 지도부의 사무실이 있던 자리라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기독교회관 관계자는 “6월 항쟁과 관련해 312호 사무실을 따로 기념하지 않는다. 관련 자료를 보관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회관 관리자에게 312호는 여러 사무실 중 하나였다. 찾아간 312호는 좁았다. 양 끝이 열 걸음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현재는 311호를 쓰는 ‘우리민족교류협회’가 312호까지 터서 사용하고 있다.

‘그해 여름’ 6월 항쟁이 벼락처럼 시작되기 전까지 시대의 주인공은 전두환 독재정권이었다(1986년 겨울, 재야의 구심이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즉 민통련의 장충동 분도회관 사무실은 경찰에 의해 강제 폐쇄당했다). 애초 이곳에 사무실을 마련한 것도 국본을 준비하던 실무자가 아닌 기독교 교계였다. 국본이 만들어지면 정부의 탄압으로 사무실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해 미리 손을 쓴 것이다. 교계 원로들은 국본이 출범하기 전인 5월 중순께 정의평화실천목회자협의회 명의로 301호를 우선 계약했다. 이후 장소는 312호로 바뀌었다.

기독교회관 312호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 엄혹한 시절이었다. 당시 민통련 사무국장인 고 성유보 전 편집위원장은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86년과 87년처럼 극과 극을 달린 해도 없을 것이다. 86년은 공개적인 민주화운동이 존폐의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87년 온 국민이 함께한 6월 항쟁이 일어났다”고 회고했다. 이는 재야만의 판단이 아니었다. 1986년 11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된 성 전 위원장에게 담당 검사는 “우리는 지난 1년간 민주화운동권을 죄다 평정했다. (86년 10월) 건대 사태로 학생운동 주동자들이 모두 일망타진됐다. 민통련도 사무실까지 폐쇄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종교인들이 좀 남아 있긴 하나, 그들이 운동에 앞장서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14일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2·17 박종철 국민추도회와 3·3 평화대행진이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항쟁의 기운을 감지하기 어려웠다. 4월13일 전두환이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호헌 입장을 밝힌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4·13 호헌 조치로 분위기가 급속히 반전됐다. 민통련은 호헌 조치에 맞선 전국 단위의 조직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국본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는다. 4월13일 이후 재야와 야당을 포괄하는 반독재 연합체인 국본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향린교회… 천운이었다

국본 설립 일정은 각계 지도자들에게 미리 통보됐지만 장소는 미정이었다. 경찰의 봉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발기인대회는 5월27일, 결성대회는 5월28일로 잡혔다. 문제는 장소였다. 경찰의 방해로 정족수가 차지 않으면 국본 설립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비밀리에 대회 후보지로 명동성당, 성공회 대성당, 향린교회, 복음교회 등 4곳이 선정됐다. 이 사실은 국본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내정된 오충일 목사, 실무를 총괄한 황인성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총무, 해당 성당 및 교회 책임자만 알고 있었다.

5월27일 새벽 6시, 황 총무가 예정 후보지 4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거사가 시작됐다. 성공회 대성당 앞에는 이미 경찰버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복음교회는 경찰이 없는 대신 근처 기독교회관 앞에 형사들이 진주해 있었다. 명동성당은 경찰 200여 명에게 봉쇄된 상태였다. 불과 100여m 떨어진 향린교회엔 아무도 없었다. 천운이었다. 전날 밤부터 YMCA 호텔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충일 목사에게 사실이 보고됐다. 오 목사는 곧바로 향린교회로 향했다. 황 총무는 종로3가 전철역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종로3가 전철역에는 발기인대회에 참석하려고 준비하던 전령이 대기 중이었다. 황 총무로부터 ‘향린교회’라는 소식을 접수한 전령이 향한 곳은 서울 종로 수협중앙회 건물의 한 다방이었다. 계훈제 민통련 의장 대행이 거기에 있었다. 다방에 있던 민통련 관계자들은 담당 형사가 따로 있는 요시찰 대상자였다. 곧바로 각자 다른 방향을 잡아 나섰다.

아침 7시15분 안병무 교수를 시작으로 30여 분 만에 계훈제, 박형규, 김상근, 최형우, 양순직 등 각계 인사 150여 명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곧바로 발기인대회가 시작됐다. 결성대회가 뒤이었다. 원래 결성대회는 발기인대회 다음날로 예정돼 있었지만 참가자 연행, 장소 봉쇄 등 경찰의 방해를 염려한 지도부가 계획을 수정했다. 이후 임원이 선출됐다. 김승훈 신부가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결성선언문을 낭독하면서 행사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100여m 떨어진 명동성당에 있던 경찰들은 여전히 깜깜무소식이었다.

국본 실무자들은 곧바로 언론사에 대회 개최 소식을 알렸다. 혼비백산한 경찰들이 순식간에 교회 앞으로 몰려들었다. 기자들보다 먼저였다. 그러나 행사가 마무리된 향린교회에서 경찰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행사를 마친 30여 명의 국본 상임집행위원들은 곧바로 명동 입구 한일관으로 가서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서울보다 먼저 공동투쟁기구가 선 곳이 있다. 부산이다. 5월20일 부산 당감성당에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와 종교계, 통일민주당, 학생, 재야, 노동자 등 100여 명이 ‘호헌반대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부산본부’를 결성했다. 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은 노무현 변호사였다. 상임집행위원 16명 가운데 ‘변호사 문재인’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노무현 상임집행위원장, 문재인 상임집행위원

국본은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에게 사실상 권력을 이양하는 6월10일에 맞춰 ‘6·10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를 준비했다. 이어 ‘6·18 최루탄추방대회’, ‘6·26 평화대행진’ 등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기독교회관 312호 국본 사무실에서 매일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주요 비공개 회의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 아침 일찍 광화문 인근 구세군빌딩 1층 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당시 국본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을까”였다. 구호는 간명하고 쉬워야 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앞세워 비폭력 평화주의의 기조를 유지하기로 했다. 이 아닌 을 부르고, 행사는 민중가요가 아닌 로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 현대사를 뒤바꾼 6월 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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